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위 국감서 근현대문화유산 임시 지정 언급 나와
문화유산 철거 등 긴급 사유 발생하면 직권 지정 가능
숙의 공론화 길 열리나…청장 직권 문화유산 지정 주목
문화유산 임시 지정되면 최소 6개월 일방적 철거 못해
시민사회, 종교계, 야당까지 나서서 철거 반대 목소리
고심 빠진 동두천시 당국…숙의 과정 거쳐 결정해야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옛 문화재청장)이 10일 여성 인권 침해의 상징 장소인 '동두천 옛 성병 관리소'가 근현대 문화유산으로 임시 지정될 수 있도록 지방자치단체(동두천시)에 강력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동두천시 당국의 일방적인 철거 시도를 막고, 역사 현장 보존을 위한 숙의 공론화 절차를 거칠 수 있는 길이 열릴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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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이기헌 의원은 이날 오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동두천 옛 성병 관리소와 관련해 "여성들에게 가한 국가 폭력의 상징적 시설이기 때문에 현대 문화유산 가치가 충분히 있다"면서 "국가유산청에서 긴급하게 조사하고 근현대문화유산으로 임시 지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의원은 "문화유산 임시 지정이 끝나고 심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일단 임시 지정으로 (강제) 철거를 막아달라는 국민들의 요청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거듭 최 청장에게 "이 문제에 대해 검토를 요청드린다"고 말했다.
이에 최 청장은 "시민단체가 (역사 보존에 대해) 주장하신 내용을 잘 파악하고 있다"면서, "동두천시에 대해 다시 한번 강력하게 요청하겠다"고 답했다.
근현대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근현대문화유산법) 제 10조에 따르면 국가유산청장은 근현대문화유산의 가치가 훼손될 우려가 있어 긴급한 예방 조치가 필요하거나 위원회의 심의를 거칠 여유가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임시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할 수 있다.
국가유산청에서 직권으로 임시 지정을 한다면 시의 일방적인 철거 시도를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화유산으로 임시 지정되면 6개월간 효력을 갖는다. 최 청장이 임시 지정과 관련해 동두천 시 당국에 강력 요청하겠다고 밝힌 만큼 상황에 따라 직권 상정도 검토될 것으로 보인다.
이 의원이 언급한 경기 동두천시 소요산 인근 옛 성병 관리소는 군사독재 시절인 1973년 기지촌 정화 사업 차원에서 지어진 이른바 '낙검자(성병 검사 탈락자) 수용소'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미군 부대 인근에 성병 관리소를 짓고 사실상 성매매를 합법화했는데, 현재 모두 철거되고 동두천에만 유일하게 건물이 남아있다.
이곳은 한국 현대사의 '아픈 부분'으로도 불린다. 당시 관변 단체나 미군 헌병이 성병에 걸린 기지촌 여성을 잡아가뒀고, 이 과정에서 성병에 걸리지 않은 여성들도 강제로 가두는 등 인권 유린이 만연했다. 강제로 끌려온 여성들은 페니실린 투약으로 죽거나, 도망치기 위해 건물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잃기도 했다.
성병 관리소를 동물원 원숭이에 비유해 '몽키 하우스'로 부른 점은 인권 유린이 심각했음을 반영한다.
대법원은 2022년 성병 관리소 운영이 정부 주도의 국가폭력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며, 동두천 성병 관리소는 국가 폭력의 증거가 됐다. 그러나 동두천시가 최근 관광 개발을 목적으로 철거하겠다고 나서면서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시민단체 쪽은 성병 관리소를 여성인권박물관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지만, 동두천시는 임시 주차장을 만들고 관광 사업에 활용하겠다는 입장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공론화 절차도 없었다는 점이다. 철거를 반대하는 시민들은 공론 조사 등 숙의 과정을 거쳐 철거로 결정하더라도 기록관 설립 등 후대에 역사 교훈을 남길 방안을 강구하자는 입장이지만, 시에서 공청회도 없이 일방적으로 철거를 밀어붙이면서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지난 8일에는 굴삭기를 동원해 시민들을 위협하며 철거를 시도하기도 했다.
'관광 개발 대 역사 현장 보존'이라는 명제가 거세게 부딪히면서 시민사회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현재 국회동의청원에는 동두천 성병관리소 철거를 중단하고 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과와 배상을 해야 한다는 내용의 청원이 국회 답변 기준인 5만 명을 넘었고, 경기도청에는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를 도문화유산으로 임시 지정해달라는 청원이 도지사 답변 기준인 1만 명을 넘었다.
종교계에서도 철거를 반대하는 목소리에 힘을 싣고 있다. 천주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소속 신부들은 이날 오전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앞에서 기억·위로 미사를 봉헌하고 "장소가 없어지면 기억이 없어지는 것"이라며, 동두천시의 일방적인 철거를 반대했다. 촛불교회, 옥바라지선교센터 등 개신교계에서도 오는 11일 철거에 반대하는 저녁 기도회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철거를 반대하는 시민단체와 정당의 목소리도 더욱 커지고 있다.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는 이날 성명을 내고 "동두천시가 소요산 입구에 위치하는 옛 성병관리소 건물을 철거하고 임시주차장으로 만들기 위한 공사를 밀어붙이고 있다. 피해자와 주민단체들의 면담 요청과 공론화 제안에도 일절 응답하지 않고 있다"면서 "동두천시는 철거를 중단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참여연대는 "철거를 서두르기 전에 최소한 '몽키 하우스'라는 닉네임을 가진 이 건물에서 인간의 존엄이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심지어 목숨마저 잃어야 했던 피해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반영해야 한다. 시민사회단체들의 요구인 공론조사도 수용해야 한다"며 "동두천 경제발전을 내세우는 시 당국은 '국가안보'와 '동두천 경제'를 위해 희생당한 이들의 희생과 상처 위에 당신들이 서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민주당 전국여성위원회(위원장 이재정)도 나섰다. 여성위는 성명을 내고 "동두천 옛 성병 관리소는 현재 전 세계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병 관리소로 여성 인권 침해의 아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보존가치가 높은 역사적 장소"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두천시는 철거를 강행하고, 철거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농성 중인 현장에 굴삭기를 들이대는 등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어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이어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다시는 이러한 인권 침해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면서 "미군 위안부 문제는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의 '여성에 대한 폭력'이며, 고문방지협약의 '고문 및 학대행위'로 볼 수 있으므로,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 인권 규범에 따라서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권리 구제를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여성위는 "동두천시는 옛 성병관리소에 대한 철거 강행을 즉시 중단하고, 정부 또한 국가폭력의 책임자로서 그에 상응하는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며 "민주당은 기지촌 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서 지난 21대 국회에서 폐기된 '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 및 피해자 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정 논의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강조했다.
각계에서 철거를 반대하고 숙의 공론화 절차를 촉구하면서, 시 당국도 고심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시민단체 등에 따르면 시는 당초 이날 오전 철거 절차에 돌입할 예정이었지만, 시민사회와 종교계, 야당까지 나서면서 과장급 이상 긴급회의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시에서도 철거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 힘든 상황이 되면서, 시민사회와 출구 전략을 모색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다만 역사 유산으로 보존할지 여부는 전적으로 지자체장의 의지에 담긴 만큼, 주민들의 의사 전달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만큼 더더욱 시민단체들이 요구하는 공론조사가 요구된다.
최 청장은 국감에서 임시 지정과 관련, 동두천시에 강력하게 요구하겠다면서도 "동두천시가 이미 매입하고 관광 확대사업을 발표하면서 등록에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고, 청에서 임시로 (문화유산으로) 등록하더라도 6개월 이후에 (지자체가) 등록을 하지 않으면 다시 취소가 되어버린다"며 "지자체의 의지가 없다면 정말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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