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섭 칼럼] 유럽의회 선거 성찰과 ‘지리산 연찬’
유럽의회 선거에서 녹색정치는 왜 실패했나?
‘그린래시’, 녹색정치가 더 깊고 넓어지는 차원변화
백래시와 생존주의, 그리고 사회의 성찰 능력
‘문제해결의 정치’와 ‘꿈의 정치’-유럽에서 배우기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는 7월 12일 지리산 실상사에서 ‘지리산 연찬’이라는 이름으로 정치토론회가 열린다. 주제는 "4.10 총선에서 전환정치는 어떻게 실패했을까?"이다. "성찰과 다시 전환정치의 모색"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지리산 연찬 참가신청 주소: https://forms.gle/u4QNSw19thzDw3sS9)
절집에서 열리는 정치토론: 전환정치는 어떻게 실패했을까?
절집에서 정치토론이라니? 그런데, 이미 실상사는 정치학교의 장이다. 2021년 여름부터 3년간 ‘문명전환의 정치’를 내걸고 ‘지리산 정치학교’라는 이름으로 정치교육이 이루어졌다. 6회에 걸쳐 80여 명이 참석했다. 계절마다 ‘지리산 연찬’이 열린 지도 벌써 7, 8년이 되었다. 때문에 주최 측에서는 이번에 열리는 정치토론이 "지난 4년 전 봄부터 4.10 총선을 향해 열었던 문명전환정치 연찬(硏鑽)의 장을 마무리하는 자리"라고 밝히고 있다. 지리산 산중에서 일군의 무리들이 ‘전환정치’, 정확히 말하면, ‘문명전환의 정치’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전환정치’는 ‘문명전환 정치’와 ‘체제전환 정치’를 포함하는 중층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양대 정당 중심의 정치판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실패’란 바로 양당 지배질서 흔들기의 실패를 의미한다. 주최 측의 취지문을 빌자면, 이번 4.10 총선이 "중층적 위기 속에서 배제하고 독점하는 정치를 뒤바꿔야 할 절박함에도 4.10 총선은 아무런 의제 없이 더 깊은 양당체제의 고착화로 끝난 것"이다. "양당체제를 가로지르려 했던 제 3지대 정치와 기후정치는 큰 울림 없이 사그러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토론회는, 전환정치의 ‘모색’이나 ‘비전’ 이전에 ‘실패’에 대한 성찰을 일차적인 목표로 한다. 4.10 총선에서 전환정치를 꿈꿨던 스스로를 성찰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성찰을 통해 "우리 안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펼쳐 다시 전환정치를 상상하는 자리를 갖게 할 수 있는 힘"을 기르려는 것이다. 문명전환 정치의 꿈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셈이다.
그런데, 한국의 총선이 끝난 지 얼마 안 돼 우리는 또 하나의 정치적 실패, 이를테면, 유럽판 ‘전환정치’의 실패를 전해 듣고 있다. 6월 6일~9일에 실시된 유럽의회 선거 결과가 그것이다.
유럽의회 선거: 녹색정치는 어떻게 실패했을까?
이번 유럽의회 선거는 두 가지 점에서 전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하나의 면에는 녹색정당이, 다른 한 면에는 극우정당이 있다. 중도우파가 일정한 세력을 유지한 가운데, 극우정당은 약진하고 녹색정당은 추락하는 정반대의 자리바꿈이 일어난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 등 각국의 녹색당과 진보 성향 정당들이 연대해 꾸린 정치 그룹인 ‘녹색당-유럽자유동맹’은 기존 71석에서 19석이나 적은 52석을 얻는 데 그쳤다.(2024년 유럽의회의 전체 의석수는 720석이다.) 강경 우파 정치 그룹인 ‘유럽보수와 개혁’(ECR·76석), 극우 성향의 ‘정체성과 민주주의’(ID·58석)에 밀리면서 원내 4당에서 6당으로 떨어졌다. 직전 2019년 선거에서 역대 최다 의석을 얻으면서 당시 선거의 주인공이 되었던 점에 비추어보면, 추락에 가까운 실패다.
특히 유럽정치, 특히 녹색당을 대표하는 독일의 경우를 살펴보면, 실패가 더욱 또렷해 보인다. 유럽의회 선거 결과 ‘기민/기사연합’이 득표율 30%(‘19년 대비 +1.1%p)로 압승을 거두었고, 극우 성향 정당인 ’독일대안당‘이 15.9%(+4.9%p)로 2위를 기록했으며, 신호등 연정을 구성하는 사민당, 녹색당, 자민당 3당은 각각 13.9%(-1.1%p), 11.9%(-8.6%p), 5.2%(-0.2%p)를 기록하여 참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독일대안당'이라니, '대안'이라는 말 역시 더 이상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다. 독일대안당의 독일어 명칭은 '독일을 위한 대안'(Alternative für Deutschland)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결과가 일어난 걸까? 녹색정치의 약진이 5년만에 꺾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분석이 뒤따르고 있지만,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이른바 '그린래시(green-lash)'이다. '그린래시'는 친환경을 뜻하는 '그린(Green)'과 반발을 뜻하는 '백래시(Backlash)'의 합성어이다. 기후위기 정책에 앞장섰던 유럽 곳곳에서 친환경에 대한 반발이 그만큼 거세다는 말이다. 이른바 그린래시의 조짐은 이미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물가 상승과 환경규제에 항의하는 강력한 농민시위 등을 통해서 드러난 바 있다. (한국에서는 녹색정치가 본격화되기도 전에 강력한 '그린래시'를 경험하고 있다.)
요컨대, 극우정당의 득세와 녹색정치의 추락의 배후에는 난민문제와 함께 환경정책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도 중도파가 어느 정도 중심을 잡고 있으므로 이번 실패가 그린딜 등 환경정책의 결정적인 후퇴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환경정책에 대한 반발과 부분적인 후퇴는 불가피해 보인다. 그것은 곧 기후목표의 실행 불가능성과 기후파국의 현실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백래시에 백래시로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또 다른 해법이 있을까?
백래시와 생존주의, 그리고 사회의 성찰 능력
사실 백래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정치적 논리 이전에 일종의 물리법칙이다. '작용과 반작용'이 그것이다. 최근 북한과 러시아의 군사적 결속도 한국과 미국의 군사적 결속에 대한 백래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백래시는 대전환의 증후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수천 수만 년 동안 지속되어온 가부장적 지배질서를 일거에 뒤집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고도 성장시대에서 포스트 성장시대로의 전환과정이나, 팍스 아메리카나의 국제질서에서 포스트 일극체제로의 전환과정에서 일어나는 반발과 혼란 역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백래시는 생존 본능에 가깝다. 그것은 부족적 생존주의로 조직화되기도 한다. 유럽의 극우도 그것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유권자인 인간생명들의 생존 본능을 격발하며 생존주의 이데올로기의 '자기생산체계'를 구축한다.
‘생존주의’는 한국의 사회학자 김홍중이 만든 말로, “생명의 충동과 힘의 영역”을 지칭하는 ‘생존’과 달리 “생존이 조직된 주의(主義)와 지향된 가치”가 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생존’ 투쟁 그 자체가 하나의 이념이 되고, 세계관이자 믿음체계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리’의 움직임이나 ‘부족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태극기부대나 유럽의 농민시위, 반환경·반이민의 정치화도 넓게 보아 집합적 생존주의의 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유럽 의회선거에서의 극우의 승리는 ‘백래시’와 ‘생존주의’에 힘입은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존주의’는 사회 붕괴의 신호다. 생존주의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명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생존 투쟁’을 넘어서 공존의 규칙과 규범을 제도화하는 것이라면, 생존주의의 창궐은 문명 붕괴의 위기를 반증한다. 특히 서유럽은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나름의 공존의 규범과 체계를 구축해왔다. 그런데, 21세기의 1/4분기에 즈음한 2024년 현재 서구 문명의 본고장에서 생존주의와 사회 붕괴의 위태로운 징후가 관찰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생존주의적 쟁투는 나라마다 조금씩 양상은 다르지만, 전 지구적 현상으로 읽힌다. 국내정치의 현장에서도, 국제정치의 무대에서도 동시에 나타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그리고 트럼프와 바이든의 정치투쟁에서 우리는 부족적 생존주의, 정치적 생존주의를 목격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생존주의’와 ‘생존’을 구분하는 능력이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인간 생명은 살기 위해 ‘굴신(屈身)’하고, 또한 살기 위해 ‘저항’하지만, 동시에 굴신하고 저항하는 자신을 자각하는 능력이 있다.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보고, 생각을 생각하는 인간의 성찰능력이 그것이다.
사회에도 그와 같은 성찰능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체계들이 존재한다. 언론과 학문체계와 종교와 정치적 다양성 등이 그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선진조국’이나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가 집합적 생존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장치임을 자각하는 능력이 있다. 핵무기에 대해 핵무기로 맞서는 생존주의 국제정치에 굴복한다면 위태로운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한국사회는 잘 알고 있다.
실상사라는 절집에서 열리는 ‘지리산 연찬’도 인간과 사회의 성찰능력을 지지하고 고무하는 장으로 마련된 것이리라. ‘생존’의 욕망을 인정하면서도, ‘생존주의’에 함몰되지 않는 차원변화의 비전을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해결의 정치’와 ‘꿈의 정치’-유럽에서 배우기
그러나, 성찰만으로 정치를 전환시킬 수 없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 ‘자각적 꿈꾸기’가 그것이다. 꿈이 꿈인 것을 스스로 아는 ‘사회적 자각몽’을 발명해야 한다. 새로운 삶과 사회의 문법을 창발해야 한다. ‘근대화의 꿈’이나 ‘민주화의 꿈’에 비견되는 새로운 ‘꿈의 공생체’를 구성해야 한다. 현재의 문제 구도를 뛰어넘어 차원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꿈꾸기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유럽 녹색당의 실패는 역설적으로 ‘성공의 실패’이다. ‘반(反)정치의 정치’를 꿈꾸던 독일녹색당은 어느 때부터 집권세력의 일원이 되었고, 이제 문제해결 능력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듯이 녹색정치에게 제1의 문제는 ‘기후변화’였다. 유럽의 녹색당은 기후라는 ‘문제/문제해결’의 구도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그것은 불가피했다. 숙명이다. 그러나 꿈이 없다면 정치적 미래도 없다. 더욱이 차원변화는 없다. (투 트랙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문제해결 정치’와 ‘꿈의 정치’의 분담.)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4.10 총선에서 전환정치가 실패한 원인 역시 '꿈의 부재', 즉 유권자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없는 것,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을 느끼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극우가 '생존주의' 이데올로기의 격발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성공을 기획했다면, 우리는 '꿈의 정치'를 통해 생명의 활력과 열망을 격발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문제는 인구소멸과 국가소멸의 함정만이 아니다. 기후격변과 경제사회적 불평등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와 근대문명은 ‘문제들의 늪’에 빠져있다. 문제들의 무한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문제를 재생산한다. 문제해결은 더욱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확대 재생산한다. 사회는 꿈을 꾸고 서사를 창안하며, 동시에 ‘문제/문제해결’들의 함수들(fuctions)을 생산한다. 오늘날 관찰자들에게 한국 사회는 어디를 보아도 문제들이다. 우리는 이미 초복합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생존주의의 함정을 피하면서, 동시에 ‘문제들의 늪’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을까? 그렇다. 꿈꾸기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일단 ‘필요(needs)’와 ‘열망(aspiration)’을 구분해본다. 이를테면, 생명의 욕망은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 ‘필요(욕구)’와 ‘열망(꿈)’이 그것이다. 전자가 ‘유기체적 신체’의 욕망이라면, 후자는 ‘정동적 신체’의 욕망이다. ‘관찰하는 생명’에게 욕망은 ‘문제’로 인식되고, ‘감응하는 생명’에게 욕망은 ‘꿈’으로 표현된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의 ‘협동조합의 정의’를 보면, 협동조합의 사명은 “공동의 필요와 ‘열망의 충족과 실현”으로 되어 있다.
요컨대, 꿈과 비전이 없이는 정치적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문제를 피하려는 것이 아니다. 피한다고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꿈이 없이는 문제해결도 불가능하다. 사실 50년 전의 독일녹색당은 꿈을 파는 정당이었다. 그러나 문제해결을 위한 정당이 되었고, 오늘날 극우정당들은 생존주의를 격발하며, (문제해결 능력은 검증되지 않은 채) 꿈을 파는 정당을 흉내내고 있다.
파국과 종말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시대, 꿈꾸기는 매우 현실적이고도 절박한 과제이다.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지지하되, ‘살아남기’에 머무르지 않는 ‘도약의 꿈’을 열렬히 응원한다. ‘자유의 나라’나 ‘평등의 나라’에 스며들어 있는 삶의 욕구와 열망을 대체할 수 있는, 혹은 기술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테크노피아’와 경합할 수 있는 새로운 꿈과 열망이 그것이다. ‘평화 생명의 나라’도 좋고, ‘한살림의 꿈’도 좋다. 그리고, 당장 ‘몽상 구성체(dream formation)’의 형성을 공모해야 할 때이다.
그러나 유럽에는 무지개정치의 아름다움이 있다
유럽의 녹색정치가 그린래시로 휘청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유럽 녹색정치가 더욱 깊어지고 넒어지는 계기, 혹은 차원변화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특별히 한국의 생명정치와 교감하기를 기대한다). 유럽의 녹색정치는 실패가 아니다. 이미 빛나는 성공의 영광을 누리고 있다. 빨강에서 회색에 이르는 무지개 정치의 한 색깔을 당당하게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무지개 정치가 아름답다. 생명-미학의 관점에서 정치의 미래는 아름다움에 있다. 유럽정치의 다채로움은 유럽정치의 잠재력이다. 양당이 지배하는 고착화된 양극체제의 한국정치는 기계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아름답지 않다. 변화의 잠재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다시, 유럽을 배워야겠다. ‘지리산 연찬’의 기운과 문법을 통해 더욱 그윽하게, 더욱 풍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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