[베트남 참전 60돌]⑦' More Flags' 캠페인

통킹만의 진실성 실종이 확전의 비극 불러

존슨 "베트남은 미국만의 전쟁 될 수 없다"

6.25 한국 전쟁 때 연합군 모델 재연 희망

베트남으로 모이지 않는 우방국들에 실망

한국은 아직 준비 덜 된 나라 평가한 이유?

1964년 베트남전쟁은 확전과 미국화의 길로 들어섰다. 세계 최강의 나라가 민족해방전선의 도전에 속수무책인 상황을 풍자하는 삽화. (Edmund Valtman for Hartford Times, Library of Congress)
1964년 베트남전쟁은 확전과 미국화의 길로 들어섰다. 세계 최강의 나라가 민족해방전선의 도전에 속수무책인 상황을 풍자하는 삽화. (Edmund Valtman for Hartford Times, Library of Congress)

경찰은 수사를 통해서 증거를 수집한다. 검찰은 증거의 가치를 잰다. 저울눈금이 사회적 심각성을 나타내면, 사건을 법원에 제출한다. 법원은 판결을 통해 공공의 이익과 안전을 지킨다. 이 권선징악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세 기둥인 경찰, 검찰, 법원이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서로의 경계를 존중해야 한다. 세 기둥이 한데 모여있거나, 서로 기댄 구조이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 더해 세 기관이 제대로 작동하는 데 꼭 필요한 윤리가 있다. 아젠다가 없어야 한다. 우리말로 풀면, 가슴의 응어리와 머리의 선입견이 합쳐 만들어내는 기울기가 있으면 안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원리와 윤리 시스템은 사법제도만 필요한 게 아니다. 국가 기능, 특히 안보를 위한 군사 행동 결정 과정에도 작동해야 한다. 미국은 정보수집 자산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인·기·성(人·機·星)'이다. 정보를 사람, 기기, 위성을 통해 수집한다. 국방부 등 국가 기관으로 보내진 정보는 전문가들이 분석해야 한다. 월급날을 기다리며 시키는 일에 충실한 '영혼 없는' 테크노크라트의 일이라야 한다. 이 과정에 편견과 이념이 들어가면 개를 늑대로 분류하고, 고양이를 삵으로 보고할 수 있다. 거꾸로 징그러운 쥐도 귀여운 다람쥐로 볼 수 있다.

정보의 경중 분석 단계를 거치면 반응을 정해야 한다. 여기는 정치, 외교, 군사의 영역이다. 국가의 이념, 비전, 손익계산에 의해 행동이 결정돼야 한다. 군 통수권을 갖고 있는 행정부는 취할 행동의 경중을 따져 의회와 협력한다. 주권 국가와의 전쟁은 물론 의회가 선포해야 한다. 충돌 수준이면, 의회에 알려 이해와 지지를 구한다. 군사 행동의 선택과 결정은 행정부가 하지만, 여기 들어가는 예산은 의회가 정하기 때문이다. 1975년 4월 남베트남의 사이공 함락이 눈앞에 보이자,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군사원조 7억 2000만 달러, 경제원조 2억 5000만 달러를 남베트남을 위해 인준해 줄 것을 의회에 요청했다. 원조 액수와 관련해 조정안과 개정안이 상정됐지만, 결국 하원은 포드 정부의 원조안을 부결시켰다. 남베트남은 사라졌다.

 

미국이 베트남의 수렁에 빠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통킹만 결의안. 아래 린든 B. 존슨의 서명이 보인다. 내용이 짧아 오히려 파급효과가 컸다. 
미국이 베트남의 수렁에 빠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통킹만 결의안. 아래 린든 B. 존슨의 서명이 보인다. 내용이 짧아 오히려 파급효과가 컸다. 

1964년 8월 초 발생한 통킹만 사건은 이 시스템의 붕괴를 상징한다. 증거가 불충분했지만 행정부 관계 부서, 백악관, 의회가 제 일을 하지 못했다. "맙소사, 그 멍청한 바보 수병들이 그저 날치를 쏘고 있었을 뿐이야. (Hell, those dumb stupid sailors were just shooting at flying fish.)" 존슨이 통킹만 사건을 접하고 보인 반응이다. 나중에 그는 '날치'를 '고래'로 바꿔서 비슷한 말을 했다. 하지만 냉전 이데올로기가 이 과정을 몰고 갔다. 존슨은 밀고 당기는 거래에 능한 텍사스 출신 정치인으로 시작해 상원 최고의 입법 기술자로 인정받았지만, 외교, 군사 영역에는 경험이 없었다. 관심도 많지 않았다. 한 예로 프랑스가 떠나고 독립한 라오스에서 내전의 조짐이 보이자, 존슨은 라오스를 처진 항문으로 직역할 수 있는 '로우 애스 (low-ass)'라고 발음하는 계산된 저속함을 과시했다. 관심이 없다는 메시지였다.

존슨에 비하면 케네디는 일찍부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에 관심이 많았다. 1951년 10월 매사추세츠 출신 연방 하원의원 케네디는 사이공을 찾았고, 현지 미국 특파원들과 만나 민족해방투쟁에 관해 토론했다. 전쟁 중인 한국에도 잠시 들렀던 그는 귀국 보고서에서 미국의 인도차이나 정책이 더욱 성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4세의 케네디는 아시아 등지에서 식민지배를 받는 민족이 안고 있는 문제는 빈곤, 질병, 부당함과 불평등이라 했다. 미국이 이런 문제들이 심각한 인도차이나에서 어떻게 해서든 제국주의를 이어가려는 프랑스의 편에 서 있는 현 정국을 우려했다. 

존슨은 케네디 시절 그가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국무회의에 무심코 앉아 있으면서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맥나마라 국방장관이다. 존슨은 그의 상황 분석, 판단 능력을 그때부터 인정했고 나중에는 의지했다. 이 절대 신뢰가 화근이었다. 흔한 말로 맥나마라의 적은 맥나마라였다.

 

1961년 4월 7일 시사주간지 TIME 표지에 로버트 맥나마라 신임 국방부장관이 등장했다. 표지가 그의 사고 능력과 냉전 사고를 묘사한다. 1964년 8월, 맥나마라는 통킹만 사태의 진실을 은폐 축소했고, 존슨은 서둘러 보복에 나섰다. 전쟁은 확전될 수밖에 없었다. (Cover Credit: BORIS CHALIAPIN)
1961년 4월 7일 시사주간지 TIME 표지에 로버트 맥나마라 신임 국방부장관이 등장했다. 표지가 그의 사고 능력과 냉전 사고를 묘사한다. 1964년 8월, 맥나마라는 통킹만 사태의 진실을 은폐 축소했고, 존슨은 서둘러 보복에 나섰다. 전쟁은 확전될 수밖에 없었다. (Cover Credit: BORIS CHALIAPIN)

한 의회 보좌관은 통킹만 사건 상원 청문회에 나온 이 맥나마라를 '10톤짜리 탱크 (a 10-ton tank)'라고 표현했다. 앞의 장애물을 의식하지 않고 포를 쏘며 돌진하는 전차와 같았던 맥나마라는 정보, 지식, 언변으로 상대를 압도했다. 문제는 탱크가 후진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맥나마라의 자기 확신은 그를 뒷걸음질 모르는 인물로 만든 것이 사실이다. 

이런 맥나마라 앞에서 상원 청문회는 진상 파악보다는 존슨 행정부의 설명을 경청하는 자리로 변했다. 베트남의 어뢰 공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미 구축함이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질문에 대한 맥나마라의 답은 교묘한 위증으로 꼭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지식과 정보, 경험에 기초해 최상의 해결책을 내놓아야 할 대통령의 정책 브레인이 흔한 말로 잔머리를 굴리고 말장난에 가까운 불분명한 언어를 사용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으로 1954년부터 2003년까지 상원의원을 지낸 스트롬 서먼드(Strom Thurmond)가 맥나마라에게 물었다. "남베트남의 군사 지도자 응우옌칸이 북베트남과의 분계선인 북위 17도선을 넘어 북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있는가? 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일종의 약속대련 같은 질문에 대한 맥나마라의 답변이다.

"응우옌칸 대통령에 대해 말하자면, 올해 3월과 5월에 테일러 장군과 함께 그를 만나 남베트남의 대북 군사 행동에 대한 견해를 구체적으로 물었다. 당시 그는 그런 행동을 취하는 것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베트콩과의 전쟁은 남베트남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래 어느 시점에 북베트남의 행동에 따라 북베트남에서의 행동으로 그 행동을 보완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지만, 당시의 상황은 그러한 행동을 정당화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그의 공식 발언을 보면 대북 행동에 대해 더욱 고민해 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와 나눈 대화에 대한 보고를 통해 그가 남베트콩과의 전투에 자원을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딘 러스크 국무부 장관도 도왔다. 지금은 미국의 주도로 전쟁을 확대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북베트남에 대한 군사 작전은 충격이 따르는 행동이므로, 남베트남의 시골 지역과 주요 도시의 안보를 먼저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답이 정직하지 못하고 혼란스럽다. 북베트남에 대한 전면적 공격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지만, 비밀 침투 작전의 파괴, 심리, 테러전은 현재 진행이었다. 소위 공해상에서의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적 미 함정의 군사 행위는 베트남의 특수전을 돕는 일이었지만, 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맥나마라는 불행의 씨앗 통킹만 결의안도 합리화했다. 의회가 행정부에 백지수표를 내주지 않고 대신 베트남 전쟁을 공론화해 토론하고, 선전포고를 의결하려 들었다면, 미국 사회는 극도로 분열했을 것이라 했다. 냉전 시대의 상황을 고려할 때 강력한 반공 전선을 주장하는 우파가 기득권을 잡고, 국론을 끌고 갔을 것이란 말이다. 강경론자의 압력을 받아 존슨 정부는 베트남에서 속전속결과 완전 승리를 위해 핵무기 사용을 고려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한통속인 북베트남, 중국, 소련을 무릎 꿇게 하는 방편으로 초강력 대응을 요구하는 강경론자들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는 합리화다.

The President was determined to avoid it, I was determined to avoid it. He was fearful public debate would lead to greater pressure for that, and that's one of the reasons - not the only reason, but one of the reasons - he avoided public debate.

나라가 극우 보수 냉전주의자들에게 휘둘리지 않게 하려고 정부가(대통령이) 알아서 독자적으로 군사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말이다. 그래서 존슨은 자신 있게 베트남 주둔 미군 수를 50만 명으로 늘렸고, 리처드 닉슨은 비밀리에 중립국 캄보디아를 침공할 수 있었다. 국가 정책과 민의가 유리된 결과였다. 맥나마라는 자신이 결정적 역할을 한 베트남 불행에 대한 합리화에 매달리다 2009년 93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직무 유기 (dereliction of duty)'란 비난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무한도 신용카드를 손에 넣은 존슨은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의 설득력 있는 표현대로 '힘의 교만'에 빠져들어 갔다. 머지않아 그는 베트남에 전투 부대를 파병하면서, 호찌민에게 전쟁으로 인한 죽음의 길을 버리고 미국의 경제 원조에 의존해 살길을 찾으라며 양자택일을 요구한다. 존슨 정부가 들어선 ‘힘의 교만’ 그 길은 미국을 수렁으로 인도했다. 미군 5만 8000 명이 거기서 살아 나오지 못했다.

근거가 충분한 북베트남의 군사 행동이 자유세계에 대한 도전으로 포장되었으니, 이에 맞는 격상된 전략의 변화가 있어야 했다. 어뢰정 기지와 연료 보관 시설에 대한 공격으로 일단 본때는 보였지만, 하노이를 향한 강한 메시지가 필요했다. 통킹만 사건으로 미국은 민족해방전선의 탈 제국주의 투쟁성에서 더 멀리 눈을 돌렸다. 게릴라들을 등 뒤에서 조종하는 공산 세력 중심부, 즉 지휘 본부의 전략적 사고를 무력화해야 했다. 미국의 답은 국제 연합전선이다.

자유세계의 주요 구성원을 정렬시켜야 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전법을 따른다. 강력한 방패와 긴 창으로 무장한 자유 수호의 병사들이 팔랑크스(phalanx), 즉 견고한 대형을 이루고 전진하면 된다. 조건이 있다. 상대를 압도할 수 있어야 했다. ‘국기 더하기 캠페인 (More Flags Campaign)’이라 불린다. 여러 나라의 국기를 베트남에 꽂는 전략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캠페인은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남베트남에서 태극기가 성조기 옆에서 휘날리게 된다.

더 많은 국기 모으기는 통킹만 사건 3, 4개월 전에 이미 구상됐다. 이 충돌로 조급해졌을 뿐이다. 1964년 5월 맥나마라가 그해 두 번째 방문한 남베트남은 여전히 같은 문제로 씨름하고 있었다. 제일 큰 문제는 정부 기능이었다.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무정부는 정부가 없는 상태다. 1964년 남베트남은 무정부가 아니라 부(不)정부 상태였다. 정부는 있었다. 전시 정부이니 미국의 지원을 받아 물자와 달러가 풍부했고, 조직도 방대했지만, 정부 노릇을 하지 못했다. 남베트남 방문 당시 맥나마라가 보고 받은 현지 상황은 불안했다. 

“중앙 정부의 행정 체계는 원활하게 기능하지 못한다. 남베트남의 가장 큰 심리적 약점은 ‘각자도생’ 하려는 태도다. 응우옌칸은 권한을 자신에게 집중시킴으로써 정부 운영의 효율성을 저해했다.” 

"Administrative mechanism of government has not [been] and is not functioning smoothly. Greatest psychological weakness in SVN is attitude of 'every man for himself'. Khanh centralizes authority in himself to detriment of efficiency of government operation."

지방 단위에서는 행정력이 나아지는 조짐이 있지만 여전히 약했다. 불교와 가톨릭교도 사이의 갈등도 깊어지고 있었다. 국민을 다스리지도, 적과 제대로 싸움도 못 하는 군부독재, 게릴라를 무서워하는 지방 정부의 무능, 극단적 종교 대립. 여기에 더해진 쿠데타 가능성. 극적인 반전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통킹만 사건 발생 직 후 베트남의 통치자 응우옌칸 (Nguyen Khanh)이 시사 주간지 TIME의 1964년 8월 7일 자 표지에 등장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그의 무능력은 결국 미국을 베트남전쟁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한다.  (Cover Credit: BORIS CHALIAPIN)
통킹만 사건 발생 직 후 베트남의 통치자 응우옌칸 (Nguyen Khanh)이 시사 주간지 TIME의 1964년 8월 7일 자 표지에 등장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그의 무능력은 결국 미국을 베트남전쟁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한다.  (Cover Credit: BORIS CHALIAPIN)

5월 13일, 사이공을 떠나기 전 맥나마라는 응우옌 칸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북베트남에 대한 군사 행동의 가능성이 거론됐다. 응우옌칸은 남베트남의 민족해방투쟁 세력은 적의 팔과 다리일 뿐이라 했다. 머리는 하노이며, 진짜 머리는 아마 더 북쪽 (and maybe further North)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 머리통을 제거하려면 머리통을 부술 필요가 있다고 했다. (“to destroy it properly and quickly, a blow at the head was needed.”) 미국을 자극해 확전을 꾀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북베트남을 어떤 방식으로 공격할 수 있냐는 맥스웰 테일러 장군에게 응우옌칸은 육지가 아닌 공중과 바다가 좋다며 “일부 소규모 침투 작전이 시도, 또는 진행 중 (some small-scale infiltration operations had been tried or were in progress)”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칸은 소규모 침투 작전은 효과가 크지 않다며 더 큰 규모의 작전을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어느 정도 북베트남을 직접 공격하는 전략에 따른 리스크를 떠안을 수 있나 알고 싶어 했다. “문제는 남베트남의 군사 행동에 대한 반응으로 북베트남이 강력한 공격을 가할 경우, 남베트남이 계속해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The problem was to be certain that the GVN would continue to enjoy full American support in connection with a strong attack by the North in reaction to what the GVN had done.)"

응우옌 칸은 북베트남을 공격함으로써 얻을 비군사적 이득이 있다고 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동안 북베트남에 맹폭을 가하면서 제시한 합리화 논리와 일치한다. “남베트남의 기반이 아직 만족스럽게 튼튼하지 않다는 약점이 시정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그 약점이) 북베트남을 공격해야 할 이유가 될 수 있다”라고 했다. 그의 결론은 “남쪽의 약점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북쪽을 공격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 (the best cure for weakness in the South would be an attack on the North)"이었다.

재론하지만 존슨과 맥나마라는 남베트남의 대북 군사 행위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를 지원하는 미 구축함들은 공해상에서 늘 하는 평상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라며 진실을 감추었다. 듣는 이를 오도하는 해명을 미 의회, 또 미국민에게 했다. 그는 또 미국에 도발한 북베트남을 때려야 미국을 믿고 싸우는 남베트남이 강해진다는 논리를 폈다. 현실은 거꾸로 진행됐다. 미국이 북베트남을 폭격하니 남베트남은 미국에 더 의지하고, 동시에 북베트남은 더 강해졌다.

 

동남아조약기구 (SEATO: 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는 1954년 제네바 조약에 의해 베트남이 북과 남으로 갈리면서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설됐다. SEATO는 실제적 군사동맹이 아닌,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국가들의 느슨한 연합체로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사진은 1954년 제네바 회담 장면 (Public Domain)
동남아조약기구 (SEATO: 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는 1954년 제네바 조약에 의해 베트남이 북과 남으로 갈리면서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설됐다. SEATO는 실제적 군사동맹이 아닌,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국가들의 느슨한 연합체로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사진은 1954년 제네바 회담 장면 (Public Domain)

통킹만 사건으로 사태는 악화되고 미국은 전략의 획기적 변화가 필요했다. 동남아시아조약기구 (SEATO: 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에 희망을 걸었다. SEATO는 군사 동맹이 아니다. 1954년 9월 급조된 협력체이다. 그해 제네바 합의에 따라 베트남이 남북으로 갈리자, 미국은 인도차이나를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지킬 목적으로 서둘러 반공 연합체를 탄생시켰다.

소련으로부터 유럽을 지키려 만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의 이름을 땄지만, 처음부터 이름값을 할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호찌민이 위협적이었지만, 스탈린(1953년 사망)은 아니었다. NATO는 실전 투입이 가능한 군대로 말했지만, SEATO는 구속력 없는 다짐으로 말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파키스탄이 회원국이었다. 베트남은 회원국은 아니지만 SEATO 조약이 적용되는 지역으로 인정했다.

SEATO는 탄생 이후 상징으로 남아있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국 군대가 남베트남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응오딘지엠 때문이었다. 1963년 말 그가 암살당하고, 다음 해 베트남은 혼란 속에 빠졌다. 8월 급기야 통킹만 사건으로 전쟁은 확전됐고, 미국의 개입이 더 깊어지면서 SEATO의 실제적 역할이 논의됐다. 

1964년 4월 미국의 요청으로 SEATO 회의가 마닐라에서 열렸다. 회원국들은 남베트남 정부를 붕괴시키려는 공산 세력이 동남아 전체를 위협한다는 데 동의했다. 따라서 군사원조의 필요성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회원국 또는 지역의 보호 대상 국가가 외부의 도발과 침략을 당해도 꼭 도와야 할 의무는 없었다. 도움도 각국의 헌법 절차를 밟아서 제공한다. 아무리 서로 돕고 싶어도 그 나라 의회가 동의하지 않으면 빈손을 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남베트남의 공산 게릴라와 이를 지원하는 북베트남이 자국을 위협하고 있다고 느끼는 나라는 남베트남 말고는 없었다.

 

베트남전쟁의 상황이 악화되면서 존슨은 남베트남에 더 많은 국기가 휘날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존슨은 한국 전쟁에서처럼 우방들의 연합전선을 기대했지만, 그의 'More Flags' 캠페인 결과는 미미했다. 사진은 서울의 전쟁기념관. 한국을 도운 나라들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위키백과)
베트남전쟁의 상황이 악화되면서 존슨은 남베트남에 더 많은 국기가 휘날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존슨은 한국 전쟁에서처럼 우방들의 연합전선을 기대했지만, 그의 'More Flags' 캠페인 결과는 미미했다. 사진은 서울의 전쟁기념관. 한국을 도운 나라들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위키백과)

1964년 8월 말 예상대로 실망스러운 보고서가 국무부에 전달됐다. '국기 더하기(More Flags)' 캠페인에 나섰던 미국의 해외 공관들의 보고에 따르면 SEATO는 베트남에서 미국을 도울 의사가 강하지 않았다. 미국과 함께하려는 열정의 증거는 약했다("little evidence of enthusiasm")고 했다.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내미는 ("token") 수준의 도움을 주겠다는 반응이 많았다. 존슨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나는 베트남에서 자유세계가 책임 부담을 나눠지자는 우리의 요청에 대하여 [미국의] 친구와 동맹국들이 취한 행동이 부적절한 데 대해 크게 실망했다." ("I am gravely disappointed by the inadequacy of the actions by our [American] friends and allies in response to our request that they share the burden of Free World responsibility in Viet Nam.")

존슨은 베트남 전쟁이 자유세계 전체를 위함이라 믿었다. 따라서 미국만의 짐이 아니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유일한 자유의 옹호자가 되기 위해 무기한으로 혼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말고 계속 싸워야 한다'는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SEATO 회원국들의 반응은 셋으로 갈렸다. 첫째,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베트남 정책에 이견을 제시했다. 둘째, 호주와 뉴질랜드, 태국은 도울 의사가 있었지만, 군사 자산 등 도울 능력이 없었다. 셋째, 필리핀은 미국의 눈을 찌푸리게 했다. 도움을 원한다면 반대급부를 내놓으라 했다. 인도양 저 멀리 파키스탄은 논외였다.

베트남을 식민 통치했던 프랑스는 아예 베트남의 중립화를 주장했다. 20년간 미국이 유지해 온 베트남 정책의 뿌리를 흔드는 주장이었다. 베트남에서 호찌민의 독립 투쟁을 무찌르려 미국이 1945년에서 1954년까지 프랑스에 제공한 군사 원조가 26억 달러였다.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가 패한 1954년 미국은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의 군사비용의 80%를 감당했다.

미국을 포함해서 다른 나라들이 간섭하지 않도록 베트남을 중립화하자는 제안은 존슨에게 모독이고 배은망덕이었다. 1968년 남베트남에 50만 명의 미군이 주둔할 때 SEATO 군대는 모두 1만 5000명이었다. 답답한 한 상원의원이 참지 못하고 외쳤다. “(만약 SEATO가) 공산주의를 막는다고? (주방 도구) 체가 물을 막고, 유리창이 빛을 막는다지. (If SEATO bar(s) communism, then a sieve bars water and (a) plate-glass window bars light.)”

SEATO 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잔혹할 정도다. 미국의 전략에 자산이 아니라 '그림자 (shadow)', 또는 중요성 없이 태어난 상관없는 존재란 평도 있다. 전후 '동맹 광증 (pactomania)'에 걸린 미국이 체면을 살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 ("face-saving monument")란 혹평도 있다.

1964년 5월 존슨은 베트남전쟁에서 연합 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미국의 해외 공관장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 딘 러스크 국무부 장관이 흥미로운 지시를 내렸다. “정치적인 이유 (political reasons)”라며 남베트남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은 전투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efforts other than those of an expressly combat type assistance)는 지침이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도움의 배가 고팠다. 하지만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한국이란 음식은 피하려 했다. 음식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음식이 설익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판단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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