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겨울 새들
마을 초입 오래된 감나무에 붉은 감들이 초파일 등불처럼 매달려 있다. 하룻밤 된서리에 잎은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마다 알맹이만 선연하다. 주인 잃은 감나무에 홍시 사태가 났다. 굽은 허리로 오르락내리락 알뜰히 거두던 어른이 안 계시니 직박구리랑 어치, 물까치 떼가 살판났다. 해마다 첫서리 후 작대기 들고 붉은 감을 따시던 어른, 저 아까운 감 못 잊어 어찌 돌아가셨을까. 방치된 감나무에서 지상에 없는 이를 떠올리는 건 사람의 쓸쓸함이지만, 탐스러운 과육으로 새떼를 유혹하는 건 나무의 응당한 번식 전략이다.
입에 넣는 즐거움 대신 선택한 눈호강과 휴식의 여유
지난 가을 앞마당의 대봉감을 딸 때 까치밥 몇 개 남겨두었다. 손 안 닿는 높은 가지의 감이야 으레 새들 몫이지만, 딸 수 있는 감인데도 따지 않은 건 초겨울 새들이 홍시 쪼는 걸 보고 싶어서다. 입에 넣는 대신 눈에 담기로 한다. 눈의 즐거움도 큰 즐거움이니.
고사리밭 주변의 고종시, 월하시, 칠봉파시는 따지 않았다. 작년까진 알뜰히 거둬 테라스에 주렁주렁 곶감 주렴을 만들었는데 이제 욕심부리지 않기로 한다. 밭작물 갈무리부터 뒤늦은 김장까지, 늘어선 일거리에 곶감 깎을 손이 없다. 곶감을 팔아 생활비를 버는 것도 아니고 다만 버려지는 게 아까워 일감을 삼다 보니 시나브로 몸이 축난다. 작년에 만들었던 곶감도 이집 저집 다 나눠주고 정작 내 입에는 몇 개 넣지 않았다. 단 것에 그다지 손이 가지 않는 것도 근래의 변화이거니와 이젠 한없이 몸을 혹사할 나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감을 덜 딴다고 손해날 것도 없다. 나로선 한계가 뚜렷한 인생에 노동 시간을 줄여 휴식을 채우는 것이고, 뜰에 찾아오는 배고픈 새들에겐 생존할 가능성이 느는 것이니 세상 전체로 보면 마이너스란 없다. 새들이 홍시를 쪼아먹고 나면 물컹해져 떨어진 잔해는 딱정벌레와 벌과 개미들의 먹잇감이 된다. 내가 먹느냐, 남이 먹느냐, 그 경계만 지우면 된다.
‘내 방’에서 벗어나는 것 보다 훨씬 쉬운 새들 먹이주기
이광이 선생의 책 『행복은 발가락 사이로』에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이야기가 나온다. 돌아가신 부모의 빚을 갚아야 하는 자녀들이 있다. 부유한 첫째는 1/n 균등 분담을 주장하고 가난한 막내는 경제력 대비 차등 분담을 주장한다. 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합리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만약 이들이 ‘무지의 베일’에 들어간다면? 자신이 첫째인지 막내인지 모른다면? 가장 불리한 처지에 놓인 막내의 입장에서 합의하는 것이 위험 부담을 줄이는 합리적 선택이 될 것이다. 자기 이해관계에 영향을 주는 정보들이 장막에 가려진 상태에서는 ‘누군가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대신 ‘누군가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합의를 하게 된다. 그 ‘누군가’가 ‘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분배의 정의에 맞을까?… 제삼자에게 맡기고 당사자는 당사자에서 벗어나면 된다.” - 이광이, 『행복은 발가락 사이로』에서
저자는 롤스의 정치철학에서 불교의 무아(無我)로 한 걸음 훌쩍 이동한다. 글 맵시가 선승의 흰 고무신처럼 간결하고 가볍다.
“고정불변의 실체로서 나는 없다는 어려운 말 말고, 그냥 나를 잊으면 무아다. 나는 내 방에서 도저히 문제를 풀 수 없다. 모두 내 것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 방에서 나와 무지의 장막이 쳐진 저 방으로 들어가면 문제는 풀린다.” - 이광이, 앞의 책
새들에게 홍시를 허하는 건 ‘내 것’들로 둘러싸인 ‘내 방’을 벗어나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러나 누가 허하고, 누가 주고, 누가 받는다는 건가. 저 감이 나의 감인지, 새의 감인지, 나무의 감인지 어찌 아는가. 씨앗이 떨어져 땅에 뿌리내릴 때 흙의 습기와 양분에 소유권을 물을 수 없고, 꽃과 열매와 딱정벌레와 새들은 모두 이 행성의 생명계에 속한다. ‘내 것’이라는 확신은 어쩌면 거대한 착각일지도 모른다.
직박구리가 기다리는 건 나일까, 내가 주는 홍시일까
아침마다 직박구리 한 마리 날아와 앞뜰 감나무 가지에 앉는다. 감나무는 그의 지정석이다. 한번 자리 잡으면 한 시간 정도는 붙박이다. 처음엔 ‘직박구리가 왔네.’ 하며 무심히 넘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영화 <매트릭스> 속 고양이가 부르르 몸을 털 듯, 같은 풍경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아챘다. 아, 녀석이 뭔가를 기다리는구나!
그가 기다리는 건 나다. 아니 홍시다. 지난 가을에 따서 저장고에 넣어둔 감이 푹 익었기에 직박구리랑 물까치가 좋아하겠다 싶어 뜰에 홍시 밥상을 차려준 지 두어 주 되었다. 매일 규칙적으로 준 건 아니고 어쩌다 생각날 때면 던져줬는데 이렇게 기억하고 기대할 줄이야.
창밖에 배고픈 새가 기다리는데 느긋하게 아침을 먹을 수가 없다. 신발을 꿰고 뜰에 내려서니 직박구리가 날아갈 생각도 않고 빤히 나를 내려다본다. 잔디밭에 홍시 몇 개 놓아두고 돌아서자 기다렸다는 듯 날개를 펼쳐 홍시 위로 내려앉는다. 직박구리가 홍시를 쪼아 먹는 동안 삐삐! 삐삐! 곤줄박이들이 사방에서 재촉한다. 땅콩 한 줌 모이통에 올려놓으니 포르릉~ 포르릉~ 곤줄박이와 박새가 번갈아 땅콩을 물고 달아난다. 곤줄박이, 박새, 딱새 같은 작은 새들은 견과류에 열광한다. 마당의 홍시는 직박구리, 어치, 까치처럼 몸집 큰 새들 차지다. 특히 물까치는 진정한 홍시 종결자다.
이 불의한 시대, 저 물까치 떼처럼 맹렬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저 멀리 들판에서 물까치 떼가 요란하게 날아온다. 수십 마리가 순식간에 감나무를 장악하더니 뜰의 홍시 위로 앞다투어 내려온다. 물까치는 두건을 쓴 듯한 새까만 머리, 물빛을 닮은 연푸른 몸, 탄력 있게 까딱이는 긴 꼬리가 아름다운 새다. 연미복을 입은 신사처럼 외양은 멋지지만 새 소리는 깨액- 깨애액- 탁하고 소란스럽다. 나무 열매, 곤충, 작은 동물을 먹잇감으로 삼는데 잡식성이라 퇴비장의 음식물 쓰레기도 뒤진다. 마을 골짜기를 영역 삼아 몰려다니는 물까치들이 탁 트인 우리 마당의 홍시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물까치 집단은 대가족이다. 짝짓기 단위는 일부일처지만 형제와 친척들이 가족군을 이루어 공동의 영역을 지킨다. 어린 새끼를 보살피는 일도 공동으로 한다. 물까치의 자신감은 떼의 힘에서 나온다. 앞마당의 홍시에 물까치 떼가 날아오면 직박구리도 눈치 보며 쫓겨가고 덩치 큰 까치도 도망간다. 물까치 떼는 겁이 없고 저돌적이다. 사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듯하다. 내가 뜰에 나타나면 나무 위로 잠깐 피했다가 내가 집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시끌벅적 내려온다. 홍시 몇 개 없어지는 건 순식간이다. 물까치가 지나간 자리엔 마른 감꼭지만 뒹군다.
나도 저들처럼 맹렬해지고 싶다. 소수의 불의한 세력이 공동체를 위기로 몰아넣었을 때 우리가 갈망했던 힘이 저런 맹렬함이었으니. 지난 겨울 우리는 얼마나 간절했던가. 얼마나 열렬했던가. 얼어붙은 밤을 녹여 새벽을 열었던 힘, 폭력과 파괴에 맞서 평화를 지켜낸 힘, 무도한 역행을 깨뜨려 순리의 봄을 이끈 광장의 힘, 압도적인 떼의 힘이 벅차게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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