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충실의무 확대’ 상법 개정 반대
억지 논리·공포 마케팅으로 여론몰이
혁신 투자 저해·소송 남발 주장도 과장
상법 개정은 총수 견제할 최소한의 장치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가 재벌기업 총수를 대변하는 ‘본능’을 다시 드러냈다. 기업 지배주주의 전횡을 막기 위해 일반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를 확대하는 상법 개정에 반대하는 보고서를 낸 것이다. 한경협은 박근혜 정부 시절 '정경유착'의 주범으로 지탄받았던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윤석열 정부 들어 이름만 바꾼 재계 단체다.
야당은 물론 정부도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의 핵심 원인인 재벌 구조의 병폐를 줄이려는 목적으로 상법상 회사에 국한한 이사의 충실의무를 일반 주주로 확대하는 제도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지배주주와 일반 주주의 이해충돌이 생겼을 때 이사회 결정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주요 20개국(G20)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도 대부분 일반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를 법률이나 판례로 명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재벌기업이 많고 총수와 직간접적 인연이 있는 이들이 사외이사에 포진해 있다. 이런 태생적 구조 탓에 일반 주주의 이익이 현저하게 침해되는데도 지배주주에 유리하면 강행되는 관행이 굳어졌다. 이렇게 합리적 의사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이 반복되면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이 나타났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은 이를 시정하기 위한 첫발이자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의 이정표 역할을 할 상징적 조치다.
그런데도 한경련은 사실을 왜곡하고 억지 논리와 공포 마케팅으로 상법 개정을 반대하고 있다. 그것도 직접 반대 성명을 발표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문가 보고서 형식으로 교묘하게 여론전을 펼치고 있다. 정경유착을 주도하며 재벌 총수 일가의 이익을 챙기고 ‘전문가 의견’이라며 거짓 주장을 일삼던 예전의 못된 습성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한경련이 지난 10일 공개한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전제로 하는 이사의 충실의무 인정 여부 검토’ 보고서도 여기에 해당한다.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한경협 의뢰로 작성한 것인데 상법 개정이 국내 회사법의 근간을 흔들 것이라는 주장이 담겼다.
보고서에 따르면 상법상 이사는 주주총회 결의로 회사가 임용한 회사의 대리인이고 이사의 보수도 정관이나 주총 결의로 회사가 지급하기 때문에 민법과 상법상 이사의 충실의무는 위임계약을 맺은 회사에 한정된다. 영국과 일본, 독일, 캐나다 회사법에서도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회사에 한정된다고 보고서는 주장했다. 미국 델라웨어주 회사법은 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가 포함됐으나 이는 회사 이익이 곧 주주 이익이라는 일반론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사가 회사 이익과 별개로 주주 이익에 충실해야 하는 규정으로 볼 수 없다고 해석했다.
보고서는 상법이 개정되면 소액주주가 당장 배당 확대나 이익 분배를 요구해 모험적 투자가 저해될 수 있고 이사는 일반 주주들로부터 충실의무 불이행을 빌미로 손해배상소송을 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주식회사 경영권은 주주가 보유한 지분만큼 의결권을 행사하고, 다수결에 의해 안건을 결의하도록 돼 있는데 이런 원칙을 훼손할 수 있다고도 했다. 소액주주의 이익이 지분보다 과대평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권재열 교수는 “주주의 비례적 이익 보장은 현실화시킬 수 없는 이상적 관념에 불과하며 이를 상법에서 강제하면 회사의 장기적 이익을 위한 경영 판단을 지연시켜 기업 경쟁력이 저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럴듯한 근거와 논리를 펼치고 있으나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한국 기업 현실과도 맞지 않는 주장이다. 상법 개정의 필요성이 제기된 가장 최근 사건은 2020년 LG화학의 LG에너지솔루션 물적분할이다. 배터리 사업에 대한 기대로 올랐던 LG화학 주가는 자회사의 ‘쪼개기 상장’ 소식에 크게 떨어졌다. 이 과정에서 소액주주가 큰 피해를 봤다. 이에 지배주주만의 이익을 위한 이사회 결정을 견제할 수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재벌기업 구조에서 이런 일은 반복돼 왔고 앞으로도 그럴 개연성이 매우 높다. 미국과 일본, 유럽처럼 재벌기업이 많지 않은 나라와 사정이 다르다. 한국의 현행 상법으로는 일반 주주가 피해를 봐도 지배주주가 원하면 이사회가 막을 방법이 없다. 그래서 상법을 개정해 이사의 충실의무를 일반 주주로 확대하자는 것이다. 상법 규정이 바뀌면 대법원 판례도 달라질 수 있다.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가 강제되면 이사들이 혁신과 성장에 필요한 모험적 투자를 꺼릴 것이라는 주장도 과장된 것이다. 충실의무는 모든 사안에 적용되는 게 아니다. 김우찬 경제개혁연구소 소장(고려대 교수)에 따르면 충실의무란 총수 일가나 경영자의 사적 이익이 일반 주주의 이익과 충돌하는 사안에만 적용되는 의무다. 투자나 기업 인수로 주주들이 손해를 보더라도 애초에 이사들이 '주의의무'를 다했다면 손해배상책임이 없다. 주의의무와 충실의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김 소장은 “독립이사로만 구성된 위원회가 동의했거나 주주총회에서 일반 주주 과반이 동의했다면 이해관계 상충이 해소되었다고 보고 거래의 공정성이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이사에 대한 소송이 남발할 것이란 우려도 기우에 불과하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에 따르면 충실의무는 주주 한 명 한 명이 아닌 ‘전체’에 대한 것이다.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가 도입돼도 이사회와 경영진은 ‘선관주의 의무’에 따라 ‘회사’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경영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그것이 곧 모든 주주의 이익이 된다.
다만 주주들(지배주주와 일반 주주) 사이에 유불리가 다를 때 충실의무가 적용된다. 계열사 간 합병과 기업 분할, 내부거래 등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가 적용되는 사안은 많지 않다. 그럴 때는 지배주주에만 유리하게 결정하지 않고 불가피하게 피해가 발생하면 피해를 보는 주주에게 적절하게 보상하면 된다. 소송이 남발할 소지가 별로 없다는 뜻이다. 이사에 대한 소송이 남발될 것이라는 주장은 상법 개정을 막기 위한 ‘공포 마케팅’에 가깝다.
정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5일 상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은 상법 제382조 3(이사의 충실의무) ‘이사는 회사를 위해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조항에서 ‘회사’를 ‘주주의 비례적 이익과 회사’로 바꿨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투자자들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기업 지배구조 개선에 대해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라”고 했고,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기재부와 금융위원회, 법무부가 6~7월 공청회를 통해 구체적 방안에 대해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개인 의견으로 상법 개정을 적극 지지한다고 밝힌 바 있다. 모두가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는 데도 반대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김우찬 소장은 “상법 개정에 반대하는 건 총수 일가나 경영자의 사적 이익 추구를 옹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했는데 한경협은 새겨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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