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물론 비판-신유물론의 세계와 자연권운동

생태위기의 원인은 바로 인간중심주의

신유물론 : 물질은 활력과 생기있는 존재

해충도 잡초도 없다-나무 숲 자연은 신령한 존재

기후위기 대응이란 이름의 수많은 나무 살해들

신령하고 거룩한 산 강 나무 건드려 동티난 문명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녹색불교연구소소장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녹색불교연구소소장

수계(서품) 받고 스님이 된 성스러운 나무들

태국은 많은 밀림을 갖고 있는 국가다. 태국 북부의 치앙마이 숲속을 여행하다 보면 화사한 진노랑의 샤프란천을 두른 웅장한 나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처음 여행하는 사람들은 의아해하지만 이것은 태국의 스님들이 입는 성스러운 가사(스님의 옷)를 나무에게 입힌 것이다. 불교국가인 태국은 수백 년 된 나무에게 스님이 되는 의식인 수계(受戒)를 받게 하고, 그 상징으로 가사를 입혀 성스러운 나무임을 알리는 것이다. 이렇게 스님이 되는 수계의식을 나무에 베푸는 것을 '부앗 톤 마이'(Buat Ton Mai :Tree Ordination)라고 한다. 1980년대 말 태국을 시작으로 캄보디아, 라오스, 스리랑카 등의 불교국가에서 오랫동안 나무와 숲의 거룩함과 소중함을 인식해 온 사람들이 함부로 벌채하거나 파괴하지 못하도록 지켜온 방식이다.

불교는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하게 하려는 종교다. 그러면 불교에서 중생은 누구일까? 인간만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을 포함하여 고통을 느끼는 동물까지 중생일까? 역시 그렇지 않다. 불교는 정신능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유정물(인간과 동물)과 없다고 생각하는 무정물(초목과 돌 흙, 구름 등)도 모두 중생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유정물, 무정물 모두 제도해야 할 구류중생(九類衆生)이며, 마땅히 산천초목도 모두 부처가 될 불성이 있는 존재라고 보았다.

 

나이 많은 거목에 사프란 천을 두르고 있는 태국 스님들의 수계 장면.    유정길 제공
나이 많은 거목에 사프란 천을 두르고 있는 태국 스님들의 수계 장면.    유정길 제공
태국의 수계 장면.   유정길 제공
태국의 수계 장면.   유정길 제공
사프란 천 수계를 받은 태국의 나무들.     유정길 제공
사프란 천 수계를 받은 태국의 나무들.     유정길 제공

생태위기의 원인은 바로 인간중심주의

기후위기의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이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지구상의 의식 있는 위대한 존재이고, 나머지는 모두 인간의 식량이 되거나 채굴, 이용의 대상이므로 지배, 정복 굴복시켜야 할 대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역사학자인 린 화이트(Lynn White)는 사상적으로 기독교가 인간중심주의를 조장했다고 주장했다. 성경의 창세기에 인간은 유일신 야훼의 모습대로 우월적 존재로 창조되었다. 탈생물적 교만이다. 더욱이 그 인간에게 신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권한을 준다. 신의 명령인 것이다. 서구문명이 지배와 정복, 확장을 당연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신의 지상명령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날개를 달아 준 것은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잘못 적용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이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사회를 더욱 강화시킨 것이다. 이제 인간 이외의 모든 동물과 식물은 인간의 식량이며 먹이이며, 자연의 거친 야생성은 인간이 장악하여 순화시키고 굴복시켜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간중심주의는 우리의 생활과 관념 속에 아주 깊게 스며들어 있다. 인간에게 이로운 곤충을 익충(益蟲)이라고 하고 해를 끼치는 벌레를 해충(害蟲)이라고 한다. 특히 해충은 뒤에 “박멸”이라는 말이 따라붙어 씨를 말려 죽이려 한다. 익숙한 먹는 풀 외의 기타 풀들을 잡초(雜草)라고 부른다. 잡초는 “제거”라는 말이 늘상 따라온다. 독한 제초제로 죽여야 한다. 익충과 해충은 인간에 의한 구분이다. 잡초와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도 인간의 관념이다.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 10월 12일: 가을에 시호테알린 산맥의 세레브리아니 고개를 통과하는 자동차 도로의 공중 사진. 2024.10.12. TASS 연합뉴스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 10월 12일: 가을에 시호테알린 산맥의 세레브리아니 고개를 통과하는 자동차 도로의 공중 사진. 2024.10.12. TASS 연합뉴스

해충은 없다, 잡초도 없다

사람들은 ‘돼지가 미련하다. 소가 우직하다. 여우가 교활하다, 뱀이 사악하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가 정말 우직한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 우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여우가 실제 교활한 것인가? 교활하다고 인간이 생각하는 것인가? 그렇다. ‘뱀은 사악하다’라고 ‘인간이 생각’하는 것이다. 돼지, 소, 여우, 뱀은 인간의 판단 너머에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잘못된 집단적인 관념으로 뱀이나 돼지를 대하고 동물들을 차별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2012년 많은 미국의 양심들은 흑인 차별에 반대하고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를 외치며 차별철폐 운동을 벌였다. 백인 시각에서 유색인종이 더럽고 저열해 보이는 것은, 흑인들에서 생겨난 잘못일까? 아니면 백인들 시각의 잘못일까? 백인의 시각이 잘못된 것이라면, 똑같은 논리로 우리가 익충과 해충을 구분하고 더럽고 사악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그들 동물의 잘못이 아니라 인간의 잘못된 집단적 관념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은 다리가 없는 뱀이나, 다리가 많은 곤충, 지네, 그리마 등을 특히 싫어한다. 그러나 그들은 진화과정에서 그저 그런 모습이 된 것이다. 그들이 독이 있다고 해도 인간을 죽이려고 일부러 독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지 않으려고, 종족 번식을 위해 갖고 있는 능력인 것이다. 그들은 조심해야 할 동물이지 나쁜 동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징그러운 나쁜동물이라고 판단하고 차별하고 죽여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10월 2일, 콜롬비아 아마조나스 주 마케도니아 지역의 아마존 강 저수위의 공중 사진. 콜롬비아 국가재난위험관리기구(UNGRD)는 최근 브라질과 페루의 삼중 국경에 영향을 미치는 강수량이 놀라울 정도로 부족해 아마존 강의 흐름이 최대 90% 감소했다고 보고했다. 2024.10.2. AFP 연합뉴스
10월 2일, 콜롬비아 아마조나스 주 마케도니아 지역의 아마존 강 저수위의 공중 사진. 콜롬비아 국가재난위험관리기구(UNGRD)는 최근 브라질과 페루의 삼중 국경에 영향을 미치는 강수량이 놀라울 정도로 부족해 아마존 강의 흐름이 최대 90% 감소했다고 보고했다. 2024.10.2. AFP 연합뉴스

신유물론 : 물질은 활력과 생기 있는 존재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이를 뛰어넘는 최근의 철학적 논의가 바로 신유물론이다. 구유물론은 만물의 궁극적인 실재를 물질로 보고 정신은 물질의 부수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사상이다. 한편 인식론에서는 의식을 가진 존재를 주체로 보고, 의식이 없는 존재를 대상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의식을 가진 인간은 능동적인 주체이고, 물질은 수동적인 객체 또는 죽은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를 기반으로 해서 물질은 철저히 자연의 인과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로 생각했다. 이것이 인간중심주의의 기반이 되어 인간 외의 모든 존재는 죽어 있는 것이며, 지배 정복의 대상이 됐다.

이처럼 구유물론은 데카르트의 물질관에 영향을 받아 물질을 ‘생기 없는 것’,‘죽어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신유물론은 그와 전혀 달리 ‘활력 있는 것’, ‘생동하는 물질’로 보는 철학이다. 물질이 외부의 어떤 작용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체로 활력을 갖고 있다고 본다. 또한 신유물론은 비인간 존재의 활력과 능동성을 인정하고, 심지어 감정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며, 나아가 그들의 고통과 신음에 귀를 기울이려는 학문적 태도이다. 그러나 비인간 존재를 ‘살아 있는 물질’로 간주하는 것은 그들이 동물이나 인간과 똑같은 존재 방식을 갖고 있다는 걸 뜻하는 건 아니다. 그들은 자기 고유의 방식대로 존재하며 살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위가 살아 있다는 것은 인간과 다른 바위 고유의 내재적인 물성을 갖고 살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신유물론의 선구자는 브뤼노 라투르 (Bruno Latour)이다. 그의 ‘행위자 연결망 이론 (Actor-network theory, ANT)’은 인간과 비인간 모두 자연계에서 동일한 ‘행위자’로 존재하며 이들은 연결망을 통해 서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인간도 다른 사람과 자연에 영향을 주는 행위자이듯이 도로의 과속방지턱도 다른 사람들과 자동차, 기타 자연에 영향을 주는 행위자라는 것이다. 들뢰즈는 물질은 내재적인 힘에 의해서 활기를 띠며, 이 힘은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하고 생성하는 힘이라고 한다. 구유물론이 분절적, 기계적, 인간중심적 세계관이라면, 신유물론은 관계와 연결된 세계라는 인식 위에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며 자연 속에 인간의 위치를 재배치하려는 시도다.

 

지난 9월 18일 폴란드 남부 타트라 산맥의 자코파네 근처에서 본 부분 월식. 이 월식은 '옥수수 달'이라고 불리는 보름달에 일어났다. 2024.9.18.EPA 연합뉴스
지난 9월 18일 폴란드 남부 타트라 산맥의 자코파네 근처에서 본 부분 월식. 이 월식은 '옥수수 달'이라고 불리는 보름달에 일어났다. 2024.9.18.EPA 연합뉴스

나무와 숲, 자연은 신령한 존재

이 글은 자연은 위대하고 신성하다는 뻔한 이야기를 반복하려는 것이 아니다. 숲속에서 수백 년 살아온 오래된 거목들은 그 자체로 하늘과 땅과 인간의 역사를 온몸으로 기록하고 있는 거대한 존재다. 수백 년 수천 년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짐승과 벌레들을 키웠고, 나뭇잎과 뿌리를 통해 물을 저장하고 끌어올리고 내뿜으며 땅속과 땅 밖의 엄청나게 많은 생명의 생기를 주고 받아 왔다. 비가 내려 물을 머금고 대지를 적시며 뿌리와 뿌리로 연결된 땅속의 수억만 생명들을 살리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구축해 왔고, 새들과 짐승들의 서식지였으며 공기를 정화시켜 다른 생명의 삶을 키워왔다.

이뿐 아니라 숲속의 생활을 하는 수행자들에게 큰 이치를 깨닫게 해준 거룩한 존재다. 이런 나무를 어찌 단순한 목재로만 간주할 수 있겠는가? 이들 거목은 땅속의 물을 증산작용을 통해 빨아 올려 하늘로 보내고, 구름을 만들고 비로 내리게 했고, 나무와 산과 물이 생기 있게 살게 한 성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생명들은 모두 연결된 존재로서 서로 살리며, 거룩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오랜 풍상의 거목들은 더욱 그 가치와 거룩함이 빛나는 신령한 존재의 상징이다. 이들 거목은 수많은 생명들에게 나눠주고 베풀며 살아온 부처이자 보살인 것이다. 그 거룩한 삶에 수계를 주어 신령하게 모시는 것이 트리 오디네이션(Tree Ordination)이다.

속신 : 자연에 대한 금기

과거 우리 조상들은 속담(俗談)도 있었지만 속신(俗信)이라는 지혜도 있었다. 일상생활에 구속력이 있는 민간신양이자 자연에 대해 터부(Taboo) 역할을 했다. 1970년대까지 나이든 노인들에게서 자주 들었지만 이제는 미신으로 치부되어 사라진 지혜이자, 생활속의 애니미즘이다.

“흐르는 물에 오줌을 누면 아이를 못 낳는다” “입춘날 물을 헤프게 쓰면 수신의 노여움으로 흉년이 들거나 홍수를 당한다” “세숫물을 많이 쓰면 저승에 가서 다 마셔야 한다” “우물가에 밥알을 떠내려 보내면 3대가 빌어먹는다” “새끼 업은 메뚜기를 잡으면 어머니가 빨리 죽는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 “큰 나무를 베면 일찍 죽는다” “나무를 많이 때면 산신령의 노여움을 산다” 등등이다.

우리나라 전역의 모든 산봉우리는 반야봉, 비로봉, 문수봉, 보현봉 등 부처와 보살의 이름이 아닌 곳이 없다. 시제를 시내거나 성묘할 때도 제일 먼저 산신에게 재물을 올리는 것이 순서였다. 사찰의 경우에도 산신각이 있어 산을 신령한 존재로 모셨던 것이다. 경주 남산의 많은 불상과 마애불은 조각을 한 것이 아니라 바위 속에 있는 부처와 보살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정도로 자연은 신령하고 모시고 경외해야 할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최근 환경운동가들이 전통의 애니미즘을 소중히 여기고 주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2008년 에콰도르는 자연의 생물이 영구적으로 생존하고 번식하고 진화할 권리를 헌법에 명기하였다. 헌법에 자연권을 명기한 세계 최초의 일이다. 남미의 볼리비아도 2011년 ‘어머니 지구법’을 제정했다. 뉴질랜드도 마오리족 원주민들이 신성시하는 왕거누이강을 인간과 동일한 법적 위상을 갖는 존재로 간주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세계는 이렇게 갈수록 자연도 인간으로부터 침해받지 않고 스스로 존재할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벌목으로 황폐해진 강원도 산간지역.   유정길 제공
벌목으로 황폐해진 강원도 산간지역.   유정길 제공
벌목된 강원도 나무들이 상업용 목재들로 가공돼 실려나가고 있다.   유정길 제공
벌목된 강원도 나무들이 상업용 목재들로 가공돼 실려나가고 있다.   유정길 제공

기후위기대응이란 이름으로 벌어지는 수많은 나무 살해들

앞의 긴 이야기들은 바로 지금 할 이야기로 귀결된다. 산림청은 지난 2021년 1월 20일 산림의 기후위기 대응 탄소중립목표 달성을 위해 “2050 탄소중립 산림부문 추진전략(안)”을 발표했다. “2050년까지 30년간 30억그루의 나무를 심어, 탄소를 3400만 톤을 줄이는 데 기여하고, 산림의 탄소 흡수력 강화, 신규 산림 탄소흡수원 확충, 목재와 산림 바이오매스의 이용 활성화, 산림 탄소흡수원 보전, 복원 등 4대 정책 방향과 12대 핵심과제를 중점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도시숲 조성, 섬지역, 유휴 토지, 북한과 해외에 나무심기 등을 한다면 아주 좋은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무를 심기 위해 ‘영급 구조개선’이라는 이름으로 탄소 흡수효율이 떨어지는 30-50년 된 나무들은 모두 베어버리고, 탄소 흡수능력이 좋은 10년된 어린나무를 심겠다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이 논리라면 아마존과 보르네오의 오래된 밀림들은 모두 베어버리고 새로 묘목들을 심는 것이 기후대응에 효과적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오래된 숲은 베고 새로운 나무를 심겠다는 정책은 당시 환경단체의 강력한 반발로 겉으로는 포기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무를 베고, 심고, 임도를 만들어야 돈을 버는 임업 비즈니스 담당 산림청은, ‘산림경영’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많은 산에 마치 동물가죽 벗기듯 모두 벌채를 하고 있다. 산림경영은 보존이라는 명목 아래 계속 나무를 베고 심는 논리를 개발해야 돈이 된다. 산불이 나면 오히려 돈벌 좋은 기회가 된다. 지원도 많아지고 일거리가 많아져 이득이 된다. 임도를 내야 산불을 막는다는 핑게로 산의 중간중간에 길을 내는 거대한 공사도 도맡는다. 그러나 실상은 임도로 인해 산불은 바람길이 되어 더 많이 번진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소나무 재선충도 넓은 지역을 무분별하게 약을 살포하다 보니 의미있는 곤충들과 새들도 모두 희생이 되었고 실제 소나무재선충은 잡지 못했다.

산림청은 산과 숲을 보호하기는 것보다 산을 통해 돈을 버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 환경단체들의 목소리다. 실제로 기후위기나 탄소중립 과제는 큰 기회가 된다. 지금 전국 도처 산에 울창하던 산림을 싹쓸이 벌목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여름철마다 일어나는 산사태가 바로 그 때문이다.

 

설악산 최고봉 대청봉에서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는 사람.    유정길 제공 
설악산 최고봉 대청봉에서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는 사람.    유정길 제공 

설악산과 지리산 케이블카, 산악열차 그리고 기후대응댐

2024년 현재 전국에서 41개의 케이블카 운영되고 있다. 초기에 반짝 특수를 누리다 1~2곳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실상 적자를 내고 있음에도 최근 50여 지자체에서 건설 추진에 혈안이 되어 있다. 설악산의 오색 케이블카 개발은 윤석열 정부가 공사 강행을 약속했고, 그 외에 울산바위의 케이블카나 강릉시와 평창군의 케이블카, 대전과 지리산 산청과 남원 등의 케이블카와 산악 열차, 신불산(영남알프스) 케이블카 등 전국 산들이 케이블카 개발로 들썩이고 있다. 추진한 단체장이 재임하는 4~5년 동안은 돈을 벌지만 이후에는 영락없이 적자행진을 하는 것이 케이블카 사업이다. 미국은 63개의 국립공원이 있지만 공원 안에는 케이블카가 한 대도 없다. 스위스는 스키를 위한 관광 케이블카가 460개 있지만 국립공원에는 하나도 없고, 역시 일본도 1970년 이후로 국립공원에는 신규 케이블카는 하나도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연은 미래세대의 것이며 우리는 그들의 것을 빌어쓰는 것, 잘 사용하여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 지속가 능한 발전 개념이다. 절대 건드리지 않는 것, 보존을 위한 최소한만이 용인된 것이 국립공원임에도 그들에게 미래세대는 안중에 없이 당장의 이용과 돈벌이를 위해 엄청난 나무와 산을 송두리째 베어내려 하고 있다.

최근 더욱 황당한 일은 홍수 방어 확보를 명분으로 지난 7월 30일 전국의 14곳에 ‘기후대응 댐’을 짓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환경을 보존해야 할 환경부가 이렇게 한꺼번에 댐을 짓겠다는 발표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 저수량도 적어 홍수조절 능력도 의심받고 있다. 몇 년 전 강남과 오송 참사 등으로도 알 수 있듯이, 도심의 집중폭우 피해는 기후대응 댐이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지난 8월 8일, 캐나다 매니토바 주 처칠과 길리엄 사이의 숲 위로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시각의 풍경. 2024.8.8. AP 연합뉴스
지난 8월 8일, 캐나다 매니토바 주 처칠과 길리엄 사이의 숲 위로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시각의 풍경. 2024.8.8. AP 연합뉴스

신령하고 거룩한 산과 강과 나무를 건드려 동티난 문명

예전 조상들은 ‘동티난다’는 표현을 썼다. 가만히 놔두면 되는 것을 괜히 건드려서 생긴 재액을 말한다. 신이 내린 신벌(神罰)이라고도 한다. 자연은 스스로 복원하며 정화한다. 모든 생명은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신을 해치는 병균에 대해 항체를 만들어 대항하며 스스로 치료한다. 산과 강과 나무, 바위, 인간을 포함한 비인간 존재는 살아 있다. 지금 기후위기는 인류의 어리석음과 자본과 돈의 탐욕으로 자역을 파괴해온 과보이며, 자연이 거대하게 항체를 만들어 저항하는 것이다. 동티가 난 것이다.

기후위기는 인류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으라는 채찍이며, 개인의 욕망을 위해, 성장과 풍요를 위해 갈등 대립해 온 삶을 전환하여, 서로 의존하고 연결된 존재임을 깨달아 경쟁 대립하지 말고, 서로 협력과 평화, 자연과 생명을 보호하고 살리는 삶으로 개벽적 전환을 강제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노동운동과 기후운동의 연대를 위한 박태주 선생의 글에 대하여

지난 10월 5일 박태주 위원의 “탄소중립 대안세력으로 나아가야 할 노동-기후연대”의 글에서 “노동운동이 고용과 임금을 위해 자본과 한통속이 돼 자본주의의 기득권 유지라는 반생태적인 행위를 한다고 비판을 한다고 해도, ‘사회정의의 칼’이라는 역할을 주목하며 변혁성을 갖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글에 필자는 완벽히 동의한다. 노동단체는 기후문제 해결에 나서는 녹색계급을 만드는 중요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기후운동에서 노동단체의 기후생태운동을 무한히 격려하고 지원하며 연대하려 하고 있다. 마땅히 기후운동은 노동단체를 배제할 수 없고 배제해서도 안 된다. 또한 녹색 노동운동의 활동을 기대한다.

그러나 “연대는 두 운동 사이의 교집합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가령 노동조합이 기후위기의 해결을 자신의 의제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면, 기후운동은 정의로운 전환, 일자리 보장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충분히 동의하지만, 또한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래서 더 근본적 전환을 도모하는 실천방법을 내부적으로 깊이 모색해 주기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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