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권자는 없고 경찰, 공무원, 찬반 주민들만 아우성
"숙의 없이 결정된 성병 관리소 철거…공론조사 등 요구"
"시장 면담도 전혀 없어…철거 유예하고 공개 면담하자"
대형 굴삭기 강제 진입에 철거 시도 현장 한때 아수라장
현장서 협상 하자던 동두천 공무원, 언론 핑계대며 잠적
"동두천 시민만이 아닌 국민들 문제, 피해자 인권 문제"
"어떤 방안이 도움이 되는지 공론 조사해서 결정해야"
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 폭력의 증거인 동두천 옛 '성병 관리소'를 두고 관광 개발을 위해 철거해야 한다는 동두천시와 역사 현장을 보존해야 한다는 시민사회가 첨예하게 부딪히고 있는 가운데, 8일 첫 번째 철거 시도가 이뤄졌다.☞관련 기사
대형 굴삭기가 철거를 위해 강제 진입하면서 한때 아찔한 상황이 벌어졌으나, 다행히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현장에선 동두천시와 시민단체, 반대 주민 등이 뒤섞여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민단체는 실랑이 끝에 현장에서 박형덕 동두천시장과 공개 면담, 철거 유예, 공론조사 실시 등을 담은 요구 사항을 전달하고 시와 협상을 하려고 했으나, 시 관계자들이 회피했다. 한동안 역사 현장 철거와 보존을 둘러싸고 대치 국면이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날 오전 7시쯤부터 경기 동두천시 소요산 소형주차장, 옛 성병관리소 앞에는 60여 개 시민단체가 참여한 '동두천 옛 성병 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관계자 20여 명이 시의 철거 시도를 반대하는 연좌 농성을 시작했다.
앞서 공대위는 전날 오후 6시 30분부터 이 자리에서 촛불문화제를 열고, 기습 철거 시도에 대비해 차량과 텐트 등으로 진입로를 막고 밤새 자리를 지켰다. 공대위 소속 활동가 10여 명이 텐트에서 밤샘 농성을 했으며, 유호준 경기도의원(더불어민주당)도 동참했다.
철거 시도는 오전 이른 시간부터 진행됐다. 오전 6시 50분쯤 경찰 병력 20여 명을 태운 기동대 버스가 소요산 입구에 들어왔고, 이어 오전 7시 30분쯤 대형 굴삭기가 진입했다. 동두천시 관광휴양과장 등 분홍색 조끼를 입은 시 관계자들도 도착했다.
공대위 쪽과 관광휴양과장은 한 차례 논의를 했으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공대위 쪽은 "시장이 대화나 논의를 했느냐, 만날 수 없다만 반복했다"고 말했고, 시 쪽은 "철거되면 창틀이라도 주라고 한 것은 철거를 인정한 것 아니냐"고 했다.
이러한 가운데, 철거 찬성 단체인 동두천시지역발전범시민대책위원회(범대위) 소속 회원들도 현장에 와서 "미친X 참 많다" "고발해버려 이 ○○들, △△하고 있어" 등 욕설을 하며 공대위 쪽을 자극했다. 범대위 회원은 유 의원과 취재하는 기자들을 향해 자신들이 65년 이상 동두천에서 살았다며 "외지 사람이 왜 철거를 방해하느냐"고도 했다.
이와 함께 용역업체 굴삭기가 강제로 진입을 시도하면서 경찰과 공무원, 공대위, 범대위 등이 뒤섞여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다. 공대위 관계자들이 몸으로 굴삭기를 막자, 동두천시 관광휴양과장은 "전국에서 다 철거했는데 왜 동두천만 하지 못하게 하느냐"고 고성을 질렀다.
동두천시가 철거를 시도하고 있는 소요산 인근 옛 성병 관리소는 군사독재 시절인 1973년 기지촌 정화 사업 차원에서 지어진 이른바 '낙검자 수용소'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미군 부대 인근에 성병 관리소를 지었는데, 현재 모두 철거되고 동두천에만 유일하게 건물이 남아있다. 지금도 소요산 인근에는 미군 부대인 캠프 케이시가 있다.
이곳은 한국 현대사의 아픈 부분이다. 성병 치료소에 끌려온 피해자들 증언에 따르면 당시 관변 단체나 미군 헌병이 성병에 걸린 기지촌 여성을 잡아가뒀고, 이 과정에서 성병에 걸리지 않은 여성들도 강제로 끌려오는 등 인권 유린이 만연했다. 성병 관리소를 동물원 원숭이에 비유해 '몽키 하우스'로 부른 점은 당시 상황을 짐작케한다.
또 강제로 끌려온 여성들은 페니실린 강제 투약으로 죽거나, 도망치기 위해 건물 2층이나 옥상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잃기도 했다. 대법원은 지난 2022년 성병 관리소 운영이 정부 주도의 국가폭력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유일하게 남은 동두천 성병 관리소는 국가 폭력의 중요한 증거가 됐다.
그러나 지난해 동두천시가 관광개발을 위해 이곳을 철거하겠다고 밝히면서 갈등이 불거졌다. 공대위 쪽은 성병 관리소를 여성인권박물관으로 탈바꿈하는 등 아픈 역사를 후대에 남기자고 주장하고 있지만, 동두천시와 반대 단체는 호텔, 상가 등 관광 개발을 확대하자는 입장이다.
이날도 현장에서 공대위와 시가 팽팽하게 맞서면서, 경찰 정보관의 중재로 협상을 하기로 했다.
공대위 쪽은 협상에 앞서 △시장과의 공개 면담 △유엔 인권위원회 진정, 국회 청원, 경기도지사 청원 답변이 나올 때까지 철거 유예 △시민 공론조사 실시 등 3가지 요구 사항을 확정했다.
공대위 최현진 집행위원장은 요구사항에 대해 "계속해서 시장과 면담을 요구했는데 단 한 번도 제대로 응한 적이 없다"며 "가능하면 소요산 농성장에 와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여의치 않다고 하면 (제3의 장소를) 고민하겠지만, 현장에서 공개로 만나는 것을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철거 유예에 대해선 "공대위가 유엔 인권위원회에 진정했고, 국회청원도 답변 기준인 5만 명을 넘었고, 경기도청 청원도 답변 기준인 1만명을 넘었다"며 "인권위는 긴급으로 진정을 넣고, 국회는 90일 이내, 경기도는 30일 이내 답변을 해야 하므로 기관들에서 답변이 올 때까지는 철거를 유예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론조사에 대해선 "시에서 한 단순 여론조사가 아니라, 전문가들이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해 공론 설계를 통한 공론조사를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단순한 철거 유무 조사가 아닌 철거를 한다면 그 방법까지 결정하는 숙의 공론화 절차를 거치자는 제안이다.
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 김대용 공동대표는 "개발이라는 것이 그냥 일방적으로 없애고 세우는 것만이 아니라 지키면서도 더 경제적 효과를 분명히 누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확신한다"며 "저 건물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 역사와 자연, 개발도 같이 할 수 있는 좋은 열쇠라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김 공동대표는 "(철거 찬성 쪽에선) 공대위가 무조건 보존하자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개발이 방해되고 걸림돌이 된다, 지역이 어려운 데 외면하느냐고 하는데, 한쪽으로 폄훼하고 몰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동두천을 살리기 위해 시민 공론화 과정을 거쳐 고민해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대위는 이러한 요구사항을 가지고 동두천시 관광휴양과장 등 시 관계자들과 협상하려고 했으나, 시 쪽에서 갑자기 현장에 나온 기자들의 취재가 부담스럽다는 이유를 들며 협상을 회피했다.
정작 사태의 원인을 만든 결정권자인 동두천 시장은 자리에도 없고, 주민들만 남아 찬반으로 엇갈려 갈등하는 속에서 일선 담당 공무원까지 자리를 피한 것이다.
이태호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소장은 "이미 미군 위안부 문제는 대법원에서 국가폭력으로 판결이 났다"며 "성병 관리소 철거는 동두천 시민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라 피해자 인권에 관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 소장은 "이미 전국적인 관심이 일어나고 있고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하자는 논의가 있다"며 "동두천 시민들과 함께 국민들이 피해자 권리를 위해서 무엇을 할지 토론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고 말했다.
시와 용역업체의 철거 시도는 오전 협상 결렬 이후 소강 상태이지만, 현장에 굴삭기가 추가 투입되는 등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지역 경찰과 공대위 등에 따르면 이르면 이날 오후 또는 10일 오전 철거가 재시도될 예정이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