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법 시급
재무 지표 자율 공시만으론 '밸류업' 한계
ETF 개발과 세제 지원도 실효성 떨어져
이사의 책임 강화해야 지배주주 전횡 견제
“여야, 22대 국회서 신속히 상법 개정해야”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해소하겠다며 정부가 발표한 ‘밸류업 가이드라인(프로그램)’이 27일 시행에 들어갔다. 매출과 이익 증가율에 더해 연구개발(R&D) 투자 등 기업 성장을 보여주는 지표를 자율 공시에 포함하고 3분기 이후 밸류업 지수 개발과 연계 ETF(상장지수펀드)도 내놓는다는 계획이다.
자사주 소각과 배당 확대 등 기업의 주주환원 정책에 대한 세금 감면과 배당소득 분리 과세 방안 등도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정도로 한국 상장기업들의 가치를 높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핵심 원인인 기업지배구조 개선안이 빠졌기 때문이다. 특히 일반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를 추가하는 상법 개정이 시급한데 이에 대한 계획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현행 상법에 따르면 이사의 의무는 법령과 정관의 규정에 따라 회사를 위해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고만 명시돼 있다. 그러다 보니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불거진 에버랜드 전환사채와 삼성물산 부당 합병 건을 비롯해 지배주주 이익만을 위한 쪼개기 상장 등으로 일반주주의 이익이 침해되더라도 해당 의사결정을 한 이사에게는 아무런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대법원도 지난 2009년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에서 이사의 충실의무 위반 여부와 관련해 회사와 주주 이익을 별개로 구분하고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은 회사의 이익에 한정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뿐 아니라 일반주주로 확대하는 내용으로 상법을 개정해야 재벌 총수 등 지배주주의 이익을 위해 일반주주가 피해를 보는 의사결정을 이사회에서 견제할 수 있게 된다.
정부도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9일 제1차 경제이슈점검회의에서 “투자자들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방안을 신속히 마련해 달라”고 했다. 이 말은 이사의 충실의무를 확대하는 상법 개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국회에서도 이미 관련 법안이 발의돼 있다. 경제개혁연대에 따르면 21대 국회에서 이사의 충실의무를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은 2건인 것으로 파악된다.
더불어민주당 이용우 의원이 대표 발의한 상법 개정안(의안번호 2114916)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추가해 회사에는 영향이 없더라도 일반주주의 가치가 훼손되면 이사에게 주주에 대한 보호 의무를 부과하는 게 골자다. 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대표 발의한 상법 개정안(의안번호 2119370)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회사 외에 총주주를 추가해 똑같은 효과를 갖도록 했다. 하지만 두 개정안은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깊이 논의되지 못했고 21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자동 폐기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영국 등 주요국은 법령이나 판례법으로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duty of royalty)를 강제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지침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법조문은 같지만 해석론으로 이사의 주주에 대한 의무를 인정한다. 자본시장 선진국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고려하도록 해야 주주 보호의 사전적, 사후적 대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이사가 지배주주의 이익에 충실한 의사결정을 하더라도 그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일반주주의 부가 지배주주로 이전되는 행위를 막기 어렵다. 반면 이사의 충실의무를 확대하는 상법 개정이 이루어진다면 이사는 사전에 주주 간 이해충돌 여부를 포함해 의사결정이 전체 주주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검토해야 한다. 이사가 이런 의무를 소홀히 하면 주주가 자신의 손해에 대해 법적 권한을 행사할 수도 있다. 이사들의 의사결정이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상법만 개정해도 쪼개기 상장과 부당 합병 등 지배주주만을 위한 이사회 결정을 막을 수 있고 이는 재벌기업의 병든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문제는 상법 개정을 주도해야 할 법무부가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법무부는 올해 초 윤 대통령이 상법 개정 추진을 지시했을 때도 “주주 보호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이런 규정이 생기더라도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의미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며 법 개정을 가로막았다.
법무부는 원칙적으로 회사 이익과 총주주 이익은 일치하므로 회사에 대한 이사의 책임 등에 관한 현행 상법 규정을 통해 주주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박주민 의원이 대표 발의한 상법 개정안 검토보고서에서는 회사의 이익과 일부 주주의 이익이 충돌하면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이 있고 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를 대상으로 포함하는 건 상법상 이사와 주주의 관계를 전면 재정립하는 것이라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법무부의 이런 견해는 한국 재벌기업의 지배구조와 의사결정 과정을 외면한 형식 논리일 뿐이다. 쪼개기 상장과 인수합병 등 많은 경우 회사의 이익과 총주주의 이익이 일치하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다. 우리 법원은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별개로 구분하고 이중 이사의 책임은 회사의 이익 침해에 한정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반주주가 이사회 결정으로 피해를 봐도 이사에 대해 책임을 물을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의미다. 상법을 개정해 주주의 비례적 이익 보호 규정을 두면 이런 문제점을 해소할 수 있다. 법무부 주장처럼 단순한 선언적 의미 이상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재계 반발도 상법 개정이 지체되고 있는 이유다. 이사의 충실의무가 확대되면 이사에 대한 고소, 고발이 남발할 것이고 이는 기업의 모험자본 투자를 막는 등 혁신과 성장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경제개혁연대는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한다. 이사의 충실의무와 주의의무(duty of care)를 혼동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단순히 이사가 주의의무를 위반한 것만으로는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 주주의 비례적 이익 보호 규정은 회사의 이익과 전체 주주의 이익이 충돌할 때 전체 주주의 이익을 고려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주로 계열사 간 합병이나 회사분할 등 기업의 조직재편 또는 회사와 특수관계인 간의 상품과 용역거래에 한정적으로 적용된다. 회사의 모험자본 투자나 혁신성장과는 관련이 없다.
경제개혁연대는 “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포함하는 상법 개정안은 비록 야당에서 먼저 제안된 것이지만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기업 밸류업 정책의 실효성을 담보할 핵심적인 사항”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서둘러 상법 개정안을 마련하고, 22대 국회 개원 직후에 여야 합의로 처리함으로써 국내 기업들의 거버넌스를 한 단계 상승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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