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 치열한 짝짓기
한여름 풀 자라는 속도가 무섭다. 사람 손이 따라잡지 못한다. 정원의 풀을 매는 동안 마당의 풀이 치솟고, 마당의 풀로 호미를 옮기면 어느새 텃밭이 정글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날을 넘기고 달을 채우며 풀과 씨름한다. 삼복더위에도 긴팔 옷에 긴 바지, 모자와 토시와 장갑으로 중무장하고 겉옷이 땀으로 무거워질 때까지 일한다. 때론 풀과 내가 서로를 부여잡고 헤어날 수 없는 무한 맴돌이를 하는 기분이다. 내가 풀을 잡는지 풀이 나를 잡는지 모르겠다. 종국에 나는 풀한테 지고 세월에 진다. 풀은 해마다 열정적으로 일어서고 나는 해마다 시들어간다. 풀은 늘 새 풀이지만 나는 매번 이전의 나가 아니다.
바랭이가 빽빽하게 지면을 덮고 돌피는 허리까지 치솟았다. 고랑과 이랑도 구분이 안 될 만큼 풀이 밭을 장악했다. 작업 방석을 엉덩이에 깔고 앉아 풀을 매기 시작한다. 풀숲에 들어가 앉으면 풀잎이 얼굴을 스친다. 억센 뿌리 돌피는 호미로 찍고, 마디마디 뿌리 내린 바랭이는 손으로 휘어잡아 뽑는다. 나는 죄 없는 풀과 여름 내내 싸운다. 내겐 책임져야 할 꽃과 작물이 있기 때문이다.
구애는 간절하고 절박하게
붉은 배롱나무 꽃이 만발했다. 백일홍과 버들마편초도 한창이다. 좀목형 꽃줄기 사이로 꿀벌과 호박벌이 윙윙거리고, 호랑나비와 박각시나방이 꽃술 사이로 긴 입을 꽂는다. 긴꼬리제비나비 두 마리가 앞뜰을 너울너울 오간다. 앞서가는 나비가 암컷, 그림자처럼 뒤따르는 나비가 수컷이다. 암나비가 사뿐 백일홍 꽃에 내려앉으면 수나비는 허공에서 날갯짓하며 기다린다. 나비의 애타는 연애가 이렇게 시작된다.
암나비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겨 다니며 꿀을 맛보는 사이, 수나비는 잠시도 앉지 못하고 그녀의 뒤를 파닥파닥 따라다닌다. 일생일대 최고의 순간을 앞두고 꽃이나 꿀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그녀가 날면 함께 날고, 그녀가 꽃술에 앉으면 함께 멈춘다. 간절한 추종자는 한시도 해찰하지 않는다.
암나비는 고고하고 무심하다. 열렬히 따르는 수나비를 짐짓 모른 체한다. 그래도 멀리 가지 않고 한들한들 꽃밭을 맴도는 걸로 보아 퇴짜 놓을 생각까진 없는 듯하다. 수나비의 오른쪽 꼬리날개는 찢겨 달아나 있다. 균형 잃은 날개는 야생의 경쟁에 취약하다. 다행히 주변에 다른 수컷이 없고 암나비도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하다. 정열적인 구애에 이미 마음을 빼앗긴 걸까.
한참 풀을 매다 일어서니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까만 날개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백일홍 꽃밭 지나 좀목형 꽃가지 너머로 날아갔을까? 마침내 손잡고 푸른 잎새 사이로 숨었을까? 반나절을 뒤따르며 애태우던 제비나비 총각, 마침내 그녀의 사랑을 얻었을까?
수나비의 이기적인 봉인전략
좀목형 꽃줄기 사이를 산호랑나비 세 마리가 엉키듯 부딪치며 격렬하게 날아오른다. 암컷 한 마리에 수컷 두 마리, 삼각관계가 치열하다. 경쟁자를 따돌린 최종 승자가 암나비의 사랑을 얻을 것이다. 수나비는 짝짓기할 때 정자 주머니와 영양물질을 암나비 몸에 넣는다. 암나비의 짝짓기 욕구를 줄여줄 성분이 그 속에 들어 있다. 다른 수컷의 접근을 차단할 예방조치다.
짝짓기 후 암컷의 생식관을 봉인하는, 극단적 전략을 구사하는 나비도 있다. 호랑나비과의 붉은점모시나비와 애호랑나비가 그들이다. 수컷은 짝짓기와 동시에 스프라기스(Sphragis) 마개를 만들어 암컷의 생식관을 막는다. 다른 수컷과의 짝짓기를 물리적으로 막아, 오로지 자기 유전자만 남기려는 이기적 전략이다. 이성에 대한 독점욕은 영생을 꿈꾸는 유전자의 명령일지도 모른다.
생식관이 봉인된 암나비는 알을 어떻게 낳을까? 짝짓기와 산란이 하나의 생식관으로 이루어질 것 같지만, 대다수 암나비는 교미구와 산란구를 따로 가지고 있다. 즉 교미구가 막혀도 산란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그럼 그렇지! 산란을 방해하는 봉인전략이란 게 있을 수 있나! (물론 하나의 교미구로 산란까지 하는 나비도 있긴 하다. 그들은 당연히 봉인전략을 쓰지 않는다.)
번식의 불꽃과 완전연소의 꿈
뜨거운 여름, 만물이 생명력으로 충만하다. 풀과 작물은 꽃대를 올려 씨앗을 맺고, 벌과 나비는 짝을 찾느라 분주하다. 온 세상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지금은 번식기, 때를 놓치면 낭패다. 개체가 소멸하기 전에 번식의 불꽃을 점화해야 한다.
느릅나무 아래에서 모시긴하늘소가 짝짓기를 한다. 모시풀에 살아서 이름이 모시긴하늘소인데 무궁화에서도 살아 무궁화하늘소라고도 불린다. 이들의 짝짓기는 정물처럼 고요하다. 나는 숨죽여 지켜본다. 더듬이의 곡선, 다리의 각도, 무늬와 색의 조화, 균형감에 대칭성까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 이런 몸을 만들어온 진화의 시간이라니! 아찔하고 경이롭다.
야외테이블에 노린재 두 마리가 꽁무니를 붙인 채 돌아다닌다. 노린재치곤 감탄스러울 만큼 예쁘다. 두쌍무늬노린재인데, 등판의 점무늬가 두 쌍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보통은 붉은색이지만 간혹 갈색 개체도 눈에 띈다. 휴대전화 카메라를 들이대니 꽁무니를 붙인 채 둘이서 보조를 맞춰 슬금슬금 피한다. 그 움직임조차 가지런하고 예쁘다. 콩꼬투리를 말려 죽이는 톱다리개미허리노린재나 고추 줄기에 다닥다닥 붙은 알락수염노린재에 이맛살을 찌푸리던 내가, 색깔 좀 독특하다고 노린재를 보고 반색하다니! 얼마 전엔 화려한 광대노린재한테 반해 입을 떡 벌리지를 않나! 외모에 좌우되는 나의 편애와 편견을 반성한다.
식물은 꽃을 피워 자손을 남긴다. 동물의 번식 역시 개체의 소멸과 맞닿아 있다. 거름이 풍부한 밭에선 채소 잎이 무성하고, 척박한 땅에 돋은 식물은 꽃대부터 올린다. 씨앗 떨어진 자리가 어디든, 삶터의 조건이 어떠하든, 번식은 생애 절정의 축제다. 한 몸이 시들기 전 새 몸을 만드는 절차 덕에 생명은 영속한다. 젊은 몸, 매력적인 육체엔 시효가 있다. 자연의 불가역적인 힘은 개별 생명체를 소멸이라는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저항은 헛되다.
나는 오래전 번식기를 통과하여 현재 번식 후기에 살고 있다. 곤충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난 덕에 번식 후기가 제법 길다. 활활 타고 남은 잔불의 정체성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중이다. 갱년기도, 늙음도, 죽음도, 다 인생의 첫 경험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덜 탄 숯보다 완벽한 흰 재가 좋다. 완전연소의 꿈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껍데기는 알맹이의 일부
이른 아침, 정원의 지피식물 위에서 달팽이 한 쌍이 얼굴을 맞대고 있다. 길어졌다 짧아졌다 하는 두 쌍의 더듬이로 서로를 탐닉 중이다. 이 세상은 좌우와 음양으로만 나뉘지 않는다. 난소와 정소를 한 몸에 가진 달팽이는 여성이자 남성이다. 새끼를 낳으려면 다른 달팽이의 정자를 받아야 하는데, 불가피한 상황에선 자가수정도 가능하다. 물론 그 경우 유전자의 취약성이나 낮은 번식 확률은 감내해야 한다.
연체동물이 몸을 맞대고 상대를 정성스레 어루만지는 모습은 꽤 에로틱하다. 등에 업히거나 날개를 겹쳐 꽁무니를 맞대는 곤충의 짝짓기와 사뭇 다르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정성을 다해 애무한다. 결정적 순간에 이르면 두 달팽이는 목에서 관을 뻗어 상대의 목과 연결한다. 더듬이 옆에 있는 생식공으로 정자 주머니를 주고받는 것이다. 달팽이의 생식공은 짝짓기 통로와 산란 구멍을 겸한다.
알에서 갓 깨어난 아기 달팽이는 투명하고 얇은 껍데기를 가지고 있다. 이 시기 어린 달팽이는 한없이 취약하여 으깨지기 쉽다. ‘달팽이 집’이라 흔히 부르는 껍데기는 사실 집이 아니라 몸이다. 그것은 연체와 함께 성장한다. 껍데기를 키워 나선의 회전을 늘리고 단단히 다지면서 달팽이는 어른이 된다.
문학적 비유로서 ‘껍데기’는, ‘알맹이’를 가린 비대한 자아, 본질을 왜곡하는 가식적 허상으로 곧잘 사용되지만, 생명체의 껍데기는 알맹이의 일부이자 본질의 겉옷이다. 외력에 대한 최소한의 자기방어이자 내부가 설계한 유일한 외부다. 나는 나의 껍데기를, 육체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을 담담히 바라본다. 덧칠하지 않은 채, 유리 같은 연약함과 자아의 갱신을 거쳐, 이제 단단한 나선의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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