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간 아기 두꺼비
빗물 통에 빠진 쥐를 발견했을 때, 이 일이 쥐 한 마리로 끝날 리 없다는 것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다른 빗물받이 집수정(集水井)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라는 추정에 나는 암담해졌다. 가랑잎이 빠질 정도의 격자에 작은 동물이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한번 빠지면 다시 올라올 수 없으니 작은 생명체에겐 저승 입구였을 것이다.
집 둘레의 집수정을 모두 들여다보기로 했다.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피할 도리는 없다. 그레이팅을 하나씩 열 때마다 온몸이 긴장된다. 어떤 장면을 마주칠지 모르는 데다, 그게 뭐든 결코 아름다운 장면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십여 개의 집수정을 차례차례 열었다. 참개구리, 메뚜기, 딱정벌레의 사체가 추가로 나왔다. 마지막 집수정을 열자, 눈앞에 두꺼비가 있었다. 죽은 지 오래되어 배가 뒤집힌 두꺼비.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거기엔 뜻밖의 생명체가 있었다. 집수정에 빠진 생명체가 아니라 집수정에서 태어난 생명체들. 물에 팅팅 불어터진 어미의 사체 옆에서 두꺼비 올챙이 수십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무덤이 산실이 되다니. 비극 속 희극 같은 장면이었다.
산으로 돌아가지 못한 어미 두꺼비
알을 낳으러 들어갔을 것이다. 어기적어기적, 풍덩! 들어갈 땐 쉬웠겠지. 고인 물에 알을 낳고 나오려 했지만 사면이 미끄러운 플라스틱 수직 벽, 아무리 애써도 탈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두꺼비는 산란기에만 물에 머물 뿐 대부분의 생애는 산에서 지낸다. 이른 봄, 웅덩이를 찾아 알을 낳은 어미 두꺼비는 다시 산으로 돌아가 흙을 파고 엎드려 봄잠을 잔다.
집수정에 빠진 어미 두꺼비는 봄잠의 달콤함을 영영 잃었다. 하늘이 보이는 창살 안에 갇혀 허우적거리며 기억 속의 산을 오르고 또 올랐을 것이다. 기진해 죽은 어미 곁에서 부화한 올챙이들은 썩은 가랑잎을 갉으며 연명했다. 때맞춰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황소개구리가 개구리를 잡아먹고, 뱀도 뱀을 먹는 경우가 있지만, 두꺼비는 동족을 먹지 않는다.
뜰채와 대야를 가져와 집수정 안의 올챙이들을 남김없이 건져냈다. 올챙이들은 쉴 새 없이 꼬리를 흔들며 활기차게 움직였다. 두꺼비 올챙이는 개구리 올챙이보다 크고 검고 오동통하다. 연못에 넣어 주니 꼬리를 흔들며 빠르게 흩어진다. 죽은 어미의 사체는 뒷산에 묻어주었다. 인간이 만든 구조물에 희생된 죄 없는 두꺼비와 쥐와 개구리와 딱정벌레에게 마음으로 사죄했다.
집수정 전수조사를 마치고 나니 숙제가 남았다. 집수정 그레이팅 뚜껑에 방충망 씌우기다. 메뚜기나 개구리나 두꺼비가 팔짝 뛰다 빠지지 않도록, 집 주변을 오가던 쥐가 발을 헛디뎌 떨어지지 않도록. 그들이 다니던 길을 막고 함정을 만든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레이팅마다 방충망을 씌워 단단하게 고정하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생존의 방편 하나쯤 가지고 산다
연못은 물뭍동물의 번식장이다. 산개구리 올챙이가 가장 먼저 알집에서 나오고, 뒤이어 도롱뇽 올챙이들이 알껍질을 뚫고 나온다. 무당개구리와 참개구리의 혼인 잔치는 4~5월경 벌어진다. 쌍쌍이 껴안은 개구리들로 연못이 복작거린다. 우리 연못엔 참개구리보다 무당개구리가 몇 배 많다. 우둘투둘한 몸에 독을 가진 무당개구리는 새나 뱀에게 기피 대상이기 때문이다. 산개구리나 도롱뇽이 낙엽이나 돌멩이 같은 보호색으로 몸을 감추는 것과는 달리, 무당개구리는 시뻘건 경계색을 드러내 포식자를 겁준다. 위기에 처한 무당개구리는 사지를 번쩍 들어 붉은 배를 보여준다. ‘이래도 먹을래?’라는 협박의 언어다. 미약한 개구리도 생존의 방편 하나쯤은 가지고 산다.
흥분한 개구리들 소리가 심상찮다. 연못을 들여다보니 무당개구리 여러 마리가 물 위에 뜬 채 공처럼 뒤엉켜 엎치락뒤치락한다. 처음엔 짝짓기 경쟁인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개구리들이 껴안은 건 뜻밖에도 두꺼비다. 통통한 암컷이라 여겼나? 짝짓기 철의 수컷 개구리는 닥치는 대로 부둥켜안는다. 산란 자극 행위로 체외수정을 하는 건데, 한번 들러붙으면 기를 쓰고 놓지 않는다. 번식에 눈이 멀어 앞뒤 없이 덤비다 보니 종 구분도 못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아니, 무당개구리가 두꺼비를 끌어안아서 어쩌자는 거냐.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난다.
공처럼 뭉친 녀석들을 괭이로 건져냈다. 놔뒀다간 두꺼비가 질식사하겠다. 수컷들의 다리 힘이 얼마나 센지, 세차게 흔들어서 간신히 털어냈다. 개구리들한테 몸이 옥죄어 있을 땐 몰랐는데, 풀어주고 보니 몸집이 자그마한 젊은 두꺼비다. 풀밭에 내려놓으니 얼빠진 표정으로 잠시 앉아 있다가 이내 뒤뚱뒤뚱 달아난다. 욕봤구나, 두껍아.
변곡점을 통과하면 송두리째 바뀐다
집수정에서 태어난 두꺼비 올챙이들은 연못의 개구리 올챙이들 틈에서 기죽지 않고 잘 자랐다. 올챙이일 땐 오동통하여 개구리 올챙이와 한눈에 구별되었는데, 점점 자라며 꼬리가 줄어들고 몸뚱이도 덩달아 작아졌다. 꼬리가 없어진 아기 두꺼비는 손톱만큼 작다.
올챙이가 성체로 변태하려면 꼬리가 죽어야 한다. 꼬리 세포들은 몸으로 흡수될 때 저항하지 않는다. 자기가 꼬리임을 고집하지 않는다. 없어질 것이 없어져야 새로운 몸이,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변태는 표면적인 변화이자 근본적인 변화다. 형태뿐 아니라 속성까지 달라진다. 물속에서 아가미로 호흡하며 풀을 먹던 올챙이가, 뭍으로 나와 허파와 살갗으로 숨 쉬며 곤충을 잡아먹는다. 몸의 대변혁이다. 변곡점을 통과할 때 존재는 송두리째 바뀐다.
내 몸의 옛 세포는 오래전에 죽었고 지금도 시시각각 죽고 있다. 세포 수명은 제각각 다르지만, 개체의 기대수명에 비하면 더없이 짧다. 세포들은 죽고 태어나고 다시 죽어 ‘나’를 자라게 하고, 나아가 늙게 한다. 종국엔 ‘나’의 형태를 무너뜨려 흩어버린 후 혼돈을 거쳐 무언가로 재구성될 것이다. 삶은 순환의 과정이어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아온다. 거기에 ‘나’는 없겠지만 ‘무엇’인가 생겨 있긴 할 것이다. 그 ‘무엇’에 인격을 부여하는 건 의미 없지만 말이다.
꼬리가 사라진 아기 두꺼비는 물 생활을 마칠 때가 되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 어미가 알을 낳은 후 산으로 가듯, 아기도 산으로 가기 위해 물을 떠난다. 아기 두꺼비는 젖은 흙과 풀 줄기를 딛고 수직의 암벽에 몸을 붙인다. 사지를 움직여 천천히, 쉬지 않고 벽을 오른다. 연못에서 꼬리를 지우고 네 발로 걸어 나온 꼬마 클라이머가 암벽을 타고 한 걸음씩 꼭대기를 향해 간다. 어미가 끝내 가지 못한 산으로, 그 몸을 빌려 태어난 아기 두꺼비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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