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참전 60돌]⑧ 한일관계 개선 공방전

미국, 민족주의가 한국의 발목 잡는다고 주장

경제원조 미끼로 "한·일은 공동 운명체" 강조

미국 가까이 하려 베트남을 기회삼은 박정희

공산화 확산 억제 명분으로 5.16쿠데타 용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냉전을 위해 한국과 일본이 과거를 잊고 협력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전략 사고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사진은 2023년 8월 18일(현지시간),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만난 한미일 정상들. 왼쪽부터 윤석열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2024.12.14. 연합뉴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냉전을 위해 한국과 일본이 과거를 잊고 협력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전략 사고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사진은 2023년 8월 18일(현지시간),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만난 한미일 정상들. 왼쪽부터 윤석열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2024.12.14. 연합뉴스

“성질 좀 죽여라!” “성격이 팔자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미국은 한국을 향해 더 큰 소리로 외쳤다. 과거에 매달리는 성격을 바꾸어야 앞길이 순탄할 것이라 했다. 미국은 한국의 미래를 발목잡는 성품으로 민족주의를 탓했다. 대한민국의 성질이 어때서? 민족주의가 왜 잘못인가?

박정희는 베트남을 기회이자 돌파구로 보았다. 미국은 그의 쿠데타를 서둘러 묵인했지만, 한국의 체질을 바꾸는 기회로 삼으려 했다. 미국은 5.16 정권을 두 손으로 조일 수 있었다. 한 손은 민정 회복 압력, 다른 손은 군사, 경제 원조 삭감 가능성이었다. 쿠데타 세력은 공약했다. “절망과 기아 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민족의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미국의 지속적인 원조 없이는 지키기 어려운 약조였다.

미국 정치에 불문율로 여겨지는 격언이 있다. "낭심(囊心)을 붙잡으면, 마음과 생각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If you've got them by the balls, their hearts and minds will follow).” 힘의 외교를 상징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 박정희는 베트남 사태가 남베트남의 힘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알았다. 언젠가는 미국이 개입해야 한다고 믿었다. 미국이 그를 향해 군대 복귀와 원조 삭감의 노래를 부를 때 베트남 참전은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카드였다. 미국의 노래를 멈추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에 이 카드를 사용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선연일, 후조미(先聯日, 後助美). 먼저 일본과 연합하고, 그 후에 미국을 도울 생각을 하라고 했다. 박정희는 미국의 바람대로 관계 정상화를 위해 한일 회담을 적극 추진하다 결국 반대 시위에 부딪쳐 1964년 6월 계엄령을 선포해야 했다. 미국의 한일 관계 정상화 집착에는 이유가 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한 사람이 있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지만, 삶의 환경이 불안하다. 그래도 그의 이용 가치를 인지한 한 친구가 보내주는 양식으로 연명한다.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든 주인공은 바로 옆집이다.

때리고, 빼앗고, 노리게 삼고, 스스로 사람답게 살아갈 가능성을 짓밟았다. 그 집에서 쓰는 말을 막고, 이름을 바꾸도록 강요했다. 할아버지 때 시작된 학대는 손자 세대까지 이어졌다. 처세술과 기회 포착에 능한 옆집 주인은 한 때 망한 것 같았지만, 다시 일어나 곡간을 채웠다. 물건을 편하게, 작게, 예쁘게, 싸게 만들어 파는 재주는 인정 받았다. 운이 따랐다. 옆집 주인은 이웃들의 불행에서 장삿속을 챙겼다. 불에 탄 집을 복구하는 데 그 집 물건이 많이 쓰였다.

힘들게 살아가는 이 사람에게 제3자를 통해 제안이 들어왔다. 전혀 괴롭지는 않지만, 때로 비난을 불러오는 과거사를 묻어버리고, 동네방네 학대의 피해자라 떠들고 다니지 않으면 조그만 노점상이라도 차릴 자본은 주겠다고 했다. 장사 기술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이 제안을 들고 온 사람은 다름 아닌 허기진 이의 친구였다.

성질을 죽여 굽히고 들어가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자신은 더 이상 쌀가마니를 보내줄 능력이 안 된다고 덧붙였다. 여기서 가난하지만 자존심 센 이는 한국, 과거사와 노점상을 바꿀 뜻이 있다는 이웃은 일본. 성질 죽이라고 간청한 친구는 미국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고전적인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초했다. 세 개의 요소를 가졌다. 첫째, 모든 국제 분쟁을 자유(freedom)와 억압(oppression)의 대결 구도 속에 넣었다. 둘째, 이 결전의 주체는 중국과 소련이다. 전후 폭발한 식민 역사 종식을 위한 민족 해방 투쟁은 지역화된 (localized) 글로벌 위협(global threat)일 따름이다. 호찌민, 피델 카스트로, 심지어 넬슨 만델라도 피부색만 다를 뿐 한통속이다. 셋째 이 대결 구도는 완전한 격리, 억제, 무력화(containment)로 대응해야 한다. 만리장성과 같은 방어벽을 쌓아야 한다. 만리장성의 매력은 계속 이어짐과 구조가 한결같음에 있다. 한곳에 공백이 생기거나 구멍이 뚫리면 냉전 방어벽은 무너진다.

 

1961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케네디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그에게 한일 관계 정상화를 촉구했다.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해 무거운 짐을 진 미국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박정희의 선물을 들고 있는 재키 케네디(오른쪽), 케네디(중앙)와 ,박정희(왼쪽) (JFK Library)
1961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케네디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그에게 한일 관계 정상화를 촉구했다.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해 무거운 짐을 진 미국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박정희의 선물을 들고 있는 재키 케네디(오른쪽), 케네디(중앙)와 ,박정희(왼쪽) (JFK Library)

케네디는 한일 관계 정상화의 지정학, 전략, 경제적 가치를 확신했다. 자신의 자유주의 나라 만들기 공식에 어긋났지만, 케네디는 5.16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서둘러 정리했다. 칼 든 자의 손아귀에서 칼을 뺏으려면, 내가 베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차라리 그 칼로, 내가 싫어하는 자와 싸우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조심스러웠지만 케네디가 쿠데타 세력을 수용한 이유다.

1961년 11월 14일 박정희와 케네디의 대화록을 보면 조급하다는 인상을 받을 만큼 앞에 한일 관계 정상화가 나온다. 회담 전 오찬에서 두 사람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주제로 상당히 자세하게 논의했다"고 언급했다. 구체적인 대화를 했다는 표현은 미국의 입장을 강하게 전달했고, 한국은 그 입장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뜻이다. 둘이 뜻을 같이한 것이다.

베트남 사태의 위험성과 해결 방안으로 아이젠하워와 케네디가 도미노 이론을 제시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정확한 역사 이해는 아니다. 오리지널 도미노 이론은 한국 전쟁에 대한 트루먼의 해석이었다. 6월 25일 한국전 발발 소식을 접한 트루먼이 정책 보좌관들에게 한 말이 있다. "우리가 한국을 포기하면 소련은 계속해서 전진하여 하나하나씩 집어삼킬 것이다. (If we let Korea down, the Soviet[s] will keep right on going and swallow up one [place] after another.)” 미국에게 소비에트의 호구(虎口)는 한반도, 다음으로 일본 열도를 향해 벌어질 것이 당연했다. 

케네디도 한국에 대해 비슷한 말을 했다. 한국과 일본은 공동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한국에 자유가 없다면(공산화된다면), 일본도 자유가 없고, 이는 전 태평양 지역이 공산 세력에 무너짐을 뜻한다고 했다. 그러니 한국이 미국에 중요한 존재였다. ("if Korea were not free, Japan would not be free and that would mean the whole Pacific area would go too, so Korea had a vital interest for us.") 미국은 전략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하나로 보았고, 이를 통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강해진다고 믿었다. 공산 세력의 남진 야욕에 대항하는데 한국의 민족 감정은 냉전의 결사 항쟁 의지의 강도를 약화시킨다고 보았다. 냉전은 '우리는 하나다'가 기본 정신 아닌가? 더욱이 반일 정서는 남한, 북한, 중국이 공유하고 있었다

5.16쿠데타 발생 한 달 후 케네디가 소집한 안보 회의는 반일 정서를 극복해야 한국에 살길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 발전의 가장 큰 방해 요인은 일본과 한국 사이의 지속적인 적대감과 상호 이익이 되는 관계를 재건하지 못한 것이다." ("the greatest hindrance to Korean development was the continued animosity between Japan and South Korea and the failure to re-establish relations which would prove mutually beneficial.") '재건'이란 표현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느껴진다. 근대사에서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나?

1964년 SEATO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베트남 원조국 국기 모으기는 실패였다. 그것 보라며 공산 세력이 이 사실을 프로파간다 소재로 사용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미국은 한국이 베트남에 깊이 관여하지 못하게 했다. 북한과 중국을 자극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워싱턴은 한일 관계 정상화에 올인했다.

박정희가 케네디에게 한 발언에서두 나라가 공유하는 한일 관계 정상화의 전략적 가치가 드러난다.

“(나는) 미국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깨달았고, 자유세계의 각 국가가 자신의 노력으로 (미국의) 이 짐을 줄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유세계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한일 합의를 그토록 강조한 이유이다.”

“(I) realized the heavy burden the U.S. was bearing and he felt that each nation of the Free World must do its best to decrease this burden by its own efforts, thereby increasing the strength of the Free World. This was the reason why (I) laid such stress on the ROK-Japan settlement.”

한일 관계 정상화를 통해 미국이 짐을 줄여야 자유세계가 더 강해진다는 박정희의 발언은 케네디의 의중과 싱크로율 100퍼센트다.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전략을 내면화 했다. 일본 식민 통치가 끝난 지 고작 16년. 한국민이 가질수 밖에 없는 반일 정서를 미국, 나아가 자유세계의 이익을 위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냉전의 승리를 위해 한국은 그 성질 좀 버리라는 조언을 박정희는 그대로 따랐다.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딘 러스크. 한일 협력 관계를 미국의 아시아 정책의 중심에 놓았다. 우호적 관계에 있는 한국과 일본이 관계 개선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Agree, Agree, Agree”를 외쳤다. (Public Domain)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딘 러스크. 한일 협력 관계를 미국의 아시아 정책의 중심에 놓았다. 우호적 관계에 있는 한국과 일본이 관계 개선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Agree, Agree, Agree”를 외쳤다. (Public Domain)

박정희 군사 정부 아래서 한일회담은 진전이 빨랐다. 1962년 가을 김종필-오히라 마사요시 회담은 가장 민감한 청구권을 매듭지었다. 36년 식민 피해에 대한 보상을 6억 달러(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외에 수출입은행 차관 1억 달러)로 합의했다. 가벼운 표현으로 한국은 성질을 죽이고, 일본은 미국의 조언에 따라 지갑을 좀 더 연 결과이다.

미국이 기뻐했다. 국무장관 딘 러스크의 조언이 적중했다. 김-오히라 메모를 도출하는 제2차 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향하는 김종필에게 그는 한국과 일본은 우호적인 관계라며 한 단어를 세 번 반복해 미국의 의중을 전했다. “합의, 합의, 합의 (Agree, Agree, Agree)” 였다. 이 만남에서 김종필은 그 유명한 '갈매기들이 똥 싸는 곳' 독도를 폭파해 버리자는 제안을 일본에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민족 정서의 관점에서 상상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1963년 11월. 한국의 김종필(왼쪽)과 일본의 마사요시 오히라(오른쪽)가 한일 청구권 액수에 합의했다. 일제 강점의 피해 보상은 무상, 유상, 그리로 민간 차관을 합쳐 총 6억 달러로 정해졌다.
1963년 11월. 한국의 김종필(왼쪽)과 일본의 마사요시 오히라(오른쪽)가 한일 청구권 액수에 합의했다. 일제 강점의 피해 보상은 무상, 유상, 그리로 민간 차관을 합쳐 총 6억 달러로 정해졌다.

1963년 한일 회담은 순항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전년에 청구권에 대한 기본 합의가 이루어졌고, 7월에는 또 하나 민감 사안인 어업 문제의 빠른 해결에 양국은 합의했다. 박정희는 1964년 한일 협정 체결을 목표로 잡았다. 미국도 그해 한일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며 모든 노력을 기울여 두 나라를 부추긴다 (It goes without saying that every effort should be made to encourage Korea and Japan to achieve a settlement this year)는 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제동이 걸렸다. 그해 봄 한일 회담 반대운동이 격렬해졌다. 미국이 두려워 한 '반민족 굴욕외교'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6월 3일 계엄이 선포됐다.

여기서 자세히 분석해야 하는 문서가 있다. 백악관 고위 관리 중 한국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었던 독설가 로버트 코모(Robert Komer) 안보 보좌관실 참모가 적성한 메모다. 이 시기 미국이 한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나 알 수 있는 문건이다.

 

백악관 안보보좌관실 참모 로버트 코로 (왼쪽)과 존슨(오른쪽) 코모는 한국의 미래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라며 이를 위해 미국이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ublic Domain)
백악관 안보보좌관실 참모 로버트 코모 (왼쪽)와 존슨. 코모는 한국의 미래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라며 이를 위해 미국이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ublic Domain)

코모는 한일 회담 반대 시위를 역사의 경험에서 비롯된 뿌리 깊은 민족 정서의 표현으로 보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정치적 행동 또는 매년 봄철에 나타나는 학생들의 시위 문화로 보았다. (Students are normally feisty this time each year..) 야권의 선동에 넘어간 철부지들의 일탈이란 생각도 있었다. 일본이 서서히 보상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해 가고 있는 시점에 학생들이 시위에 나선 사실을 보면서, 자유주의 나라 만들기 비전에 반하는 사고를 드러냈다.

"결론적으로, 박정희와 그의 '라스푸틴' 김종필에게 더 민주적인 태도를 촉구하는 대신, 어쩌면 이 어수선한 영토에서 더 많은 독재를 용인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국은 여전히 ​​엉망진창이다. 수십억 달러의 마중물을 쏟아부었음에도 미국의 가장 큰 실패 중 하나다.”

“All in all, instead of urging (Park) and his Rasputin, Kim Chong-pil to be more democratic, maybe we ought to tolerate a little more dictatorship in this messy fief. Korea is still a mess (one of our great failures despite billions in pump priming.)”

정당한 의사 표시인 한일 회담에 대한 반대를 혼돈과 혼란의 원인, 또 미국의 원조가 낭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보았다. 독재자의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이를 누르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김종필을 박정희의 라스푸틴이라고까지 혹평했지만, 정보 정치와 인권 사각지대를 상징했던 중앙정보부를 창설했던 '현란한 재주꾼'의 필요성마저 대두됐다. 그런 비민주적 인물이 필요한 때라는 제안은 자유주의 나라 만들기의 포기로 읽힌다. 미국의 한일 관계 정상화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그리고리 라스푸틴은 본래 떠돌이 수도자였다. 그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가족과 내밀한 관계를 맺고 신비한 능력을 자랑하며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렀다. 암살로 생을 마감한 그는 제정 러시아가 망하는 데 일조한 인물로 평가된다.)

코모가 존슨에게 직접 상황분석을 올렸다. 한국에 대한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분노와 한탄이 느껴진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한국에 66억 달러 이상의 원조(경제 38억 달러, 군사 28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이런 도움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여전히 '미국의 불안정한 의붓자식'이라고 했다. (“We [Americans] have poured into South Korea more than $6.6 billion in aid [underline in original] ($3.8 billion economic, $2.8 billion military) since World War II. Despite all our aid, this nation is still an unstable U.S. stepchild.)" 아무리 베트남이 급해도 정신 불안한 아이에게 군사적 도움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로널드 레이건은1983년 러시아(옛 소련)를 악의 제국으로 규정했다. 수년 뒤 소련이 붕괴하는데 기여한 ‘전투적 구호(battle cry)’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오리지널은 아니다. 1947년 모스크바 주재 미국 외교관 조지 케넌(George Kennan)은 미국이 소련을 지속적으로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부 세계에 대한 깊은 불안감과 불신을 갖고 있는 소련은 팽창과 압제로 자신을 지키려 하기 때문이라 했다. 자유세계를 위협하려는 의지가 확고한 소련은 변화무쌍한 전략으로 세계 곳곳에서 자유 진영을 압박할 것이라 했다. 케넌은 소련 자신도 어찌 할 수없는 DNA라고 보았다. 아시아에서 이 압박을 견디기 위해 한국과 일본이 동맹이 되어야 했다.

한국이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거부하면 미국은 한국에 대한 지원과 원조를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 조지 케넌(1904-2005). 그는 공산 세력에 대한 봉쇄 (containment) 정책의 아버지로 불린다. 1947년 사진이다. (Wikimedia Commons)
한국이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거부하면 미국은 한국에 대한 지원과 원조를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 조지 케넌(1904-2005). 그는 공산 세력에 대한 봉쇄 (containment) 정책의 아버지로 불린다. 1947년 사진이다. (Wikimedia Commons)

케넌이 화가 났다. 관계 정상화를 위한 한일 회담이 민족주의 세력의 반대에 부닥치자 기고문을 통해 한국을 비난하고 나섰다. 한국은 미국의 보호 우산을 고마워하지 않고 미국이 동북아시아에서 맡은 책임을 수행하는 데 도움을 주려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Scant appreciation for the advantage of American protection and little inclination to be helpful to the United States in the exercise of the responsibilities it has assumed in the area.") 그는 일본을 싸고돌았다. '압도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 한국이 무거운 짐(dead weigh)이 된다면 미국은 한국에 대한 지원을 재고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한국이 중요하지만 일본은 더 중요하다 (Korea is important but Japan is more important still.)가 케넌의 결론이다. 한국은 자신을 위해 일본을 경계하고 멀리하려는 체질을 바꾸라는 요구였다.

존슨도 나섰다. 박정희에게 직접 한일 관계 정상화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조만간 정상화되지 않는다면 한국의 외교적, 경제적 전망과 아시아에서 자유세계의 위치는 악화할 것”이라 했다. ("Korea's diplomatic and economic prospects and the Free World position in Asia will deteriorate unless [the Japan-Korea] normalization is soon achieved.") 자유세계 전체를 위해 성질 좀 죽이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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