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의 허물
한때는 몸, 지금은 껍데기
감나무 묘목에 작은 곤충이 붙어 있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허물 벗은 메뚜기다. 다가오는 인간의 형체를 감지한 어린 메뚜기가 슬금슬금 옆걸음으로 허물에서 멀어진다. 벗어둔 그의 옷이 뒷다리를 얌전히 모은 채 거꾸로 매달려 있다. 번데기 시기를 거치지 않고 불완전변태를 하는 메뚜기는 몇 차례의 옷 벗기를 통과해 성충이 된다. “이건 몇 번째 옷이니?” 나의 속삭임에 메뚜기가 귀찮다는 듯 기둥 뒤로 돌아간다. 한때는 몸이었지만 지금은 떠난 껍데기, 그에게 의미가 있을 리 없다.
뒤뜰의 삼잎국화 잎에 사마귀가 붙어 있다. 하얀 허물을 꽁지에 매단 채 접힌 날개를 펴는 중이다. 완강한 자아에서 갓 벗어난 연둣빛 몸이 말갛다. 새 몸과 옛 허물이 가는 끈으로 연결돼 있다. 너를 못 놓겠다며 매달리는 과거의 애착 같다. 저 허망한 끈, 날개 펴고 이동하는 순간 툭 끊어지겠지. 과거를 주렁주렁 매달고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으니까.
빛과 어둠에 대한 우리의 통념
간밤에 비가 내렸다. 아침 뜰을 한 바퀴 돌며 쓰러진 꽃들을 일으키다 범부채 잎에 붙은 매미를 봤다. 제 껍데기에 매달린 매미의 몸빛이 흐리다. 비 오는 밤에 탈피라니, 날을 잘못 잡았구나. 그래도 날개 무사히 폈고 천적에게 먹히지도 않았으니 이만하면 성공이다. 한두 시간 지나 몸 마르고 빛깔 선명해지면 훌훌 떠날 것이다.
짧으면 며칠, 보통은 몇 달, 길어야 한해살이인 곤충계에서 매미는 최장 7년까지 사는 장수 곤충이다. 여왕개미나 여왕벌 같은 사회성 곤충의 리더도 오래 살긴 하지만, 평생 번식만 하는 그들과 달리 매미는 생애 대부분을 소년으로 산다. 매미의 어린 시절은 느리게 흘러간다. 암매미가 나무줄기에 낳은 알은 이듬해 여름이 되어서야 애벌레로 깨어난다. 지하로 내려가 나무뿌리 수액을 빨며 7년여를 보내는 동안, 유충은 예닐곱 번 탈피하여 성충의 모습에 가까워진다. 생애 마지막 여름이 되면, 터질 듯 성숙한 몸뚱이가 갑갑한 껍질을 견디지 못한다. 지면을 뚫고 나가 뭐든 붙잡고 오르라는, 거역할 수 없는 유전자의 충동질이 내부에서 들끓는다. 매미는 지상으로 올라와 식물의 수직 줄기에 갈퀴 발을 걸고 온힘을 다해 등껍질을 찢는다.
허물 벗는 대여섯 시간은 매미에게 가장 취약한 시기다. 우화 도중 몸이 허물에 끼어 날개도 못 펴보고 죽거나, 사마귀나 개미 떼에게 속절없이 뜯기기도 한다. 위기를 넘겨 성체가 되면 열정의 혼인 잔치가 기다리고 있다. 수매미는 텅텅 비운 배를 공명실 삼아 진동을 증폭시켜 구애의 노래를 부른다. 뜨거운 여름 요란한 매미 소리는 유전자를 남기려는 수컷들의 필사적인 세레나데다. 암매미는 뱃속이 산란기관으로 들어차 소리를 내지 못한다. 짝짓기 후 수컷은 미련 없이 죽고, 암컷도 산란을 마치면 흙에 떨어져 개미 밥이 된다. 유전자 바통을 다음 세대로 넘기는 순간이 바로 삶의 종착점이다. 쇠퇴와 소멸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난다. 내맡기면 그만이다.
매미의 마지막 보름은 짧고 격렬하여 비장미가 있다. 우화와 짝짓기, 산란과 죽음이 휘몰아치듯 빠르게 진행되고 종결된다. 지상의 짧은 번식기는 지하의 긴 유충기와 극적으로 대비된다. 사람들은 매미의 땅속 삶을 “인고의 세월”이란 말로 상투화한다. 인고(忍苦), 괴로움을 견디다니…. 성장은 번식의 땔감일 뿐인가? 신체는 유전자의 숙주일 뿐인가? 지상의 빛과 지하의 어둠을 대하는 우리의 통념은 종종 삶의 세부를 뭉갠다. 지하는 지상을 위한 대기실이 아니고 어둠은 빛의 밑자락이 아니다. 빛과 어둠, 지하와 지상, 생존과 번식…. 무엇이 더 중하고 덜 중한지 나는 매미에게 듣지 못했다.
말은 너무 작고, 상실은 너무 크다
육친 같은 그이를 한 번도 언니라 불러보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 존대했다. 그를 안 지 20여 년, 알면 알수록 지극한 사람이라 깊이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는 한 번도 나를 가르치지 않았지만 나는 늘 그에게 배웠다. 섬세하고 따뜻한 그이 곁에 있으면 거친 마음의 모서리가 둥글어지고 초조한 시간의 장력이 느슨해졌다. 그이로 인해 나는 조금씩 착해지고 사람다워졌다.
몸에 병이 자란 지 여러 해, 휘몰아치는 폭풍우 한가운데서 그는 잔잔하고 의연하였다. 상황을 받아들이고, 소유물을 나누고, 주변을 정리했다. 몸의 제어력을 잃어갈 때도 자신은 괜찮다며 마음 아파하는 주변을 애처로워했다. 지난겨울 그는 결국 쓰러졌고 봄꽃 핀 정원을 다시 거닐지 못했다. 봄날, 침상에 누운 그가 문자를 보내왔다. “매일 담대함과 평온에 대해서 생각해요.” 이후 수개월, 그는 몸의 기능을 잃고, 시력을 잃고, 통증과 섬망의 끝에서 이생의 몸을 벗었다. 엷은 미소와 눈물 한 방울이 그의 마지막이었다고 들었다. 그의 육신이 불로 들어갈 때 나는 화장장 대기실에 앉아 내 손을 꼭 잡던 그의 체온을 느꼈다. 그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따뜻하였다.
붙잡아둘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작별을 받아들일 수 없어 괴로워하던 봄, 빅토리아 베넷의 《들풀의 구원》을 읽었다. “왜 낫게 할 수 없어?” 죽어가는 고양이를 보며 저자의 어린 아들이 묻는다. “살아 있는 건 모두 언젠가 죽어야 해. 그건 어쩔 수 없어.” 저자는 “아이에게 알려주기엔 가혹한 진실”이라 생각하며 말한다. 그 말을 하면서도 눈물을 억누를 수 없는 엄마의 손을 잡으며 아이가 어른처럼 말한다. “우는 건 좋은 일이야.”
“말은 너무 작고, 상실은 너무 크다.” 죽은 언니를 애도하는 저자의 문장에 나는 자석처럼 붙들렸다. 팽창하는 슬픔을 담기엔 말의 그릇이 너무 작아 한마디도 꺼낼 수 없다. 말이 방만하면 슬픔은 갈 바를 잃는다. 꾹꾹 눌러 오므려 안으로 삼켜야 한다. 슬픔은 침묵의 불씨처럼 내 안에 안착한다. 이것이 나의 애도다.
매미가 날아간 범부채 잎에 매미의 헌 옷 한 벌 걸려 있다. 그것을 떼어 찬찬히 들여다본다. 허물의 눈이 유리구슬처럼 투명하다. 머리부터 등까지 중심부가 칼로 벤 듯 한일자로 찢겨 있다. 비좁은 껍질 속에 갇힌 유연하고 팽창하는 자아가 오래 갑갑했겠다. 껍질을 찢어야 새 몸을 얻고, 새 몸을 얻은 후엔 지난 몸을 잊는다. 그이도 지난 몸을 잊었을까. 가느다란 애착의 끈을 가차 없이 끊었을까. 티끌 먼지로 흩어졌다 다시 돌아왔을까. 여기, 공기 중에, 흙 속에, 꽃 속에, 애처로운 우리 곁에, 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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