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살장으로 향하던 젖소 여섯 ‘명’(命) 구조
기후위기에 저항하는 동물들의 행진
선진국 인간중심 ‘기후정의행진’의 한계
노예해방, 여성해방, 동물해방?
인종차별, 성차별, 그리고 종차별도 넘어야
동물들의 소음과 생명 정치-오이코폴리틱스
국가의 올바른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하는 기후정의행진은 2019년 시작돼 코로나 기간 중 온라인 행사로 치러지기도 했으나 이제 중요한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지난 9월 7일 토요일, 서울 강남역과 테헤란로 일대에서 열린 907기후행진에는 30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서도 3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서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고 외쳤다.
기후위기에 저항하는 동물들의 행진
이날의 요구사항은 ‘핵발전소 수명 연장과 신규 건설을 추진하는 윤석열 정부의 핵 진흥 폭주를 멈추고 에너지정의 실현하라’, ‘기업을 위한 무한정 에너지 공급과 송전탑 건설을 중단하고 노동자 일자리 보장하는 탈석탄·탈화석연료 계획 마련하라’는 등 열 한 가지였는데 그중 하나가 ‘비인간 동물을 상품화하는 공장식 축산을 정의롭게 전환하고 동물 착취 시스템을 철폐하라’는 것이었다.
동물권은 기후문제와 더불어 부상한 사회 이슈이지만 올해는 유독 두드러졌다. 행사 당일 두 명의 여성 동물권 활동가들이 나체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에 연행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사람도 동물’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런 시위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기후를 이야기하면 ‘지금 눈앞에 사회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웬 기후?’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처럼 동물권을 이야기하면 ‘지금 사람도 살기 힘든데 웬 동물?’이라는 반응이 나오기 일쑤다. 그래서 동물권 활동가들은 의도적으로 과격한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본 행사 직전에는 처음으로 ‘기후위기에 저항하는 동물들의 행진’이 열렸다. 주최 측은 “매년 기후정의행진이 진행될 때마다 아쉬움이 남았다. 그 다양하고 세심한 요구 안에 비인간의 존재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907기후정의행진에는 그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된다. 기후, 환경, 생물 다양성과 같은 말에 비인간, 축산업이 누락될 때 허탈하고 무기력했던 인간동물들은 모두 모여달라”고 호소했다.
선진국 인간중심 ‘기후정의행진’의 한계
앞서 행사가 준비되는 동안 서울 성북녹색당의 몇몇 당원들은 기후정의행진이 국가주의와 인간중심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이유로 ‘보이콧 성명서’를 발표해 화제가 됐다. “에너지와 토건 위주의 이야기로 주로 여론과 요구과제를 형성하려고 하는 기후정의행진의 전략이 매우 문제적이다. 인간과 비인간, 국민과 비국민, 자본가와 노동자를 나누며 만든 구조적인 착취는 지구적으로 퍼졌으며 그 결과가 기후붕괴, 생태/인종학살이다. 그러나 기후정의행진은 여전히 선진국 인간 국민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기후위기가 소환한 정의의 관점으로 고려해야 할 대상은 무척 다양하다. 당장 기후변화로 생계의 어려움을 겪는 농어민, 탈석탄 산업전환으로 일자리를 잃게 되는 노동자를 비롯해 기후재난에 취약한 소외계층·노약자·장애인·여성, 선진국의 탄소배출 산업을 이전받고 신재생에너지와 전기자동차에 필요한 광물을 채취하는 개발도상국 국민까지 정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여기에 인간과 동물 사이의 정의까지 끼어들 자리가 있을까? 아니면 동물운동은 기후정의라는 인식전환의 지렛대가 될 수 있을까?
노예해방, 여성해방, 동물해방?
인간은 반려자이자 조력자, 먹이인 동물에 대해 깊은 관심과 연민을 가져왔다. 불교는 살생과 육식을 금하고, 자이나교는 땅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을 죽일까봐 발걸음을 조심하며 식물을 꺾는 대신 떨어지는 열매만 먹기를 권했다. 육식문화를 가진 서구에서도 동물권은 현대에 나온 개념이 아니다. 17세기 영국 철학자 헨리 모어는 인간의 정신을 제외한 나머지를 물질로 취급한 데카르트의 인식에 대해 “모든 동물의 생명과 감각을 박탈하는 치명적이고 살육적인 억압이론”이라고 비판했고, 공리주의자인 제러미 벤담은 1780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동물에 대한 인도주의적 사상의 필요성을 제기해 서구 동물권 사상의 기반을 제공했다. 그는 인간만이 언어 사용능력이 있다는 점을 기준으로 동물을 열등한 존재로 대하는 걸 거부하면서 동물에 대한 학대를 ‘노예의 고통’에 비유했다.
현대 동물권 사상의 대표자인 피터 싱어는 이런 벤담의 사상을 이어받았다. 그는 ‘고통의 최소화, 쾌락의 최대화’라는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적 윤리를 들어 동물도 고통을 느끼는 감각적 존재, 나아가 감정적 존재라면서 윤리적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동물에게 더 많은 자애와 돌봄을 베풀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동물복지론’으로 불린다. 이에 대해 톰 리건은 공리주의를 넘어 권리론을 펼친다. 동물도 타고난 생명의 가치를 실현할 도덕적 권리를 가지므로 인간은 동물의 권리를 빼앗으면 안 되고 동물들이 그들의 가치를 스스로 실현할 수 있도록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종차별, 성차별, 그리고 종차별도 넘자
이런 주장은 개념상 차이가 있지만 현실에서는 인간이 야기하는 동물의 고통을 줄이려는 실천으로 이어진다. 싱어는 특히 종차별주의(speciesism)라는 용어를 널리 확산시켰다. 이는 인종차별(racism)과 성차별(sexism)이 특정한 인종(백인)과 성별(남성)의 이익을 우위에 둠으로써 공리주의의 평등 원리와 동등배려 원리를 위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동물을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고 착취하는 행위가 갖는 비윤리성에 주목한다. 싱어는 현실적으로 육식이 불가피하다고 하더라도 동물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공장식 축산업을 규제하고 윤리적 채식주의를 실천할 것을 주장했다.
도살잘으로 향하던 젖소 여섯 ‘명’(命) 구조
노예해방, 여성해방과 마찬가지로 동물해방이라는 말이 나온 건 이런 맥락이다. 국내에서도 ‘동물해방물결’이라는 동물권 단체의 이름을 통해 이 말이 널리 알려졌다. 동물의 보호나 구조를 넘어 해방을 주장하는 이 단체는 싱어의 관점에서 공장식 축산업을 반대할 뿐 아니라 리건의 관점에서 동물의 살아갈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도살장으로 향하는 젖소 여섯 명(命, 마리 대신 사람처럼 명으로 부름)을 시민 성금으로 구조하고 이들이 자연 수명을 다할 때까지 살아갈 수 있는 생추어리(보호구역)를 강원 인제군의 도움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동물해방이라는 현실의 첨단 개념도 이론적으로 공격받고 있다. ‘감각과 감정을 가진 존재’로서 동물을 우위에 두는 것은 식물의 입장에서는 다시 종차별이 된다. 식물연구는 최근 주목받는 분야인데 그 이유는 동물연구와 다른 관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기존 동물이론과 동물해방운동은 ‘인권에 기반한 도덕적 확장주의’로 비판받는다. 인권운동이 노예, 식민지, 여성, 성소수자로 대상을 확대해온 연장 선상에서 동물을 다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과 식물 사이에는 인간과 동물 사이보다 더 근본적인 단절선이 있다. 생태학적으로 볼 때 식물의 분석단위는 ‘개체’나 ‘쌍’이 아니라 관계와 상호성이 중요한 ‘배치’이기 때문이며 이는 현재의 기후위기를 초래한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는 데 훨씬 중요한 사유의 실마리가 된다.
동물들의 소음과 생명 정치-오이코폴리틱스
역사가 오래된 동물운동과 최근의 기후운동이 강하게 결합한 건 한국의 특이한 현상이기도 하다. 기후위기가 워낙 근대 산업문명, 어쩌면 자연을 이용·극복·정복해온 모든 문명의 문제가 축적되고 집약된 상태에서 터져 나온 문제들의 ‘끝판왕’이기도 하거니와 한국은 압축적으로 근대를 경험한 것처럼 압축적으로 탈근대를 경험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탈식민, 산업화, 민주화라는 과제를 여전히 수행하면서 여기에 녹색화라는 과제까지 더해졌다. 형식적 민주주의조차 쉽사리 무너지고 퇴보하는 마당에 생태민주주의를 요구받고 있다. 역사에 비약은 없다고 하지만 이렇게 많은 문제를 순차적으로 풀어갈 수 있을까? 사회는 몰라도 개인에게는 ‘회심’이라고 부르는 비약의 순간이 있다. 한 활동가의 글을 인용해본다.
“2018~2019년에는 특히 구제역, 돼지독감, 대형 전염병이 계속 터졌다. 감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의 동물들이 ‘살처분’ 당하는 뉴스를 계속 접했다. 살처분하는 이유가 죽을 병에 걸리고 위험해서가 아니라 치료하는 데 쓸 약과 시간을 들이면 돈을 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지금 돌이켜보니 당시의 충격이 내가 지금 외치는 반자본주의, 체제전환의 뿌리가 된 것 같다. 당시 ‘아프리카 돼지열병’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아프리카 돼지열병 관련주’가 떴다. 당시 나는 사무실에 앉아 살처분 당하는 돼지들의 기사를 읽으며 주식투자를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디자인하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은 어떤 주식을 사고 팔까, 나라는 존재의 쓸모가 뭘까, 이렇게 살아도 되나, 회의가 들었다. 나를, 나의 삶을 더 중요한 일을 위해 쓰고 싶다는 욕구를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퇴사를 했다.” (은혜, ‘무너지는 세상의 균형을 잡는 일, 매거진 《바람과 물》 6호, 2022)
‘살처분’과 ‘체제전환’의 거리는 이렇게 가깝다. 사실 서울 성북녹색당의 당원으로서 나는 기후정의행진이 인간중심적이라는 이유로 보이콧한다는 성명서를 낸 동료 당원들에게 항의했다. ‘지금 다 같이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나 운동에 우선순위는 없다. 자신의 절실함을 표현하는 게 진정한 운동이라는 반성이 생긴다. 자신의 고통이 된 동물의 고통을 표현하는 건 고도의 정치적 운동이다.
최유미는 이를 ‘오이코폴리틱스’(oikopolitics)라고 부른다.(『지구의 철학』, 2024) 오이코스(oikos)는 폴리스의 정치에서 배제된 자들이 머무는 곳, 먹고 배설하는 경제와 살림의 공간이었다. 오이코스에 머물던 노예, 여성, 어린이, 외국인은 차례로 그곳을 나왔으며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치안’에 맞서는 이들의 권리 찾기가 ‘정치’이다. 이제 그곳에 남은 존재는 동물, 나아가 생명이다. 이들은 인간처럼 논리적 언어가 아니라 ‘소음’으로 정치를 한다. 그 소음이란 코로나19 바이러스이며 이산화탄소이다. 이를 귀담아 듣는 것이 인간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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