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수상 앞두고 스톡홀름서 첫 기자회견
‘소년이 온다’ 속 쿠데타 재연돼 세계이목 집중
“광주 때와 다른 건 모든 상황 모두가 지켜본 것”
진실은 강압적으로 눌러도 눌러지지 않는다
‘채식주의자’, 무엇이 정상이고 광기인지 묻는 것
“희망이 있을 거라고 희망하는 것도 희망”
“‘소년이 온다’를 쓰기 위해 1979년 말부터 진행됐던 계엄 상황에 관해 공부했는데, 2024년에 다시 계엄 상황이 전개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바라건대 무력이나 강압으로 언로를 막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과거의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국제적 이목이 쏠린 노벨 수상작가 첫 공식회견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한강이 6일 스웨덴 스톡홀름의 노벨상박물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이번 주 벌어진 한국의 정치적 혼란 상황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어떤 한 주였나?”라는 첫 질문에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10일의 노벨 문학상 수상식을 앞두고 열린 이날 기자회견은 지난 10월 한강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후 처음 나선 공식 회견이었다. 지난 3일 발생한 뒤 진행중인 ‘비상계엄 사태’와 맞물린 데다, 노벨상 수상 근거가 된 작가의 주요 작품들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1940년대 중반 제주 4.3 등 비상사태 속의 비극적 유혈폭력 사건들을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공식 발언에 국제적인 이목이 쏠렸다.
“광주 때와 다른 건 모든 상황을 모두가 지켜본 것”
그는 그 질문에 대해 이런 말도 했다.
“2024년 겨울의 상황이 다른 점은 모든 상황이 생중계돼서 모두가 지켜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맨손으로 무장한 군인들을 껴안으며 제지하려고 하는 모습도 보았고, 총을 들고 다가오는 군인들 앞에서 버텨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았다. 마지막에 군인들이 물러갈 때는 마치 아들에게 하듯이 '잘 가'라고 소리치는 모습도 보았다. 그분들의 진심과 용기가 느껴졌던 순간이었다.
젊은 경찰분들, 군인 분들의 태도도 인상 깊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판단하려고 하고, 내적 충돌을 느끼면서 최대한 소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명령을 내린 사람들 입장에선 소극적이었겠지만 보편적인 가치의 관점에서 본다면 생각하고 판단하고 고통을 느끼면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던 적극적인 행위였다고 생각한다.”(연합뉴스 12월 6일)
문학은 여분의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
그 다음 질문자도 “현재 한국은 극단적인 혼란에 처해 있다”며 “어려운 상황 속 문학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문학이란 것은 끊임없이 타인의 내면으로 들어가고, 그러는 과정에서 자기 내면에 깊게 파고 들어가는 행위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런 행위를 반복하면서 내적인 힘이 생긴다. 어떤 갑작스러운 상황이 왔을 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최선을 다해서 결정하기 위해 애쓸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문학은 언제나 우리에게 여분의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이다.”
진실은 강압적으로 눌러도 눌러지지 않는다
그 다음 질문 역시 지금의 위태로운 한국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몇 년 전 많은 작가가 한국 정부가 만든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언론의 자유 혹은 작가들의 표현의 자유가 우려할 만한 상황인가?”
“정확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몰라서 상황을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언어에는 강압적으로 그걸 눌러서 길을 막으려 한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다고 해도 계속해서 말해지는 어떤 진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언어의 힘은 변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닛케이, 윤 씨의 종북 색깔몰이에 주목
한강의 이날 기자회견 내용을 전한 <일본경제신문>(닛케이) 기사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소년이 온다’가 광주항쟁 참사를 소재로 삼고 있는 점을 거론하면서 “당시에도 계엄령이 발령됐고, 사건은 ‘북한의 선동을 받은 폭동’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이는 그 기사를 쓴 기자가 지난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씨의 담화문 속 유사 구절들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담화문에서 윤 씨는 야당의 특검 및 탄핵 추진과 예산안 삭감 등을 “내란을 획책하는 명백한 반국가 행위”요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라 비난하면서, 국회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괴물”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이라고 원색적인 색깔공격을 퍼부었다. 1980년의 유혈 참사를 저지른 신군부세력이 선전한 “북한 선동을 받은 폭동”과 윤 씨가 말한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이란 색깔공세가 44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거의 동일하게 되풀이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 그 기자는 경악했을 것이다.
<아사히신문>도 이날 기자회견 소식을 전하면서 “한국 작가 한강, 비상계엄에 충격”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 신문은 ‘소년이 온다’ 외에, 영어로 번역돼 맨부커상 국제부문 상을 받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 노벨 문학상 수상의 계기가 된 ‘채식주의자’와 제주 4.3 비극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해서도 썼다.
희망이 있을 거라고 희망하는 것도 희망
마지막 질문 “처음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 축하할 기분이 아니었다고 했는데 오늘 기분은?”에 대해 한강은 “축하하고 싶지 않다는 게 아니라, 축하했는데 좀 조용히 한 것”이라고 했다. “제 가족이 너무 크게 잔치하겠다고 해서 그러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는데 그게 와전돼 축하를 안 하고 싶다고 전해져 좀 당황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요즘은 이 세계 속에서 살아가며 많은 질문을 하게 되는 시기라고 생각된다. 때로는 '희망이 있나'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근데 몇 달 전부터, 아니면 그 전부터일지도 모르겠는데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는 것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 마지막 부분은 중국 전근대의 낙후와 부조리를 비판하면서 정치적 억압에 저항한 문호 루쉰의 단편 ‘고향’ 끝 부분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희망이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채식주의자’, 무엇이 정상이고 광기인지에 대한 질문
이날 기자회견은 지금 위급해 보이는 한국상황 때문에 이처럼 그에 빗댄 질문들이 많이 쏟아졌지만, 본령인 작가의 문학과 그에 대한 생각도 진지하게 다뤄졌다. 그의 주요 작품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작가 본인의 생각이 간결하고 정제된 형태로 제시됐다. 그의 작품에 대한 일부 오해나 이념적 공세에 대해 언급한 것도 관심을 끌었다.
연합뉴스가 전한 기자회견 일문일답을 토대로 그것을 정리한다.
'채식주의자'의 주된 메시지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장면은 가족들이 (고기를 안 먹겠다는) 영혜에게 억지로 고기를 먹이는 장면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세 파트에 반복해서 썼다. 정말 이상한 장면이지 않나.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광기인가에 대한 질문도 하고 싶었다. 영혜의 우주 속에서 영혜는 어쩌면 아주 제정신인 존재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물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인류의 일원이 더 이상 되지 않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가는 인물이다.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이 세상의 폭력이 더 미쳐있을 수도 있는 것,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유해 도서’ 낙인은 “가슴아픈 일”
한국에서 ‘채식주의자’는 학생들이 읽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채식주의자’는 질문으로 가득한 소설이다. 제목은 주인공을 지칭하는데 주인공은 스스로를 채식주의자로 명명한 적이 없다. 제목부터 아이러니가 들어있는 소설이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가 이야기할 때 문장마다 아이러니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런 걸 생각하면서 읽어주시면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채식주의자’를 고통스럽게 공감하면서 읽어주는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오해도 많이 받고 있는데 그게 이 책의 운명이란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 ‘유해 도서’라는 낙인을 찍고, 도서관에서 폐기하는 것은 책을 쓴 사람으로서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한강은 “‘채식주의자’는 2019년 스페인에서 고등학생들이 주는 상을 받은 적이 있다”면서 “(스페인의) 고등학교 문학 도서 선생님들이 추천 도서 목록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읽히고. 학생들이 오랜 시간 토론해서 그 책이 선정됐다”는 얘기도 했다.
고향인 광주가 작품과 인생에 끼친 영향은?
“제가 1970년 11월 광주에서 태어났고 1980년 1월 서울에 올라왔으니 약 9년 2개월간 광주에서 살았고, 나머지 40여년은 서울에서 지냈다. 저는 광주 사람이기도 하고 서울 사람이기도 하다.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하기 어려운데 고향이란 곳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광주는 ‘소년이 온다’를 썼기 때문에 제게 중요한 장소이자 이름이다. 그리고 ‘소년이 온다’를 쓰는 과정이 저를 많이 변화시켰다. 제게 굉장히 중요한 책이기 때문에 광주는 제게 의미가 있다.”
노벨문학상은 작가 개인이 아닌 문학에 주는 상
한국 문학계에서 ‘제2의 한강’이 나오려면?
“문학을 잘 교육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어릴 때부터 1년에 최소한 문학 작품을 학교에서 서너권은 읽고 그걸 토론하고 다각도로 이야기 나누면 좋겠다. 문학 작품 읽는 근육을 기를 수 있게, 문학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게. 예를 들어 문학은 장르별로 읽는 독법이 다르다. 에세이, 시, 희곡, 소설 등 각자 다른 방법을 음미하고 다르게 읽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내면과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 보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을 어릴 때부터 하면 좋을 것 같다. 특히 입시 때문에 멈추지 않고 중고등학교를 통과하며 그런 교육을 한다면 독법도 풍요로워질 것 같다.”
한국의 첫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 상은 문학에 주는 것이고 그것을 이번에 제가 받은 것”이라면서, 수상 직후엔 쏟아진 관심이 부담스러웠지만 “(이제는) 부담을 느끼지 않고, 글을 쓸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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