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구리의 죽음
<연재를 시작하며>
20여 년 전 도시를 떠난 후 나는 견고한 콘크리트 세상을 벗어나 물과 흙과 숲이라는 무르고 유동적인 것들에 안겨 살았다. 거기 깃든 이웃 생명체들과 숱하게 마주치며 내가 동물계의 일부라는 걸 실감했다. 살아 있음의 짧음과 아름다움에 전율했고, 삶을 떠받치는 흔한 죽음들에 무릎 꿇었다.
나는 이제껏 극히 한정적이고 비좁고 그다지 중요치 않은 영역을 맴돌며 살아왔다. 남은 시간은 배우지 못한 세계로 들어가 내가 알지 못했던 존재와 눈 맞추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새와 곤충, 개구리와 뱀, 너구리와 고라니 같은 비인간 생명체의 눈길을 얻고 싶고, 그들의 생존과 소멸의 순리를 들여다보고 싶다. 본성과는 무관하게 편견과 오해를 뒤집어쓰고 인간에 의해 혐오와 박멸의 대상이 되어버린 파리나 쥐, 진드기 이야기도 하게 될지 모르겠다.
구체적 리스트는 미정이며, 연말까지 월 2회 연재 예정이다. 김혜형
겨울 한낮, 햇살 내리쬐는 테라스 앞에 웬 잿빛 짐승이 엎드려 있다. 너구리다. 온몸이 딱지로 뒤덮여 갑옷을 입은 것 같다. 야행성 동물인 너구리가 환한 대낮에, 더구나 동면에 들어 있어야 할 한겨울에 사람 사는 집으로 내려오다니…. 어떤 상황인지 바로 짐작이 간다.
고통에 시달리다 죽을 자리 찾아온 야생동물
수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등과 옆구리 피부가 진흙처럼 엉겨 굳어진 너구리가 우리 마당에 기어들었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느릿느릿 움직였는데, 무심하고 무방비했다. 집 데크 아래로 스며들듯 들어가더니 얼마 후 어둑한 구석에서 죽었다. 가까이에서 야생 너구리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너구리가 앓고 있는 병은 개선충증이라는 악성 피부병이다. 개선충은 옴진드기라고도 하는데, 동물의 피부에 굴을 파고 들어가 번식하는 기생충이다. 몸길이가 0.2~0.4mm로 아주 작아 맨눈으론 알아채기 어렵다. 개선충에 감염된 동물은 극심한 가려움증을 겪게 되는데 털이 빠지고 피부가 갈라져 몸뚱이가 염증과 진물로 뒤덮인다. 고통이 심해 먹이 활동도 못 하고 쇠약해져서 죽음에 이른다. 너구리는 개선충에 특히 취약하다. 바위틈이나 나무 구멍에 가족 단위로 모여 사는 데다 배설도 같은 자리에 하는 습성이 있어 한 마리만 감염돼도 집단 전체로 번지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여름, 우리 삽살개 또리가 뒷발로 목과 배 부위를 심하게 긁어댔다. 모기 탓인가 싶어 모기향과 포충기를 놓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참진드기가 붙었나 하고 털을 샅샅이 뒤졌지만 진드기도 없었다. 참진드기가 활동을 시작하는 초봄에 진드기 방지 목걸이를 채워준 덕이었다. 가려움증의 원인을 몰라 애태우다 결국 동물병원에 데려가서야 옴진드기 감염이란 걸 알았다. 옴진드기는 야생 포유류에 기생하는데 바깥 생활을 하는 개와 고양이도 예외가 아니라 했다. 인수공통 전염병이라 사람한테도 옮는다는데 진드기 찾는다고 개털을 뒤진 내가 무사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또리는 처방받은 독한 약물에 몸을 담그는 목욕을 하고서야 겨우 개선충증에서 벗어났다.
데크 앞에 엎드려 있던 너구리가 슬그머니 일어난다. 또리가 너구리를 발견하고 천천히 다가간다. 너구리의 피부병이 또리한테 옮을까 봐 내 발걸음이 빨라진다. 코를 킁킁대던 또리가 갑자기 크르릉! 너구리를 향해 무섭게 돌진한다. 캬악! 너구리가 비명을 지른다. “안 돼!” 다급히 또리의 줄을 붙들었다. 흥분한 또리가 으르렁거린다.
퉁퉁 부은 눈자위 속 반짝이는 눈알이 휘저어 놓은 슬픔
붙잡은 또리 줄을 놓을 수가 없다. 소리쳐 옆사람을 불러 또리를 붙들고 있으라 한 후, 헛간으로 달려가 자루가 긴 선호미를 가져왔다. 너구리가 느릿느릿 개집 앞으로 가더니 털썩 주저앉는다. 일단 또리로부터 너구리를 멀리 떨어뜨려야지. 선호미로 툭툭 건드려도 너구리는 꿈쩍도 안 한다. 반달형 호미 날을 너구리 몸 밑에 넣어 슬슬 당기니 엎드린 채 무력하게 끌려온다. 텃밭 쪽으로 끌어당겨 또리의 시야에서 멀어지게 했다.
잠시 엎드려 있던 너구리가 비틀비틀 일어나더니 야외수도로 간다. 물을 찾는 듯 코를 움찔거리기에 얼른 대야에 물을 담아 코앞에 대주었다. 망설이지 않고 핥아먹는다. 플라스틱 컨테이너를 가져와 너구리 옆에 기울이니 순순히 들어가 엎드린다. 컨테이너째 번쩍 들어서 뒤뜰로 옮겼다.
개 사료를 주니 냄새만 맡을 뿐 먹지 않는다. 물그릇을 내미니 주둥이를 대고 한참을 할짝거린다. 목이 탔던 게다. 물을 다 마신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극심한 피부염으로 눈이 감겨 눈먼 너구린 줄 알았는데, 녀석의 퉁퉁 부은 눈자위 속에서 반짝이는 눈알을 보았다. 그 짧은 눈맞춤이 잠잠하던 슬픔을 휘저어 놓았다.
간절하게 붙잡고 싶었으나 놓쳐버린 사람. 허공에 몸을 던지기 직전 그의 눈에 비친 마지막 빛이 이랬을까. 이생의 미련을 놓은 후 바라본 지상의 색채는 적막했을까. 무용한 희망과 담담한 기억 사이를 걸어간 그의 심정을 짐작하기도 아득하다. 애도는 남겨진 이들의 몫, 떠날 때를 몰라 아직 이생에 있는, 결말이 유보된 이들의 것.
한 시간 남짓 지났을까. 너구리의 몸에 희미한 숨만 갇혀 있는 듯하다. 고통은 고요해 보인다. 취약을 들키면 생존에 치명적이니 본능이 묵묵을 지시했겠지. 야생은 질병과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제 상처를 제 혀로 핥으며 감내하고 분투할 뿐이다. 물그릇에 입을 대어 마지막으로 목을 축인 너구리가 서서히 옆으로 누웠다. 쓰러진다기보다 기울어진다는 느낌이었다. 열린 눈꺼풀 사이로 반짝이던 빛이 까무룩 사그라들었다. 입은 조금 벌린 채였다.
죽음에 속수무책인 유기체 운명 되새기게 한 반나절 인연
천수를 누리는 삶이란 게 야생에 가능할까. 병에 걸려 죽든 천적에 먹혀 죽든 야생에선 다 자연사다. 그들은 눈에 띄지 않게 죽으며 누구의 애도도 받지 않는다. 야생과 격절한 인간의 문명은 질병을 다루고 죽음을 지체시키는 위력을 키워왔지만, 죽음을 향해 속수무책 나아가는 건 모든 유기체의 정해진 운명이다.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너구리를 묻었다. 눕혀놓고 보니 수컷이었다. 개가 세 마리나 있는 집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와 내 앞에서 눈을 감다니. 장사 지내 달라고 온 건가. 고작 반나절 인연인데도 아픈 개 잃은 듯 가슴이 욱신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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