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와 경외의 대상, 뱀

김혜형 작가, 농부
김혜형 작가, 농부

뱀을 먹는 뱀, 능구렁이

논둑에서 발견한 것은 두 마리의 뱀이었다. 한 마리가 다른 한 마리를 칭칭 감고 있는데 그 모양이 단단한 매듭 같았다. 휘감은 쪽은 검붉은 능구렁이로 온몸에 팽팽한 힘이 들어가 있고, 휘감긴 쪽은 초록색 유혈목이로 일자로 축 늘어져 미동도 없었다. 능구렁이가 유혈목이의 숨을 끊어 놓고 뜸을 들이는 참이었다. 삼키기까지는 상당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능구렁이가 유혈목이를 칭칭 휘감았다.
능구렁이가 유혈목이를 칭칭 휘감았다.

논에서 뱀을 만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논물에서 헤엄치는 무자치를 간혹 보는데, 위협적인 동물은 아니어서 덤덤히 지켜본다. 무자치는 물을 좋아해 물뱀이라 불리는데 몸집이 크지 않고 독이 없다. 헤엄치는 뱀은 많지만 잠수하는 뱀은 무자치뿐이다. 제초제와 농약 사용량이 늘면서 예전에 비해 무자치의 개체 수가 줄었다는데, 약 치지 않는 우리 논엔 미꾸라지와 개구리가 많아선지 심심찮게 보인다.

능구렁이는 뱀을 잡아먹는 뱀이다. 붉은 몸에 검은 무늬가 강렬해서 뱀 가운데 확연히 눈에 띈다. 맹독을 가진 까치살무사를 한 끼 밥으로 먹을 만큼 독사 사냥에 능한데, 정작 능구렁이 자신은 독이 없다. 이빨이 작고 독도 없어 휘감아 죄는 방식으로 사냥을 한다. 능구렁이는 독사뿐 아니라 독 두꺼비도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무독이 맹독을 삼켜 맹독을 무독으로 만든다. 지독한 아이러니다.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이유

산 아래 사니 뱀과 마주칠 일이 많다. 물 고이는 자리에 연못을 만드니 개구리가 몰려들고 덩달아 뱀도 내려온다. 가장 흔한 건 유혈목이이고, 살무사는 가끔 보인다. 올챙이가 가득한 봄 연못에 들어온 뱀을 연못가에 앉아 관찰한다. 내가 휴대전화 카메라로 뱀을 겨누니, 뱀도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주시한다. 우리는 한동안 악의 없이 대치한다.

뱀이 나를 향해 두 갈래의 혀를 반복적으로 날름거린다. 뱀의 혀가 두 갈래인 것은 종교적 간교함의 증거가 아니라 효과적인 스테레오 후각 기관이라서다. 뱀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냄새 분자를 혀로 채집해 뇌의 후각중추에 전달한다. 혀에서 뇌까지 이어지는 정보 전달 시스템이 먹잇감을 공략하는 정밀도를 높인다. 수차례 혀를 날름대며 나를 탐색하던 뱀이 스르르 몸을 돌려 돌틈으로 사라진다. 비호감 인간임을 간파한 모양이다.

눈에 보이는 뱀은 무섭지 않다. 진짜 무서운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뱀이다. 밭둑에 쌓아 둔 차광망을 두 팔로 안아 올리는 순간 차광망에서 툭 떨어지던 살무사, 손 씻으려고 끌어당긴 대야 밑에서 고개를 쳐들던 까치살무사, 무심코 들춘 폐자재 밑에서 꿈틀대던 능구렁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느닷없이 뱀과 마주치면 제아무리 강심장이라도 기겁하지 않을 수 없다.

 

연못에서 만난 뱀.
연못에서 만난 뱀.

두려움에 대한 적의 혹은 경외

공포와 기피 감각은, 맹수에게 쫓기고 독사와 독충에 물리며 인류가 유전자 깊이 각인해둔 생존 본능이다. 발 없는 몸, 미끄러운 비늘, 두 가닥의 혀, 치명적인 독을 가진 뱀은 인간에게 두렵고 이질적이며 경이로운 존재다. 인간은 통제할 수 없는 대상에 이야기를 입히고 상징을 부여했다. 그리스 신화는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에 뱀을 둘렀고, 기독교 신앙은 에덴의 뱀을 사탄으로 표상하여 악을 인격화했으며, 우리 민간신앙은 ‘업구렁이’를 가정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동서양의 종교와 문화에서 뱀은 증오와 적의 혹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현대의 뱀은 경외보다 혐오의 대상에 가깝다. 대도시를 건설해 야생의 위험을 밀어낸 사람들은 안락한 거실에서 스크린으로 야생동물을 감상한다. 교외와 시골 역시 확장된 인간의 영역이다. 어디를 가나 인간이 쳐놓은 물리적‧심리적 경계로 가득하다. 인간에게 밀려난 동물들은 합의한 적 없는 불명확한 경계를 넘나들며 생존을 이어간다. 신비롭고 기이한 영상 속 야생동물은 현실의 내 집 경계를 넘는 순간 박멸의 대상이 된다. 영문 모르고 경계를 넘은 동물을 인간은 혐오와 분노로 징벌한다. ‘무섭고, 해롭고, 징그러운’ 동물이라면 더욱 용서할 수 없다. 발을 굴러 해결할 일에도 삽을 들고 나선다. 과도한 공격은 두려움의 뒷면이다.

마당 한쪽에 쌓아둔 피죽 땔감을 치우자 땔감 틈에서 살무사가 고개를 든다.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 갑자기 쏟아진 햇살에 저도 놀랐을 텐데 도망갈 생각도 않고 가만히 있다. 어리둥절한 듯도 하고, 제 독을 믿고 버티는 듯도 하다. 독사는 서두르지 않는 성미 때문에 인간의 삽날에 희생되는 일이 잦다. 그냥 둘 수 없어 양동이와 집게를 가져와 녀석을 주워 담았다. 집 마당에서 멀리 떨어진 계곡 비탈로 데려가 풀어주니 낙엽 틈으로 스르르 꼬리를 감춘다. 나는 살해와 격돌이 싫다. 그들의 삶터를 밀어서 내 터로 삼았으니 일상의 조심성과 약간의 불편은 내가 감수할 몫이다.

그들의 속도를 짓밟은 인간의 속도로

논에 가려고 차를 몰고 마을길을 내려가다 뱀을 봤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시멘트길 위에 붉으스름한 뱀이 몸을 구부린 채 엎드려 있었다. 얼른 핸들을 꺾어 뱀을 피한 후 서행하며 사이드미러로 보는데,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다. 좋지 않은 예감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려 뱀에게로 갔다. 몸길이가 1미터쯤 되는 검붉은 능구렁이 성체다. 시멘트 바닥에 손바닥만 한 핏자국이 있다. 발로 살짝 건드린다. 움직이지 않는다. 로드킬당한 것치곤 손상이 크지 않다. 꼬리 부위가 목 위로 올라가 있는 것으로 보아 심하게 몸부림친 것 같다. 즉사하지 못했으니 고통이 심했겠다. ‘대낮에 길 위로 올라오다니, 능구렁이답지 않구나. 빨리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왜 그랬니….’

해가 뜨거운데 몸이 마르지 않은 걸 보니 사고는 불과 몇 분 전에 일어난 듯하다. 이대로 두면 다른 차들이 계속 밟고 지나겠지. 시멘트 바닥에 갈려 풍화되는 건 그리 좋은 마무리가 아니다. 발로 살살 밀어서 풀숲 그늘 안으로 들여놓아 주었다. 자연의 청소부들이 능구렁이의 몸을 거둬 흙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핏자국도 곧 사라지겠지.

다시 차에 올라 엑셀을 밟는다. 그들의 길을 끊은 인간의 길을, 그들의 속도를 짓밟은 인간의 속도로 달려간다. 미안해하며, 미안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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