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 통에 빠진 쥐
평소라면 들여다볼 일 없는 빗물 통이다. 비 온 후 쑥쑥 자란 좀씀바귀와 점나도나물을 호미로 매며 앉은걸음으로 치자나무 뒤로 들어가다 빗물받이 집수정(集水井)과 마주쳤다. 집수정은 지붕에 떨어진 빗물이 물받이 홈통으로 내려와 배수로로 빠져나가기 전 일시적으로 모이는 사각의 통이다. 집수정엔 늘 일정 수위의 물이 차 있다. 뚜껑은 강철 그레이팅인데 격자의 폭이 커서 낙엽이 수시로 빠진다. 썩어가는 낙엽을 치워야지 생각은 했지만 다른 위험은 예측하지 못했다. 내가 무심했다.
허우적거렸을 쥐의 막막한 절망감
무심코 들여다본 통 안에 뭔가 있었다. 물 위에 배를 뒤집고 떠 있는 그것의 정체를 알아본 순간, 탄식이 터졌다. 내 잘못이야. 진작 들여다볼 것을. 진작 손볼 것을……. 집수정에 빠져 있는 것은 쥐였다. 작고 어린 쥐.
십수 년 전 닭을 키울 때, 쥐는 골칫거리였다. 땅굴을 파고 닭장 안에 들어가 닭 모이를 훔쳐먹는 것까진 봐줄 수 있었지만, 갓 깬 병아리들이 사체로 발견되고, 눈앞에서 병아리를 물고 가는 장면까지 목격하니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쥐약을 놓았다. 침입자, 살해자로부터 닭과 병아리를 지키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죽이겠다는 의도를 품었음에도 죽은 쥐 앞에서 기쁘지 않았다. 뻣뻣하게 드러누운 그것은 본성대로 먹고살려 애쓰다 영문 모르고 죽어간 악의 없는 생명체일 뿐이었다. 살리기 위해 죽인다는 내 합리화가 한심했지만, 호미질에 토막 난 지렁이를 황급히 흙으로 덮듯 죽은 쥐를 눈앞에서 치우고 심리적 불편을 곧 잊었다.
집수정의 고인 물에 빠져 죽은 쥐 앞에선 심정이 더 복잡하다. 죽이겠다는 의도가 없었음에도 결과적으로 죽게 만든 자책이랄까. 인간이 설치한 시설물이 그에겐 저승 입구가 되었다. 얼마나 오래 허우적거렸을까. 얼마나 빠져나가고 싶었을까. 통 속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쥐가 된 듯, 집수정에 빠진 쥐의 막막한 절망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쥐에 대한 오래된 기억
수십 년 전 여자고등학교 운동장 한쪽에서 벌어졌던 장면이 불현듯 떠오른다. 교실에 쥐가 나타나 소란이 일자 선생님이 쥐덫을 설치했다. 덫에 생쥐 한 마리가 걸려들었다. 작은 철망 안에서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던 쥐. 자기가 처리하겠다며 호기롭게 쥐덫을 들고 운동장으로 나가던 애가 있었다. 그 애는 양동이에 수돗물을 채우고 쥐가 든 철망을 물속에 집어넣었다. 아이들이 빙 둘러서서 그것을 구경했다.
쥐는 네 다리를 휘저으며 물 위로 올라가려 발버둥쳤고 매번 철망에 막혀 가라앉았다. “제발 그만해…….” 차마 볼 수 없어 벌벌 떨며 기어드는 소리로 애원했지만 그 앤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숨 막혀 죽어가는 쥐의 몸부림을 보며 시종일관 낄낄거리던 그 애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친했던 친구조차 다 잊혔지만, 친하지도 않았던 그 애의 얼굴은 그 장면 그 표정으로 기억 깊이 박제되었다. 공포에 질린 쥐의 까만 눈과 절망적으로 허우적대다 천천히 멎던 마지막 몸짓도.
기억은 더 과거로 올라간다. 예닐곱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자려고 누우면 보이던 천장의 쥐오줌 얼룩, 한밤중에 잠을 깨우는 우다다다- 쥐들의 달리기 소리, 그리고 아침에 눈 떴을 때 내 이부자리 위에서 꼬물거리던 작은 새끼 쥐 한 마리. 쥐오줌에 젖어 찢어진 천장에서 추락한 그것은 연분홍 피부에 눈도 못 뜬, 새끼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은 살덩이였다. 징그럽다기보다 애처로웠다.
새끼 쥐가 떨어졌다고 아버지한테 말하니, 아버지는 의자를 놓고 올라가 천장의 구멍을 크게 뚫고 그 속에서 쥐의 둥지를 통째로 끌어내렸다. 꼬물거리는 새끼들이 여럿이었다. 죽이지 말라는 나의 만류에 아버지는 “그럼 쥐를 키우랴?” 하시곤 밖으로 가져가 그것들을 죽였다. 나는 울었다. 어른들에게는 곡식을 훔치고 병을 옮기는 더러운 쥐였지만 어린 내겐 그런 혐오가 없었다. 혐오는 어디서 온 걸까.
혐오는 누가 만들까
우리가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것들은 대개 가까이에 있다. 세렝게티 초원의 사자보다 내 집 하수구의 쥐와 마당의 뱀이 더 무서운 법이다. 공포는 적대하는 존재와 장소를 공유할 때 발생한다. 쥐와 뱀은 내가 설정한 경계를 넘어와 내 일상을 위협한다. 칙칙한 색깔, 털 없는 꼬리, 어둠을 틈타 다니는 습성, 인간의 음식을 훔쳐먹는 생존력, 질병을 옮기는 매개체 등의 이유로 쥐는 우리의 혐오 대상이 된다. 혐오의 생산자는 쥐인가?
인도의 카르니 마타 사원에서는 쥐가 사람의 숭배를 받는다. 사람들은 사원에 바글바글한 쥐떼에게 우유와 과일을 바치고 쥐똥을 치워주고 기어오르라고 자기 몸을 대준다. 사원의 쥐는 평범한 쥐가 아니라 인간의 환생이라 여겨서다. 사원에서 쥐를 숭배하던 사람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 부엌에 들어온 쥐를 소리치고 쫓아내고 때려잡는다. 집의 쥐나 사원의 쥐는 같은 종이다. 혐오는 사회적 감정이다.
우리는 혐오하는 상대를 비인간화할 때 흔히 동물에 빗댄다. 쥐나 뱀처럼 유해하고 두려워 보이는 동물이 부정적인 인간 묘사에 주로 쓰인다. 얍삽하게 잔머리 굴리는 쥐, 음흉하고 독살스러운 뱀, 미련하고 우둔한 돼지……. 실제 그 동물이 그런 의도와 성향을 가진 게 아닐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의인화한 후 그 이미지를 다시 사람에게 투사한다. 대표적 반려동물인 개는 다를까? “개 같다”는 말은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무의식적으로 쓰는 상투적 욕설이다. ‘개’는 비굴하고 천하고 함부로 짓밟아도 되는 이미지로 소비된다. 개와 돼지를 합친 단어는 집단 혐오의 대명사로 쓰인다. 부당한 처우에 “우리가 개돼지냐?”며 강하게 항의하는 것은 그 단어에 내포된 혐오와 천대와 적대감을 알기 때문이다.
혐오 대상의 비인간화에 동원되는 동물들
나치는 유대인을 ‘쥐’에 비유했다. 좀 다른 경우지만 우리도 어떤 자를 ‘쥐’라고 불렀다. 생김새부터 하는 짓까지 쥐의 밉상에 빗댈 만했다. 얼마 후 ‘쥐’가 앉았던 권좌에 ‘닭’이 앉더니 급기야 ‘멧돼지’가 출몰했다. 음흉하고 탐욕스럽고 사악한 자에 분노한 사람들은 이런 동물적 멸칭을 두말없이 공유했다. 분노야 남들에 뒤지지 않지만 나는 동물 비유를 꺼리는 편이다. 악행과 죄가 차고 넘치는 자들에게 붙여주기엔 죄 없는 동물이 너무 아까워서다.
2008년 사대강 파괴에 반대하는 촛불집회에 참석했을 때, 쥐로 조롱받던 어떤 이를 두고 당시 초등생이던 아이가 그랬다. “쥐가 불쌍해.” 뒤집힌 발상이 즐거워 맞장구쳤었다. 그렇지!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인간 대신 욕받이가 된 쥐와 닭이 불쌍하지. 무도하고 잔인한 자를 향한 경멸을 대신 뒤집어쓰고 두들겨 맞는 멧돼지가 불쌍하지. 멧돼지는 배고프면 흙을 뒤져 배를 채우고 무더우면 진흙탕에 누워 몸을 식힐 뿐인데. 사악한 속임수를 쓰지도 않고, 주제넘는 야심으로 무고한 이들을 도륙하지 않으며, 권력욕에 미쳐 내란을 일으키지도 않는데 말이지.
“짐승만도 못한”이라고 뱉어놓고 짐승에게 미안하다. 개 같은, 소 같은, 말 같은, 새 같은, 고양이 같은, 두꺼비 같은, 장수풍뎅이 같은, 애벌레 같은, 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 바위 같은……. 모든 자연물에 빗대도 저 탐욕스럽고 몰상식하고 무도하고 잔인한 자들을 표현하지 못하겠다. 그자들에게 붙여주기엔 너무도 깨끗한 명사들 아닌가.
비위에 스민 혐오는 어쩔 수 없지
죽은 쥐를 치우는 일은 내 몫이다. 내 신체 감각은 동물 혐오에 상대적으로 둔감하다. 하지만 옆사람은 쥐에 대한 혐오가 비장과 위장에 스며 있다. 나는 그의 비위를 고려해야 한다.
“빗물받이 집수정 말야. 가끔 들여다봐야 할 것 같아. 거기 빠져서 못 나오고 죽는 것들이 있거든.”
“빠지긴 뭐가 빠져.”
“음…… 그러니까, 개구리나 쥐 같은 거 말야.”
“에이, 무슨 쥐가 거길 들어가겠어.”
“저쪽 집수정 보이지? 실은 저기에 쥐가 빠져 죽어 있어. 한참 된 거 같아.”
“흐익!”
“아까 우연히 발견했어. 내가 치울게. 걱정 마. 내 작은 삽 어딨지?”
“나 안 볼 때 치워!”
“저쪽에 가 있어. 좀 있다가 와.”
“어디 묻었는지도 말하지 마!”
“알았어.”
그는 고개를 돌린 채 경보 걸음으로 바삐 멀어져 갔다. 나는 집수정 그레이팅을 열고 고인물 속에 잠긴 불쌍한 쥐를 삽으로 건져 뒷산 비탈에 묻어줬다.
(쥐에 대한 독자의 혐오감과 약한 비위를 고려하여 이번 글에는 사진 대신 그림을 그려 넣었다. 혐오가 신체에 스미면 대상을 보는 것조차 힘들어한다는 걸 옆사람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에니메이션 <라따뚜이>나 <톰과 제리>의 쥐에 거부감을 안 느끼는 건 주인공들이 실제 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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