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섭 칼럼]적-녹 연대는 이제 그만

정치의 차원변화, ‘진리정치’에서 ‘생명정치’로

폭발한 ‘조국 현상’, 생명정치 세력 형성할 때

새로운 차원의 진영 만들기, ‘녹색계급’

생생당, 생명-생태 연대는 어떠한가?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주요섭 (사)밝은마을생명사상연구소 대표
주요섭 (사)밝은마을생명사상연구소 대표

총선이 끝났다. 녹색-정의 연대도 끝났다. ‘적-녹 연대’, 진보정치와 녹색정치의 연대 실험이 실패로 끝난 것이다. 나에겐 기묘한 조합이었지만, 국회의원 한 석에 대한 갈망과 이를 해소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 선택으로서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녹색당은 운이 없었다. 2020년 총선에서는 기회를 놓쳤다. 2024년 총선에서는 기회가 없었다.

적-녹 연대는 이제 그만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나에게 4.10총선의 관전 포인트는 세 가지였다. 첫째, 기존의 보수/진보의 구도를 넘어서 차원변화의 ‘변이’가 출현할 것인가? 둘째 정동(情動)의 생명정치는 어떻게 작동되는가? 셋째, 양대 진영정치 사이 녹색정의당은 생존할 수 있는가?

총선은 끝났고, 결과는 명료하다. 첫째, 유의미한 변이의 신호는 목격되지 않았다. 둘째, 조국혁신당의 대성공을 통해 ‘정동정치’의 힘이 입증되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셋째, 녹색정의당은 생존에 실패했다. 녹색당의 미래도 불투명해졌다.

녹색정의당의 실패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윤석열 정권 심판이라는 선거 구도상 충분히 예측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총선을 통해 ‘적-녹 연대’는 강제로 작별을 당했다. 적-녹 연대의 효과와 잠재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거꾸로 생각할 수도 있다. 녹색정치가 ‘진보-보수 구도’와 결별하고 새로운 길을 갈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 녹색당도 민주노총과 연대할 수 있다. 개혁신당과도 정치적 거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진보/보수의 프레임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녹색정치의 퇴색을 자초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진보는 녹색“이라는 슬로건은 녹색의 오염에 가까웠다. 그리고 적지 않은 순수한(?) 생태, 생명, 환경친화적 유권자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기후격변의 현실에서 녹색은 분명 ‘진보적’ 가치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녹색정치는 성장, 발전, 직선적 진보의 근대적 패러다임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 아닌가? 더욱이 ’선거 전략‘으로서도 그 효과가 의문이었다.

한국의 녹색정치는 이제 ’진보/보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프레임의 차원변화가 요구된다.(물론 ‘녹색=진보’도 ‘녹색은≠아니다’도 하나의 프레임이다.)

 

16일 국회에서 열린 녹색정의당 회의에서 장혜영 원내대표 직무대행이 발언을 하고 있다. 2024.4.16. 연합뉴스
16일 국회에서 열린 녹색정의당 회의에서 장혜영 원내대표 직무대행이 발언을 하고 있다. 2024.4.16. 연합뉴스

정치의 차원변화: ‘진리정치’에서 ‘생명정치’로

여기서 ‘차원 변화’란 세계관의 변화나 핵심 가치의 교체가 아니다. 세계관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문명사적 전환의 한 측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인류문명은 동·서를 막론하고, ‘정치적 진리’를 물었다(‘정치적 올바름’이라고 말해도 좋다.). ”정치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그러나, 생명정치의 관점에서는 ‘정치’ 역시 사회-우주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세상의 다른 모든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정치’라는 사회적 체계 역시 근본적으로 ‘공(空)’한 것이다. 구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근대적 정치체계 역시 종식될 수 있으며,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질 수도 있다.

프랑스의 생명철학자 질 들뢰즈를 빌어 말하면, 이제부터 철학은 ‘진리의 사유’가 아니라 ‘생명의 사유’가 되어야 한다. 정치에 빗대어 말하면, 이제부터 정치는 ‘진리의 정치’가 아니라, ‘생명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 생명정치는 ‘진리가 무엇인가’를 묻지 않는다. 특정한 이념과 올바름을 앞세우며 일상의 삶과 사회적 행위를 재단하지 않는다. 생명정치는 삶의 곤고함과 생명의 고통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된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의 안녕’과 ‘생명의 창조적 진화’를 지지한다. 생명의 감응에 바탕을 둔 ‘우주-사회적 서사’의 공동창조와 실험을 소망한다.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 더불어민주당 전재수·박주민 의원, 새로운미래 김종민 의원, 진보당 강성희 의원, 녹색정의당 장혜영 의원 등이 19일 오후 서울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채상병 특검법 신속 통과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4.4.19. 연합뉴스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 더불어민주당 전재수·박주민 의원, 새로운미래 김종민 의원, 진보당 강성희 의원, 녹색정의당 장혜영 의원 등이 19일 오후 서울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채상병 특검법 신속 통과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4.4.19. 연합뉴스

오늘날 다수의 청년들은 ‘삶의 의미’를 의심한다.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서 관찰되는 국제정치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가치가 ‘무가치’해졌다. 탈진실의 시대를 실감한다. 민주당의 ‘민주주의’도 ‘국민의 힘’도 ‘자유’도 더 이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이야기한 대로, 민주의 대한민국도 자유의 대한민국도 ‘상상의 질서’인 게 틀림없다. 민주주의(democracy), 즉 ‘민중의 지배’도 시효를 다해가고 있는지 모른다.

녹색정치는 그 어느 정치집단보다 ‘진리정치’에 진심이었다. 그 어느 정치집단도 따라올 수 없는 ‘선의(善意)의 정치’를 해왔다. 그러나, 의도와 관계 없이 기후격변의 현실을 판정하고, ‘정치적 올바름’ ‘정체성의 정치’로 수많은 정치를 재단하며 ‘아/타’를 섬세하게 구별했다.

그런데, 민주당과 국민의 힘을 포함해 기존의 정당들의 이익정치는 ‘흥미/이익(interest)’을 중심으로 ‘아’와 ‘타’를 나눈다. 영어 ‘interest’는 사전적으로 ‘흥미’라는 뜻과 함께 흔히 ‘이익’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정치적 ‘가치와 의미’가 ‘이익과 흥미’에 조응하면 힘을 발휘하지만, 둘 사이가 어긋나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시/비(是/非)’의 정치적 도식의 표면 아래 생명의 정동(情動)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생명정치에서 생명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다. 괴로움과 허무함, 아픔과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분열과 창조와 진화의 문제이다. ‘불평등’도 ‘진보적 이념’ 이전에 생명의 안녕과 정동의 문제이다.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근대사회의 치명적인 문제는 ‘생명과 사회의 파열(破裂)’이다. 아이들을 낳을 수도 키울 수도 없다. 기존 체계(시스템)의 종식과 교체가 불가피하다.

 

덴마크 적녹동맹(Red-Green Alliance)의 정치 대변인 펠레 드라그스테드가 지난 4일 코펜하겐에서 열린 당 연례 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2024.5.4. EPA 연합뉴스
덴마크 적녹동맹(Red-Green Alliance)의 정치 대변인 펠레 드라그스테드가 지난 4일 코펜하겐에서 열린 당 연례 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2024.5.4. EPA 연합뉴스

생명정치, 세력을 형성할 때다

생명정치는 바이러스가 그렇듯이 전염을 통해 확산한다. 이미 기존 체계에서 떠날 수밖에 없는 ‘생명의 무리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혹은 부족적인 은둔이나 가질 수 없는 것들의 선택적 포기를 통해, 혹은 증오를 통해 그것을 표현한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세계 최저의 출생률은 두말할 것도 없이 결정적인 증거이다.

그리고, 전염은 바이러스가 그렇듯이 폭발적인 계기가 있다. 선거판이라는 시공간도 그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 총선에서 ‘조국현상’이라는 바이러스의 폭발을 목격했다. 조국은 스스로 정치적 사건이 되었다. 모든 정치적 성공이 그렇지만, 조국은 무아(無我)의 상태에서 스스로 새로운 정치적 변이가 되어 폭발적인 정치적 감염을 격발시켰다.

폭발한 ‘조국 현상’

이러한 정치적 사건의 과정에서 ‘무리(黨)’가 형성된다. 세력화가 이루어진다. 19세기 중후반 수십 년간의 개접/파접(開接/罷接)의 감응체험과 ‘영해민란’과 같은 수많은 정치적 사건 등을 통해 동학의 무리(東學黨)가 형성되었다. 반복적이고 재귀적인 무리 경험이 또 다른 무리를 생산한다. (무리와 주체는 구별된다. '주체'가 의식적이고 초월적이라면, '무리'는 신체적이고 경험적이다.)

이윽고 무리는 세력이 된다. 생명정치 세력 역시 깊은 산속에서 수련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날 수 없다. 한 번의 사건 만들기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무리가 형성되고, 생명정치 사건이 거듭되면서 세력은 확대 강화된다. 다시 말하면, 사건을 통해 출현하고 반복을 통해 구성된다. 노동자계급이 파업을 통해 형성되고, 태극기부대가 태극기시위를 통해서 형성되듯이. 생명평화 탁발순례 5년을 통해 생명평화 진영이 생겨났듯이.

 

지난 5월 6일 영국 헤이스팅스에서 열린 연례 메이데이 공휴일 축제 잭 인 더 그린(Jack In The Green) 퍼레이드. 2024.5.4. 로이터 연합뉴스
지난 5월 6일 영국 헤이스팅스에서 열린 연례 메이데이 공휴일 축제 잭 인 더 그린(Jack In The Green) 퍼레이드. 2024.5.4. 로이터 연합뉴스

새로운 차원의 진영 만들기, ‘녹색계급’

근대적 정치체계 안에 있는 한 생명정치 역시 ‘여/야’의 이원적 코드와 진영정치를 넘을 수 없다. 문제는 새로운 진영 만들기의 가능성이다. 생명/반생명의 구도가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다. 브뤼노 라투르가 이야기하는 계급화(classification), 즉 ‘녹색계급의 출현’과 맥을 같이한다.

문명전환기의 현실에서 생명정치는 과도적이고 잠정적인 정치형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초기 서유럽 녹색당이 그렇듯이 ‘반정당의 정당’ 형식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역설적일 수밖에 없다. 문명전환 정당은 자기를 부정하며 자기를 주장해야 한다. ‘자기를 부정하며 자기를 보존하는’ 생명의 역설에서 배울 수 있다. 예컨대, ‘정강정책’ 없는 정당을 상상할 수도 있다. 방향성과 ‘생명/반생명’의 코드만 있는 정당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프론트(front) 정당의 형식을 띨 수밖에 없다(아일랜드, 인도 등 기후문제의 실제적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Climate Front>라는 단체가 생각난다.) 기존의 진보/보수, 좌파/우파의 구도에서 이탈한 모든 무리들이 프론트에 참여할 수 있다. 특히 섬세한 생명감수성을 지닌 기독교와 불교 등 종교인들과 살림하는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흐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기로에 선 지구. 지구의날을 하루 앞둔 21일 오후 인천의 한 야산에 쓰레기들이 녹색 숲을 먹어가 듯 쌓여있다. 2024.4.21. 연합뉴스
기로에 선 지구. 지구의날을 하루 앞둔 21일 오후 인천의 한 야산에 쓰레기들이 녹색 숲을 먹어가듯 쌓여있다. 2024.4.21. 연합뉴스

생생당, '생명-생태 연대'는 어떠한가?

그러나, 생명정치의 무리나 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존의 녹색정치의 성과도 매우 소중하다. 이제 ‘적-녹 연대’가 아니라, 이를테면 ‘생-생 연대’가 필요하다. ‘생명’-‘생태’ 연대가 그것이다. 서구의 생태주의에 입각한 정치적 실험과 한국 및 동아시아의 생명사상에 바탕을 둔 정치적 실험이 본격적으로 만나야 하는 것이다.

사실은 나름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1994년 동학을 공부한 생명사상가 김지하와 서학을 공부한 생태정치학자 문순홍이 만나서 「생명민회를 제안한다」를 같이 쓰고 함께 책(『생명과 자치』, 후에 『생명학1,2』로 재출간)을 내며, <생명민회(생명가치를 찾는 민초들의 모임)>를 창립한 바 있다. 그리고, 2006년과 전후 지금의 녹색당 창당 이전 <초록정치연대>에는 당시의 환경운동 그룹, 여성운동 그룹과 함께 한살림 활동가 등 다수의 생명평화운동 그룹이 참여한 한 바 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렇듯이 ‘이식(移植)’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유럽 녹색정치의 성공을 한국에 그대로 이식할 수는 없다. 한국형 녹색정치가 요구된다. 한국을 비롯해, 일본과 대만 등 동아시아에서의 녹색정당의 희미한 존재감은 이를 반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생명-생태 연대가 지구적 차원에서 문명전환 정치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프랑스의 생태사상가 라투르는 생태문명으로의 전환과 함께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를 제안한 바 있다. 여기서 코스모폴리틱스는 맥락상 ‘사물정치’로 이해되지만, 단어만으로도 우주론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우주생명학’과 ‘개벽담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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