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물이라 불리는 것들

김혜형 작가, 농부 
김혜형 작가, 농부 

감자 캐다 보면 어마어마한 개미집을 만나곤 한다. 하얗게 쏟아지는 개미알과 함께 혼비백산한 개미들이 우왕좌왕 야단이다. 장갑 낀 손에 개미들이 삽시간에 들러붙는다. 탁탁 털어내도 몇 마리는 어깨까지 올라온다. 소매와 바짓자락 속까지 들어오면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 여기저기 따끔따끔! 벌떡 일어나 옷자락을 털며 도망간다. 평화로운 일상을 습격당했으니 개미에겐 날 물어뜯을 권리가 있다.

 

흰 알을 물고 이동하는 일개미들.
흰 알을 물고 이동하는 일개미들.

물것들과의 불편한 동거

시골에 살면 벌레들과의 동거를 피할 수 없다. 대다수 곤충과 애벌레들은 신비롭고 심지어 귀여울 때도 많지만, 모기나 진드기 같은 물것들은 꽤 괴로운 상대다. 수컷 모기는 꽃의 꿀이나 식물의 즙을 먹지만, 짝짓기한 암컷 모기는 산란에 필요한 단백질을 얻기 위해 온혈동물의 피를 빤다. 풀과 씨름하는 한여름, 내 땀냄새는 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긴팔 옷에 긴바지로 무장해도 소용없다. 모기는 내 곁을 집요하게 맴돌며 빨대 같은 주둥이로 옷을 뚫고 여기저기 침을 꽂는다. 온몸이 가려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다. 급기야 호미를 내던지고 퇴각한다.

모기보다 더 독한 게 진드기다. 진드기는 풀밭에 잠복해 있다가 사람이나 동물의 피부에 기어올라 피를 빨며 기생한다. 처음엔 깨알보다 작지만 며칠 지나면 콩알만큼 커지는데, 충분히 먹고 나면 숙주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 산란을 한다. 진드기는 우리 집 개들의 피를 좋아한다. 진드기 방지 목걸이와 기피제로 방어하지 않으면 개의 몸이 진드기 거처가 된다. 진드기는 내 피도 좋아한다. 신발을 타고 종아리를 기어오르거나 풀 매는 손을 타고 팔뚝으로 올라와 자리를 잡는데, 솜털처럼 가벼워 촉각으로 알아채기가 매우 어렵다.

 

내 어깨로 기어오르는 진드기.
내 어깨로 기어오르는 진드기.

개미가 물면 따끔하니 아프고, 모기가 물면 즉시 가렵지만, 진드기가 물면 처음엔 아무 느낌이 없다. 한번 물면 떨어지지 않고, 자각증세는 몇 시간이 지나서야 나타난다. 피부가 가려워서 들여다보면 꽃씨 같은 까만 점이 붙어 있는데, 손톱으로 긁어 떼어내면 까만 점 양옆으로 바둥대는 다리들이 보인다. 진드기를 제거해도 화살촉처럼 생긴 진드기 주둥이는 살갗에 박힌 채 남아 가려움증과 염증을 일으킨다. 후유증은 몇 주 혹은 몇 달씩 간다.

나를 물어뜯은 진드기는 소위 ‘살인 진드기’라 불리는 ‘작은소참진드기’이다. 그 무섭다는 진드기한테 해마다 십여 차례 이상 물리고도 별일 없는 걸 보면, 진드기들 가운데 SFTS(중증열성 혈소판감소 증후군) 바이러스를 보유한 개체가 많지는 않나 보다. 그렇다고 바이러스 미보유 진드기만 골라서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조심하는 게 상책이다. 요즘은 일하기 전, 신발과 옷과 장갑 등에 기피제를 성실히 뿌린다. 진드기뿐 아니라 모기 방어에도 효과를 보고 있다.

기생하는 생명체는 세상에 아주 많다. 산란을 위해 온혈동물의 피를 빠는 모기나 진드기뿐 아니라 아예 숙주의 몸속에서 번식하는 기생충, 애벌레의 몸에 알을 낳는 기생벌, 남의 둥지에 탁란하는 뻐꾸기까지… 기생은 다양한 생존방식의 하나다. 운 나쁜 숙주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야 어떠하든 말이다. 언젠가 정원에서 마주친 줄장지뱀의 겨드랑이에 통통한 진드기가 붙은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진드기가 포유류의 체온과 피부 냄새에 끌리는 줄 알았는데 파충류한테도 붙다니, 적잖이 충격이었다.

 

줄장지뱀의 양쪽 겨드랑이에 살찐 진드기가 여럿 붙어 있다.
줄장지뱀의 양쪽 겨드랑이에 살찐 진드기가 여럿 붙어 있다.

저 작은 몸 안에 뭐가 있기에

앞마당의 풀을 뽑는데 저편 흙 위에서 뭔가 꼼지락거린다. 다가가서 들여다보니 곰개미 한 마리가 제 몸의 서너 배는 됨직한 죽은 풍뎅이를 끌어당기느라 용을 쓰고 있다. 그토록 안간힘을 다해 끌어당기는데도 풍뎅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풍뎅이의 발끝에 마른 풀이 걸렸는데, 그 풀의 한쪽을 흙덩이가 누르고 있다.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이다. 한참을 애쓰던 개미가 잠시 풍뎅이를 내려놓고 주변을 왔다 갔다 한다. 이제 포기하려나?

 

개미와 죽은 풍뎅이와 마른 풀과 흙덩이.
개미와 죽은 풍뎅이와 마른 풀과 흙덩이.

제자리로 돌아온 개미가 풍뎅이 머리를 꽉 물더니 여섯 개의 다리를 힘차게 버둥거리며 다시 끌어당긴다. 개미의 발길질에 마른 흙이 이리저리 쓸려나간다. 풍뎅이는 여전히 꿈쩍도 안 한다. 개미는 시도하고 또 시도한다. 지켜보는 내 몸에도 힘이 잔뜩 들어간다. 1분이 지나고, 5분이 지나더니, 어느덧 10분을 넘긴다. 대체 저 작은 몸뚱이 안에 뭐가 있기에 저토록 집요하고 간절한 걸까. 풀 매는 것도 잊은 채 나는 열렬히 개미를 응원한다. 자기 머리 위에서 함께 끙끙대는 인간이 있다는 걸 개미는 꿈에도 모르겠지만.

잠시 후, 흙덩이에 눌려 있던 풀이 쑥 빠진다. 아, 가슴에 얹힌 체증이 가시는 것 같다. 개미가 ​뒷걸음질 치니 풍뎅이 발에 걸린 풀도 떨어져 나간다. 드디어 가뿐하다. 사력을 다한 보람이 있구나. 개미가 속도를 낸다. 굼실굼실 풀밭을 지나고 영차영차 흙 고개를 넘는다. 묵직한 먹이를 끌고 집으로 가는 개미의 몸놀림에 신명이 실려 있다. 어쩐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이다.

다른 존재의 감각과 시선

제재소에서 저렴하게 사 온 소나무 피죽으로 화단의 경계를 세우고 흙을 채운 지 3년째, 흙과 수년간 맞닿아 있던 판재 여기저기가 썩고 부서지기 시작했다. 기왕 이리된 것, 낡은 목재를 철거하고 튼튼한 돌로 화단을 쌓기로 했다. 교체 작업을 하려고 화단의 판재를 뜯어내자 거대한 개미굴의 단면이 드러나면서 수백 마리 개미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도 놀랐지만, 개미들에겐 대재앙이었을 것이다. 아파트 벽이 눈 깜작할 사이에 뜯겨 나가고, 삶터가 하루아침에 두 동강이 났으니.

 

나무 벽이 뜯겨 나간 개미집의 단면.
나무 벽이 뜯겨 나간 개미집의 단면.

일개미들이 하얀 알과 고치를 물고 허물어진 통로를 일사불란하게 빠져나간다. 대재앙으로 파괴된 집을 떠나면서 제일 먼저 챙기는 건 어린 미래 세대다. 개미굴의 안쪽에선 일개미와 병정개미가 여왕의 안전을 위해 새 통로를 개척하고 있을 것이다. 개미 집단은 화학적 신호를 서로 발신하고 수신하면서 재난 상황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조절한다. 수천 마리가 한 몸처럼 협력하여 문제 해결로 나아가는 모습이 경이롭다. 개미의 정교한 의사소통 능력은 인간의 직관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작은 생물을 ‘미물’이라며 가볍게 여기지만, 크건 작건, 흙에 살건 물에 살건, 사냥을 하건 기생을 하건, 모든 생명체는 각자의 생존 환경에 최적화하여 진화해 왔다. 인간중심주의로 만물의 가치를 재단하는 일은 우리의 오랜 습관이지만, 이제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존재의 감각과 시선을 인정할 때도 되었다.

 

물앵두 즙을 빠는 개미.
물앵두 즙을 빠는 개미.

개와 이의 죽음은 동일하다

‘미물’에 대해 쓰다 보니 <슬견설(蝨犬設)>이 생각나 서가에 꽂힌 오래된 책을 꺼낸다. 박희병 선생의 책 『한국의 생태사상』이다. <슬견설>은 고려 중기의 문인 이규보(李奎報)의 글로, 우리말로 풀어 쓰면 <이와 개에 대한 생각>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어떤 ‘객’이 말한다. “한 고약한 사내가 큰 몽둥이로 떠돌아다니는 개를 쳐 죽이는 것을 보았는데, 몹시 불쌍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개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어제 누가 화로에다 이[蝨]를 던져 태워 죽이는 것을 보았는데, 마음이 아파 이를 잡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객’이 놀라 “이는 미물 아닙니까?”라고 되묻자 ‘나’는 이렇게 답한다. “무릇 생명 있는 존재란, 사람으로부터 소·말·돼지·염소·곤충·개미·땅강아지에 이르기까지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이 같은 법입니다. 어찌 꼭 큰 생물만이 죽음을 싫어하고, 작은 생물은 그렇지 않다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개와 이의 죽음은 동일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글은 조선 후기의 탁월한 자연철학자 홍대용(洪大容)의 <의산문답(毉山問答)>이다. 실옹(實翁)이 묻는다. “인간·금수·초목 (…) 이 셋에 귀천의 등급이 있느냐?” 허자(虛子)가 답한다. “천지간 생물 중에 오직 인간이 귀합니다.” 실옹이 껄껄 웃는다. “너는 정말 인간이로구나! (…) 인간[人]의 입장에서 물(物)을 보면 인간이 귀하고 물이 천하지만, 물의 입장에서 인간을 보면 물이 귀하고 인간이 천하다. 그러나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과 물은 균등하다.”

홍대용의 인물균(人物均: 인과 물의 근원적 평등) 사상에 대해 저자가 “인간과 다른 생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윤리의 모색”이라 한 대목에서, 내 가슴이 살짝 떨린다. 내가 늘 끌렸던 지점이 거기 같아서.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개미, 뱀의 입속으로 삼켜지던 개구리, 생존과 죽음을 지켜보는 시간, 유기체인 나의 종말에 대한 자각까지… 내 마음이 흔들리는 자리가 늘 그 언저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홍대용과 이규보를 다시 읽으며 등 기댈 자리를 만난 듯 든든하다. 생명의 수단화에 대한 저항감, 고통에 대한 슬픔과 연민, 인간의 자기중심성에 대한 불편함 같은, 가슴속에서 복작이던 갖가지 감정들이 시공간 저편의 마음들과 맞닿은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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