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새들의 보금자리
곤줄박이가 나를 향해 직진해 내려온다. 내 뺨에 부채질하듯 파닥파닥 날갯짓하곤 바로 옆 남천 가지로 날아가 앉는다. 앙증맞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반짝이는 까만 눈으로 나를 본다. 웃음을 참으며 짐짓 모른 체하니 다시 휘리릭 날아와 날개로 내 이마를 건드리곤 꽃나무 가지에 올라앉아 삐삐-! 삐삐-! 소리친다. 내 귀는 곤줄박이 말을 자동 번역해 듣는다. “땅콩-! 내놔-!”
너희들, 연애하는구나?
지난겨울 테라스 기둥에 모이통을 매달고 새들을 위해 한동안 땅콩을 놓아두었다. 봄이 되어 모이통을 치웠는데도 땅콩 맛에 길든 곤줄박이들이 나를 모이통으로 알고 쫓아다닌다. 최근 좀 뜸하다 싶더니 다시 시작이다. 집요한 녀석들! 쪼그려 앉아 풀을 매고 있으면 무릎과 어깨에 앉는 건 예사고, 머리 위에서 정수리를 콕콕 쪼기까지 한다. 아얏! 파리 쫓듯 휘휘 손을 내젓다가 결국 포기하고 감춰둔 땅콩 몇 알을 가져온다.
땅콩 얹은 손바닥을 허공에 내밀 때 오리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또 다른 곤줄박이를 봤다. ‘이 녀석이 가면 저 녀석이 오겠군.’ 생각했다. 뜰에서 날 뒤쫓는 곤줄박이는 한두 마리가 아니니까. 파닥파닥 땅콩을 조르던 녀석이 내 손바닥의 땅콩 한 알을 콕 물더니 포르릉 오리나무 쪽으로 날아간다. 무심코 눈으로 뒤쫓다 뜻밖의 광경에 입이 벌어진다. 아니… 저 녀석이…! 내게서 받아간 그 땅콩, 나를 협박하고 폭행해 얻어낸 그 소중한 땅콩을 오리나무 가지에 앉은 녀석에게 잽싸게 갖다 바치지 뭔가! 얌체같이 부리로 척 받아먹는 너는 또 뭐냐? 어이없고 황당하여 웃음이 난다. “너희들, 연애하는구나?”
짝꿍한테 땅콩을 바친 녀석이 다시 내게로 와서 두 번째 땅콩을 갈취해 간다. 두 마리가 사이좋게 오리나무 가지에 나란히 앉아 발톱으로 땅콩을 꼭 쥐고 콕콕콕콕 빠른 속도로 쪼아먹는다. 곤줄박이는 외모로 암수 구분이 안 되지만 동물 세계에서 먹이를 구애의 수단으로 삼는 쪽은 대개 수컷이니 내게서 땅콩을 빼앗아 간 건 분명 사내 녀석일 것이다.
땅콩으로 짝의 환심을 샀으니 머잖아 함께 둥지를 틀겠구나. 새봄 곤줄박이 한 쌍이 이렇게 탄생한다. 사랑의 메신저는 나의 땅콩이니, 얼떨결에 내가 중매쟁이가 되고 말았다.
무심코 덮은 신문지 아래 무엇이 깔렸나
봄은 새들의 번식기다. 딱새, 박새, 곤줄박이가 쌍쌍이 날며 보금자리를 탐색한다. 우체통은 둥지 틀기 딱 좋은 장소다. 우체통 안에 편지 대신 낙엽과 이끼가 들어 있으면 빨리 결정해야 한다. 우체통을 새 둥지로 내줄지, 아니면 입구를 막아 새를 체념시킬지. 한 달쯤 새집으로 빌려줄 수도 있지만, 문제는 우편물이다. 기껏 둥지 틀어 알까지 낳았는데 그 위로 우편물이 떨어지면 그런 날벼락이 없을 테니.
“새가 둥지를 틀었으니 우편물은 바구니에 넣어주세요.” 수년 전만 해도 이렇게 써 붙이고, 우편물 받을 바구니를 따로 놓아두었다. 하지만 지금은 요령이 생겨 다른 방법을 쓴다. 집 주변 나무 위에 새집을 여러 개 만들어 주고, 우체통 입구엔 덮개를 설치한 것이다. 허락할 수 없다면 미리 막는 게 낫다. 작은 부리로 이끼와 검불을 수백 번 물어 나르는 노고를 헛일로 만들긴 싫다.
새들이 탐내는 공간은 우체통만이 아니다. 화덕 구멍, 빈 연통, 헛간 선반 같은 후미지고 아늑한 자리는 새들이 즐겨 깃드는 장소다. 하지만 선택의 결과가 늘 좋은 건 아니다. 지저분하다고 사람 손에 의해 치워지거나 뱀이나 쥐의 습격을 받기도 한다. 사람의 부주의로 알이 희생되기도 한다. 신발장 구석에 새 둥지가 있는 줄 모르고 신문지 더미를 휙 집어넣었다가 며칠 후 새알을 발견하고 자책하는 나 같은 사람 말이다. 신문지에 덮인 알 주위를 날며 어미새는 얼마나 안절부절 애가 탔을까.
화덕에도, 헛간에도 어미새가 있다
봄에 나온 첫 고사리를 삶으려고 야외 화덕 불구멍을 여는 순간, 안에서 하악! 하는 새된 소리가 튀어나온다. 깜짝 놀라 들여다보니 화덕 구멍 속에 조그만 박새가 엎드려 있다. 검불과 이끼로 지은 둥지 한가운데 앉아, 꽁지깃을 부챗살처럼 펼치고 날갯죽지를 치켜올리며 부리를 쩍쩍 벌려 위협음을 낸다. 학! 학! 저리 가라고, 알 품었다고, 작은 새가 온 힘을 다해 인간에게 대항한다. 난 화덕에 고사리 삶기를 포기한다. 새끼를 기르는 마음은 사람이나 새나 다를 바 없으니.
농사 연장을 가지러 헛간에 들어갔다가 선반 구석에서 이끼와 마른 풀더미를 발견한다. 새가 둥지를 틀었구나! 살금살금 다가가니 둥지 위로 빼꼼 고개를 내미는 어미 딱새, 느닷없는 불청객을 무섭게 노려본다. ‘이크, 미안!’ 중전마마 앞을 물러나는 무수리처럼 살금살금 뒷걸음질 쳐서 나온다. 십여 일 후, 알이 부화했는지 궁금해 헛간 선반을 들여다보니 어미새는 보이지 않고 눈도 못 뜬 민둥머리 아기새 다섯 마리가 오글오글 모여 있다.
신발장에 둥지를 튼 민폐 딱새
신발장에 딱새가 다시 둥지를 틀었다. 무심결에 덮은 신문지 때문에 새알이 희생된 그 자리다. 현관에 새 둥지가 있으니 드나드는 게 조심스럽다. 새인들 편할 리 있나. 우리가 문을 열면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 한참 만에 돌아온다. 저렇게 자주 자리를 비워서야 새끼가 제대로 부화하겠나. 도리 없이 우리가 현관 출입을 삼가기로 한다. 현관 대신 거실 앞 유리문으로 드나드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지붕 없는 바깥이라 신발이 이슬에 젖고 비를 맞는다. 이게 다 민폐 딱새 탓이다.
열흘쯤 지났을까. 현관 신발장을 엿보던 옆사람이 둥지에 어미새가 안 보인다며 장난스레 투덜댄다. “난 저 때문에 이렇게 조심하며 사는데 저는 놀러나 다니고, 참 야속하네.” 자세히 보니 둥지에서 뭔가 꼬물거린다. “아기새가 태어났네!” 새끼 기르는 부모 새들은 한시도 쉬지 못한다. 쩍쩍 벌리는 노란 주둥이들 속으로 쉴 새 없이 애벌레를 투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 떠서 해 질 때까지 날갯죽지가 닳도록 물어 나른다. 내리사랑, 위로부터 받은 은혜를 아래로 갚기. 본능에 새겨진 헌신이 애틋하고 장하다.
갓 깨어난 아기들은 깃털이 없고 살조차 투명해서 등뼈가 다 보인다. 눈도 못 뜬다. 사나흘 지나면 솜털이 나고 일주일쯤 지나면 깃털이 돋는데 얼룩덜룩 그다지 볼품은 없다. 열흘이 지나면 어른 새만큼 몸집이 커지고 눈망울도 또록또록하다. 알에서 갓 깨었을 땐 작은 기척에도 주둥이를 쩍쩍 벌리더니 이젠 낯선 기척에 숨죽여 웅크린다. 위기 대처 능력이 생긴 것이다.
딱새나 박새 같은 작은 새들은 알에서 깨는 데 12~13일 걸린다. 날갯죽지에 힘이 생겨 둥지를 떠나는 데도 비슷한 기간이 소요된다. 신발장에 딱새가 둥지 튼 지 4주째, 아기새들이 둥지를 떠날 날이 머지않았다. “조만간 청구서 보내야겠어!” 옆사람은 웃으며 말하지만, 임대료는 이미 넘치도록 받았다. 아기새 자라는 모습만큼 예쁜 임대료가 있을까.
새들은 과거의 둥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소하는 날, 둥지가 비좁도록 몸집이 자란 아기새들이 하나둘 날아올라 둥지를 떠난다. 어린 날을 품어준 따뜻하고 안전한 거처지만, 떠날 땐 돌아보지 않는다. 둥지의 효용은 끝났다. 의지처를 떠나는 순간 선택과 책임의 짐을 스스로 져야 한다. 새들은 과거의 둥지로 돌아가는 대신 자신의 새 둥지를 만든다.
나도 아버지의 둥지를 떠나 어른이 되었다. 그 후 몇 개의 공고해 보이는 둥지를 만들고 그것에 기대고 그것을 허물었다. 둥지들은 나를 품고 도왔고 지탱시켰고 질식시켰다. 가부장의 울타리, 이념의 허상, 종교적 신념…. 내부에 있을 땐 완벽해 보이던 진리가 테두리를 벗어나자 그저 하나의 거처, 하나의 질서, 하나의 완고한 도그마로 드러났다. 나는 둥지에서 성장했고 둥지를 버렸다. 둥지란 결국 임시 거처. 소유하려 할수록, 안착하려 할수록, 감옥이 되고 무덤이 된다.
텃밭의 풀을 매는데 머리 위로 암컷 딱새가 바삐 맴돈다. 이 나무 저 나무 옮겨 다니며 뭐라뭐라 재잘거린다. 말이 많은 걸 보니 오전에 이소한 새끼들의 어미가 분명하다. 주위에 아기들이 있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풀숲에 아기새들이 팔짝팔짝, 포르릉 포르릉 날 듯이 뛰어다니며 삐익삐익 소리치고 있다. 사랑스러워라!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딱새 어미가 새끼들 머리 위를 이리저리 날며 격려한다. 내 귀엔 어미 소리가 이렇게 들린다. ‘힘내라, 날아라, 조금만 더, 그래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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