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장지뱀과 참개구리, 그리고 우리

김혜형 작가, 농부
김혜형 작가, 농부

텃밭의 퇴비를 삽으로 뒤집다 겨울잠에서 못 깬 참개구리 한 마리를 해쳤다. 흙에서 버르적거리는 개구리를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옮겨 묻은 후 더 이상 흙을 파지 못했다. 견디기 힘든 심정으로 한참을 밭둑에 주저앉아 있었다. 내가 든 삽과 호미가 흉기가 되다니. 내 노동이 폭력이 되다니.

무고한 죽음을 부르는 내 일상의 작은 움직임들

그날의 줄장지뱀이 생각난다. 그때도 봄이었다. 벗들에게 신선한 봄나물을 보내고 싶어 참나물, 쑥, 머위, 두릅 순, 오가피 순을 부지런히 뜯다가, 바구니가 더 필요해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택배 마감 시간이 가까워져 마음이 바빴다. 바구니를 갖고 나오는데 화단 옆 보도블록 위에서 뭔가 꿈틀댄다. 다가가 보니 줄장지뱀과 기다란 벌레가 서로 뒤엉켜 요동치는 중이다. 장지뱀이 애벌레를 잡아먹는 건가? 자세히 보니 세상에, 애벌레가 아니라 꼬리다. 장지뱀의 긴 꼬리. 저만치에 짧은 토막이 하나 더 있다. 꼬리가 두 토막이 났구나.

 

꼬리가 길어서 장지뱀이라 한다. 옆구리에 줄무늬가 있는 건 줄장지뱀.
꼬리가 길어서 장지뱀이라 한다. 옆구리에 줄무늬가 있는 건 줄장지뱀.

몸부림치는 장지뱀이 안쓰러웠지만 곧 괜찮아지리라 여겼다. 도마뱀이나 장지뱀은 꼬리가 잘려도 산다잖아. 그런데, 어째 심상치 않다. 고통스럽게 요동치던 줄장지뱀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진다. 숨을 할딱이며 힘겹게 몸을 좌우로 몇 번 비틀더니 작은 혓바닥을 내민 채 잠잠해진다. 꿈틀대던 꼬리도 ​움직임을 멈춘다. 꼬리 자르는 일, 결코 쉽지 않구나. 목숨을 걸고 목숨을 구하는 엄혹한 방편 아닌가.

숨이 멎은 장지뱀을 집어 서늘한 흙으로 옮기며 생각한다. 왜 느닷없이 꼬리가 두 토막 난 걸까? 주변에 아무것도 없던데. 내가 발견하기 직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거기까지 생각하다 갑자기 뒷골이 서늘해진다. 녀석이 꿈틀대던 그 자리, 아까 내가 뛰어서 지나간 자리인데…. 설마, 내 발길에…? 의심은 심증으로, 심증은 확신으로 변한다. 자책으로 가슴이 에인다. 알고서는 절대 하지 않을 일. 모르고 저질렀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돌이킬 수 없다.

삶을 위한 살생이라는 자연의 순리에 덧붙여진 연민이라는 본능

다시 밭일을 시작한다. 흙 속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 두렵다. 흉기가 된 삽과 호미는 내팽개치고 장갑 낀 손으로 퇴비를 뒤집는다. 몸이 잘려 버르적거리던 참개구리가 머릿속에 꽉 들어차 털어낼 수가 없다. 텃밭 한 이랑을 손가락으로 파헤쳐 참개구리 두 마리와 청개구리 한 마리를 발굴했다. 경칩이 한참 지났는데 아직도 겨울잠에서 깨지 못한 늦잠꾸러기들이 얼떨결에 지상으로 끌려 올라왔다. 흙색 개구리들을 손으로 감싸 안전한 곳으로 옮기며 속말을 한다. 운 나쁘게 희생된 개구리 덕에 너희가 살았구나. 죽은 녀석에겐 위로가 되지 않겠지만 말이야.

 

봄흙 속에서 발굴한 어린 참개구리들.
봄흙 속에서 발굴한 어린 참개구리들.

어렸을 땐 고통이 뭔지 몰랐다. 어른들이 하던 대로 쐐기벌레를 잡아 불에 던지고 비 온 후 마당에 나온 지렁이에게 소금을 뿌렸다. 소금 맞은 지렁이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이 아이 눈엔 움직이는 놀잇감으로 보였다. 지렁이의 고통을 비춰볼 거울이 아이에겐 아직 없었다. 어른이 된 후엔 요리를 위해 산낙지를 잡고 지렁이를 낚싯바늘에 꿰었다. 진저리치는 몸의 감각을 숨기고, 먹고사는 평범한 일에 호들갑 떨지 않으려 했다. 죽이는 일이 싫었지만 그 정도는 해내야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여전히 살생하며 산다. 의도치 않게 개구리를 찍고 지렁이를 끊고, 의도적으로 고추밭 노린재를 밟고 진드기를 잡는다. 한밤중에 방으로 기어든 지네를 어쩌지 못해 허둥지둥 슬리퍼로 때려죽인다. 도시에선 맞닥뜨릴 일 없는 생명체들과 매일 마주치다 보니 살생도 직접적이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무뎌질 법도 한데, 내 고통의 민감도는 갈수록 높아진다. 생존을 위해 먹고 먹히는 일은 자연의 순리이나, 아프고 다치고 죽어가는 것에 대한 연민은 나의 본능이다.

연민과 아픔에서 나오는 분노와 투지, 그리고 양심

햇살 따사로운 봄날인데, 마음이 거대한 바윗덩이에 짓눌려 신음 중이다. 1980년 봄 이후 처음 겪는 길고 고통스러운 봄이다. 불법과 위헌과 몰상식의 일상화를 견디는 것으로도 모자라 헌법재판소가 헌법을 질식시키는 초유의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 ‘계엄, 체포, 사살, 폭사, 영현백…’ 이런 추악하고 피비린내 나는 단어들이 좀비처럼 되살아날지 모른다는 불안에 밤잠을 설친다. 12.12 반란으로 집권한 군사독재에 맞서 숱한 희생으로 이뤄낸 민주적 절차와 시스템이 12.3 내란 수괴와 그 대행들, 오만한 판관들에 의해 농락당하고 있다. 어이없고 참담하다. 인내심이 임계점을 지나고 있다.

 

영화 《정돌이》 상영 후 GV.
영화 《정돌이》 상영 후 GV.

지난 2월, 내란 와중에 광주독립영화관에 가서 다큐멘터리 《정돌이》를 봤다. GV까지 지켜보고 돌아오는 길, 동행했던 귀농 청년 중 한 명이 내게 물었다. “겪어보지 않아 궁금한데요, 총칼 든 군대가 앞에 있는데 어떻게 맞서 싸울 수 있었을까요. 저라면 무서워서 도망갈 것 같은데요.” 무서웠을 것이다, 그들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도. 하지만 그럴수록 고통받는 이들 곁을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당할 고통보다 고통을 외면하는 고통이 컸을 것이다. 분노와 투지는 연민과 아픔에서 나온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토록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탱크를 몰고 쳐들어오는 계엄군에 의해 곧 죽을 거란 걸 알면서도 도청 앞 YWCA에 끝까지 남았던 스물여섯 박용준의 마지막 일기다. 작가 한강은 이 문장으로부터 소설이 나아갈 방향을 깨달았다고 한다.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 한강, 『소년이 온다』, 114쪽

문 열기를 포기하지 않을 연약한 사람들의 열쇠

양심을 가진 연약한 사람들의 연대가 이 사회를 지켜왔다. 80년 광주가 그랬고, 87년 민주항쟁이 그랬고, 작년 12월 3일 밤 국회가 그랬다. 내게 질문했던 청년도 거리에서 답을 찾았을 것이다. 양심 때문에, 고통 때문에, 연민 때문에, 사랑 때문에, 가장 연약한 사람들이 가장 마지막까지 싸운다는 것을. 한강 작가도 말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는 거라고. 존엄을 믿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우리의 고통이야말로 열쇠이며 단단한 씨앗이라고.” (한강, ‘노르웨이 문학의 집’ 강연 중에서. 2017. 2. 3.)

고통이라는 열쇠가 열어젖힐 문이 우리 앞에 있다. 열쇠를 가진 연약한 사람들은 문 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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