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대권 칼럼] 1000개 민회-5개 독립공화국-연방공화국
위기의 원인은 지나친 인간중심 발전과 자연과의 분리
산업화, 도시화, 정치가 무너뜨린 ‘생명문화지역’
병 주고 약 주는 현대문명 기후위기의 궁극적 대안은
수계 기반으로 자연과 사회가 하나되는 ‘생명지역’주의
소나무 의견도 묻는 생명체 전체 민주주의 ‘만물공동회’
지구촌 곳곳이 홍수와 폭염, 산불 같은 자연재해로 뒤숭숭하다. 자연재해는 늘 있었지만 해가 갈수록 빈도와 강도가 심해지고 있다. 매년 역대 최고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이러다가 정말 머릿속으로만 그려봤던 ‘그날’이 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거의 날마다 모든 매체에서 기후위기를 말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 않다. 적어도 겉으로는.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하는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위기를 알고는 있지만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 짐짓 모르는 척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위기가 있든 말든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된다”는 과도한 ‘자기 몰입’이다.
지진대 위에서 늘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 일본인은 첫 번째 유형이 많고, 국뽕과 일중독에 취해 살고 있는 한국인은 두 번째 유형이 많다. 둘 다 위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우리의 미래가 더 암울하게 느껴진다.
위기의 원인은 지나친 인간중심 발전과 자연과의 분리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기후위기의 가까운 원인은 “지나친 인간중심 발전” 또는 “자연으로부터 분리”에 있다. 인간중심 발전이나 자연으로부터 분리나 결국 같은 말이다. 오죽하면 ‘인간세’라는 용어가 나왔겠는가! 인간중심 발전이 극에 달하면서 비인간 존재의 삶은 비참한 상태에 빠지고, 이들이 일으키는 ‘생명의 몸부림’이 ‘위기’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늘 겪는 건강 문제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건강 관리를 잘못하면 병에 걸린다. ‘관리’란 내 몸의 내부, 그리고 내 몸과 주변환경과의 조화로운 균형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내 몸의 내부와 외부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어느 한쪽이 잘못되어도 병에 걸린다. 따라서 병을 고치려면 다시 우리 몸의 조화와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방법은 자연의 ‘스스로 그러함’에 맡기거나 혹은 약을 쓴다. 약은 ‘스스로 그러함’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자기 회복 능력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이 쓴다. 제약 사업이 크게 번창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말해준다. 약을 먹어서 병을 고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방법이다. 약을 만드는 과정 자체에 엄청난 반생명적 요소가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병 주고 약 주는 현대문명
아홉 번 구워 만들었다는 구죽염(九竹鹽)을 보자. 한 줌의 죽염을 얻으려고 소나무로 아홉 번 불을 지펴야 한다. 소나무와 소금이 타는 과정에서 환경에 아주 해로운 독소가 배출되기 때문에 죽염은 사람 사는 동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만들어야 한다. 대량생산 체계로 만들어지는 양약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현대문명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병 주고 약 주는 문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몸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켜 놓고 온몸이 병들면 비싼 돈을 들여 약을 사먹는 게 우리가 말하는 문명이라는 것이다.
단지 건강 분야만 그런 게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모든 분야의 돌아가는 모습이 똑같다. 이에 대해 의식있는 학자와 시민들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처방을 내놓고 다양한 정책을 만들어 실시하고 있다. 문제는 자연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다시 돌아가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비용만이 문제가 아니다. 병든 상태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 자체에 엄청난 ‘심리적 부담’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두 가지, 병든 상태와 심리적 부담을 이겨내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 외에는 기후위기를 극복할 방법이 없다.
생명지역주의
환경 문제에 일찍 눈을 뜬 나라일수록 다양한 자연회복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생태하천 복원하기, 자연제방 만들기, 범람지 만들기, 인공 댐 제거하기, 생물보호구역 만들기, 야생동물 이동통로 만들기, 자연 식생(植生) 조성하기, 토종 씨앗 보급하기, 유기농업 면적 확대하기, 생물다양성 협약 준수하기 등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이런 노력의 끝은 어디일까? 아니, 이런 노력이 현재의 도시 문명 속에서 과연 효과가 있기는 한 걸까?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이런 노력의 끝과 그 노력이 효력을 발휘하는 환경 모두를 말해주는 것이 바로 ‘생명지역주의’이다.
수계 중심으로 자연과 사회가 하나인 ‘생명지역’
먼저 ‘노력의 끝’을 얘기해 보자. 도시 재생 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화두는 “어떻게 도시 안에 자연을 끌어들이느냐?” 일 것이다. 도시 공무원들은 전문가를 초빙하여 정책을 개발하고 시민참여를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공모사업을 벌인다. 자연친화형 아파트 개발, 도심 소공원 사업, 전통시장 활성화, 복개 구조물 철거, 도시 텃밭 조성, 강변의 친수공간 개발 등등. 그러나 아무리 도시 안에 자연을 끌어들여도 과도한 인구가 몰려 사는 환경이 변하지 않는 한 썩은 얼굴에 분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특정 조건에 몸 붙여 사는 생명이 건강한 삶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적정 개체수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현대의 도시는 오로지 정치경제적 요구에 의해 (초)거대 도시로 발전하였다. 그로부터 나타나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도시에 자연을 끌어들인다는 것인데 누가 봐도 한계가 분명하다. 그래서 나온 정책이 인구 분산, 거점도시 개발, 지역 균형발전 등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생태적 원리보다 정치경제적 요구를 충실히 따르는 식으로 진행된다.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더 중시하는 까닭이다.
자연과 사회를 분리하여 어느 한쪽에 더 큰 비중을 둔다는 개념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자연과 사회는 하나의 흐름 속에 있으며, 그 흐름 위에 자신의 몸을 ‘태우는’ 것이 제대로 된 자연친화적 삶이다. 자연과 사회가 하나의 흐름 속에 있는 체계가 바로 ‘생명지역’이다. 영어로는 Bioregion이라고 한다. 대체로 생명지역은 수계(Watershed)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풍수학의 기본 개념은 “산은 강을 가로지르지 못하고, 강은 산을 넘지 못한다”이다. 우리 조상들은 오랜 세월 동안 산과 강이 만들어 낸 수계 안에서 조화로운 삶을 살아왔다. 바로 이것, 수계 중심으로 사회를 재구성하는 것이야말로 자연회복의 끝판왕이 된다. 다시 말해, ‘노력의 끝’은 생명지역주의의 완성을 의미한다.
산업화, 도시화, 정치가 무너뜨린 ‘생명문화지역’
사실 세계 어딜 가나 산업화 이전의 사람들은 수계 중심으로 마을과 도시를 만들어 살아왔다. 그러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산과 강이 만들어 낸 자연의 흐름보다는 경제적 효율성에 따른 지역 분할을 추구하면서 생태적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마저도 몇몇 대도시에 모든 것이 집중되면서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이를 보며 어떤 이들은 지방에 인간이 없어지면 자연이 되살아나는 것 아니냐고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지역이란 순수한 생물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생명+문화’ 지역을 말한다. 온전히 표현하자면 ‘생명문화지역’이다. 전라도만 하더라도 판소리와 농악에 좌도와 우도의 구분이 있고, 서울의 한강 유역에도 강남과 강북의 문화가 다르다. 생명지역은 특정 생태지역에 인간이 자연과 교류하면서 일군 문화가 어우러져 생성된다. 예컨대 판소리 사설만 잘 들어보아도 거기에는 전라도 지역의 역사와 정서, 지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런 문화를 잘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생태와 지리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필수이다.
기후위기의 궁극적 대안-생명지역주의
생명지역주의가 왜 기후위기의 궁극적인 대안인가 하면, 사람들의 문화와 생활양식(lifestyle)을 지역의 생태적 조건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문화는 지역의 생태적 조건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것이었으나 산업화 이후에는 철저히 시장의 요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무리 바람직할지라도 돈이 안 되는 문화는 사라져갔다. 생명지역에서는 문화와 생활양식 만들기와 수계의 생태적 회복이 동시에 이루어지므로 일종의 ‘공동창조’(co creation)가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생명지역에서의 문화와 생활양식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2009년 도솔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온 <에코토피아 비긴스> (어니스트 칼렌버그 저, 최재경 역)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 행정구역 지도를 살펴보면 도시와 마을의 경계가 수계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 행정구역이란 것도 결국은 오랫동안 생명지역 안에서 발전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까 말했듯 산업화 이후 그 경계가 생명지역과 달라진 곳이 많아졌다. 특히 인구비례로 선거구를 조정하면서 정치적 지역 경계는 생명지역과 더 많이 어긋나고 말았다. 만약 지금과 같은 대도시 중심의 발전 전략을 고수하면 언젠가 지방은 소멸되고 대신 지방은 도시인의 리조트 공간이나 도시를 위한 단순한 식량 생산 기지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선거 때마다 인구가 부족한 시골 지역을 이리저리 떼어다 붙여도 지역발전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감투놀이만 계속될 것이다. 지역이 발전하려면 지역주민과 문화경제적 기반,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건강한 생태지역이 있어야 하는데 이 세 가지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백날 선거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수계에 기반한 직접 민주주의
생명지역주의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는 체제이다. 우리는 서구에서 들어온 애매한 대의 민주주의를 하고 있는데, 아마도 지금은 대부분의 국민이 저 민주주의가 ‘대의(代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말로만 민주주의’를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은 대안을 모르기 때문이다. 대안은 ‘직접 민주주의’이다. 그것도 ‘수계’에 기반한 직접 민주주의이다.
수계에 근거하면 힘있는 정치인이 멋대로 선거구를 조작하는 게리맨더링도 불가능하며 인구비례로 선거구를 이리저리 갖다 붙이는 일도 없어진다. 모든 수계는 동등한 가치와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으며 독립적이면서도 전체의 부분으로 작동한다. 홀로 유지되는 수계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낙동강 상류의 수계와 하류의 수계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상류 주민이 내린 결정이 하류 주민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수계 민주주의에서 ‘민주적 절차에 따라’라고 말할 때는 수계 권역 전체에 대한 영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생명지역에 근거한 민주주의는 상당히 복잡하면서도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생태학 및 생태지리에 대한 기본 인식은 물론 부분과 전체를 오가는 유연성까지 갖추어야 한다.
1000개 민회, 5개 대권역 독립공화국, 그리고 연방공화국
남한의 수계는 크게 5개의 대권역과 150여 개의 중권역, 그리고 1000개가 넘는 소권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숫자를 대략 말하는 이유는 발표 자료마다 수치가 다르고, 정부가 공개한 자료는 오로지 물관리 차원에서 만든 자료이기 때문이다.
먼저 5개의 대권역은 한강, 낙동강, 영산강, 금강, 그리고 해안의 독립 수계를 말한다. 중권역은 큰 지류를 끼고 있는 수계를, 소권역은 그 지류의 지류를 끼고 있는 수계를 말한다. 우리나라 지방선거 지역구가 2024년 현재 779개이므로, 수계 민주주의로 재편성할 경우 지역구가 30% 정도 늘어난 1000개 정도 된다. 만약에 우리가 수계 민주주의를 실시한다고 하면, 1000개의 독립된 생명지역 민회와 5개의 대권역 독립공화국, 그리고 이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연방공화국이 될 것이다. 이런 변화는 과거 전체주의적 공산당 정권도 하지 못할 정도의 대변혁이므로 정치적 어젠다로 제안하지는 않겠다. 다만 시민사회운동으로서 제안하는 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지역마다 풀뿌리 환경운동단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 환경단체를 기존의 행정구역 단위가 아니라 수계 단위로 재편성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원래의 운동 취지에 더 들어맞는다.
예컨대, 1991년 두산의 구미공장에서 페놀 유출사건이 터졌을 때 구미 아래의 낙동강 유역에 사는 주민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은 역사 이래 최대의 강물 오염 사건으로서, 이때에 낙동강 유역의 시민 환경단체가 수계 단위로 재편성되었다면 이후로도 반복된 페놀 유출사건을 막아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사회운동단체가 적과 싸우면서 닮아간다고, 정부의 중앙집권적 운영체제를 흉내 내는 것은 하루빨리 고쳐져야 한다.
만약 환경단체가 수계 중심으로 재편성되면 우리나라는 중앙행정관리체제와 민간에 의해 운영되는 생명지역 민회가 공존하는 이중의 거버넌스(gorvernance) 체제가 자리잡게 된다. 어느 나라이건 대의 민주제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이유는 주기적으로 선거일에 나가 표만 던지고 오는 일반 국민들의 낮은 정치의식 때문이다. 정치인들도 그것을 알고 당선된 후에는 전혀 딴 사람처럼 행세한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 지역을 통치할 정도의 정치의식을 가진 지역주민이 버티고 있으면 정치인들이 함부로 할 수가 없다. 결국 기성 정치인들도 이중의 거버넌스를 인정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고대 동아시아에 있었다는 ‘이군일민(二君一民)’ 체제가 만들어질 것이다.
소나무 의견도 묻는 생명체 전체 민주주의 ‘만물공동회’
얼마 전 민들레 광장에 주요섭 선생이 ‘만물공동회’를 제안했는데, 현실 정치에서는 어림도 없는 얘기이다. 그러나 생명지역주의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생명지역주의의 핵심 사상은 ‘심층생태학’과 ‘생명중심주의’이기에 지역의 통치 주역으로서 비인간도 인정된다. 예컨대 어떤 소권역 수계에 고라니와 소나무가 지역을 대표하는 생물종이라면 그 종의 대리인을 민회에 보낼 수 있다. 고라니와 소나무가 직접 참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소통의 문제가 있어 어쩔 수 없이 대리인을 내세우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생물의 특성을 이용한 첨단 장비를 통해 직접 참여도 가능하다는 의견이 있지만 아직은 일반화하기에 무리가 있다. 그렇게 되면 소나무 숲에 소각장이 들어설 경우 소나무의 의견을 묻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된다.
만물공동회(Council of All Beings)는 1986년 호주에서 열린 한 생태 관련 워크샵에서 존 시드(John Seed)와 조안나 메이시(Joanna Macy)가 처음 제안하여 실시한 이래 주로 서구에서 생태적 각성을 위한 의식 또는 제례 정도로 이해되고 있지만, 샤머니즘이 지배했던 고대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의례 행위였다.
만약 생명지역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이군일민 체제’가 이루어지면 만물공동회는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를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인간들이 자기 멋대로 규정한 자유, 평등, 정의의 의미가 생물권 전체로 확산되면서 민주주의의 민자가 다른 단어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불교에서 말하는 화엄 세계가 어렴풋이 그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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