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윤정 칼럼] 그래도 한 발 더 나아간 2024년 총선
처음 등장한 기후정치, 기후유권자
중요한 건 로컬, 대의민주주의부터 바꿔야
자본주의, 에코파시즘, 에코토피아, 기후X
계급, 젠더, 탈식민, 기후 운동 연대해야
“열 받은 바다 … 해수 온도 역대 최고 행진에 기후재앙 공포” “1년째 매일 신기록 … 1년 만에 20년 상승치 폭등” “산호 등 생태 파괴... 폭풍·폭우 등 극단기상 기습 흉조”
미국 국립해양대기관리국(NOAA)의 자료를 인용해 CNN이 보도한 내용을 소개한 기사(연합뉴스 2024년 3월 19일)에는 이처럼 무시무시한 제목이 달렸다. 전 세계 바다의 평균 해수면 온도가 지난해 3월 중순부터 1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1982년 이후 역대 최고 온도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2023년 한 해 동안 수온이 전년 대비 0.25°C 올랐는데 이는 과거 20년에 걸쳐 상승한 수치라고 한다.
“인류가 지옥문을 열었다”
전 세계에서 화석연료를 사용해 발생하는 과도한 열의 90%가 바다에 저장되기에 해수 온도가 올라가면 해양생태계가 위협받고 기상이변이 잦아질 뿐 아니라 바다의 열 흡수능력이 떨어져서 지구 평균기온도 더 빨리 올라간다. 설령 이산화탄소를 전혀 배출하지 않더라도 뜨거워진 공기와 바다가 천천히 식을 때까지 기후재난은 계속된다.
기후위기에 대한 각종 예측과 경고의 수위는 갈수록 높아진다. 기후변화가 기후위기로 바뀌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기후붕괴라는 말이 심심찮게 쓰인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작년 9월 유엔 기후목표 정상회의에서 “인류가 지옥문을 열었다”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사용했다.
2015년 파리 기후협약에서 다짐한 산업화(1850년) 이전 대비 1.5°C 상승에서 저지하자는 목표는 이미 물 건너갔고 2050년 2°C, 2100년 3°C에 이를 것이란 전망조차 보수적으로 잡은 것이다. 3°C는 기후재난에 대응하느라 공공자원을 다른 데 쓸 수 없는 사회로서 현재 문명이 붕괴하는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이것은 SF도, 클리파이(기후 소설)도 아니다. 다만 많은 이들이 이미 알고 있는 불편한 진실이다.
기후위기 인식 공유가 출발점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여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맞다. 그럼에도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계속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처한 위급한 상황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 해결책을 찾아가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 기후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30년이 훨씬 지났다. 1988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IPCC)이 설립되고 1992년 유엔 환경회의(일명 리우회의)에서 논의를 본격화했다. 선진국에게만 의무를 부과했던 1997년 교토 의정서 체제를 거쳐서 전 세계 197개국이 참여해 국가 감축목표를 의무적으로 제출하고 지키도록 한 2015년 파리기후협약이 돌파구가 되는 듯했다.
기후위기를 압도하는 눈앞의 삶
그러나 각국의 치열한 국익싸움과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와중에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이미 기반이 마련된 유럽에서조차 갈등은 심각하다. 유류세를 올리려 하자 화석연료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월말이 문제인데 종말이 웬 말이냐”고 외친다. 재생농업 정책으로 규제가 강해지자 농민들이 트랙터를 앞세워 시위를 벌인다. 눈앞의 삶은 기후위기를 압도한다.
자본주의 대 기후
기후위기를 불러온 것도, 기후위기 대응을 방해하는 것도 자본주의임은 널리 알려지고 호응받는 사실이다. 나오미 클라인의 책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이순희 옮김, 열린책들, 2016)의 부제는 ‘자본주의 대 기후’다. 기후변화의 심각성이 알려질 무렵에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각종 무역 및 투자 장벽을 철폐해 기후대응을 무력화했으며 기업이나 기업가(예를 들면 빌 게이츠)의 기후대응은 그린 워싱(greenwashing, 위장 환경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지속하는 한 기후위기는 피해갈 수 없으며 국가 역시 자본주의와 한 몸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희망은 ‘블로카디아’라는 가상의 지역공동체로, 채굴이 이뤄지는 현장마다 온몸으로 저항하는 주민들의 운동을 가리킨다. 대개 그렇듯이 분석은 창대하고 대안은 미약하다. 틈새, 혁신, 게릴라전은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에코 파시즘
기후위기를 정치, 대안적 민주주의, 국가의 긍정적 역할을 통해 풀어보려는 것은 문제가 워낙 거대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아무리 쓰레기를 줄이고 냉난방비를 아끼고 자전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기후위기를 막거나 기후재난을 피할 수 없다. 국가의 강력한 지도와 신속한 이행이 필요하다.
하지만 성장의 한계를 인식하고 생태적 원리를 적용한 녹색국가는커녕 기업의 이익보다 환경보전을 우선하는 환경국가조차 지구상에 존재한 적이 없다. 국가의 막대한 권력을 사용해 선한 의지를 관철하려는 욕망이 투사된 에코파시즘 구상이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지금처럼 생태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조된 동시에 현실에 대한 절망도 컸던 1970년대 중반 미국 작가 어니스트 칼렌바크가 발표한 소설 『에코토피아』(김석희 옮김, 정신세계사, 1991)는 지금 봐도 흥미롭다.
에코토피아
그들은 태양과 바람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다. 자가용을 자전거와 철도 등 대중교통으로 대체했다. 나무를 숭배하며, 집을 짓거나 대부분 생활용품을 만드는 데 목재를 활용한다. 썩는 플라스틱을 제외하고는 화학물질을 사용하지 않는다. 순환경제 체제가 완성돼 쓰레기가 없는 안정된 상태를 유지한다.
부와 일에 대한 개념도 바꾸었다. 검소한 생활에 만족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과로하지 않는다. 기업은 협동조합이 소유하고 운영한다. 가족을 넘어 다양한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며 성적 욕망에 충실한 자유연애를 옹호한다. 쌍방향 케이블 텔레비전을 이용한 정치토론이 수시로 벌어진다. 50년 전의 상상이지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생태사회와 놀랍도록 비슷하다.
에코토피아 건설의 핵심은 정치다. 생태적 전환을 위해서는 화석연료와 원자력(당시는 원전사고에 대한 공포가 지금보다 훨씬 컸다)에 의존하는 거대기업을 해체하고 정부 보조금을 재배정함으로써 친환경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 세계적인 무역 및 분업체제에서 이탈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당연히 이익집단과 결탁한 기성정치로는 변화가 불가능하다. 그들은 미국 연방정부군과 무력투쟁을 벌여 서부해안에 독립된 공화국을 세우는 방법을 택했다. 수십 년간 국경을 봉쇄해 기존 자본주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물론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방식, 생산체제 자체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주목할 점은 이런 분리가 가능했던 이유는 태양광 발전 기술을 개발해 화석연료에 의존할 필요 없이 자급경제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국가주도 생태화전략 사례
현실에서 이 같은 에코파시즘 전략에 가까이 다가간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은 1972년 처음 열린 유엔 인간환경 개발회의를 시작으로 국제 환경협상에 계속 참가하며, 개혁개방 이후 ‘세계의 공장’으로서 환경문제가 더욱 심각해지자 각종 규제를 마련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개념을 받아들인다. 그 후 서구가 주도하는 환경 의제에서 벗어나고자 2000년대 들어 ‘생태문명’이란 개념을 제시한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경제발전을 이뤄 최고 수준의 문명을 이루기 위해 경제사회 전반을 변혁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2012년 생태 헌법을 제정하고 환경부를 중심으로 경제 관련 부처를 통합하며 생태계 용량과 경제개발 목표를 일치시키는 계획을 완성한다. 이런 과정은 시진핑 독재와 하향식 추진방식, 이념과 현실의 불일치 등으로 많은 비판을 받지만 어쨌든 국가가 주도하는 생태화 전략의 드문 사례이기도 하다.
기후 리바이어던에서 기후 X로
기후위기가 기후재난으로 나타나면서 세계 경제가 위축되고 보호주의가 강화되는 어려운 현실에서 나타나는 정치의 네 가지 형식을 제시한 책 『기후 리바이어던』(조엘 웨인라이트 외, 장용준 옮김, 엘피, 2023)에서는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체제를 세계적 통치 권력으로 확대한 정치체제를 ‘기후 마오’라 지칭한다. ‘기후 리바이어던’은 자본주의 중심의 세계적 통치 권력이며 ‘기후 베헤못’은 맹목적 국가중심주의를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남은 ‘기후 X’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가장 바람직한 형식으로 전 지구적인 기후 정의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운동들의 집합체에 부여된 이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기후 X를 향해갈 수 있을까.
대의민주주의부터 바꿔야 한다
기후 X는 반자본주의적인 동시에 세계적 통치 권력의 중심성을 거부하는 분산적 정치경제체제이며, 현재의 주권 논리를 거부하면서 다층적 규모의 유대를 구축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나머지 체제와 비교해보면 기후 X의 성격이 좀 더 분명해진다.
먼저 기후위기로 빚어지는 근미래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상승하는 건 단순히 농산물과 에너지 가격이 오르거나 값비싼 재해보험이 필요하거나 수해방지 예산이 증가하는 일이 아니다. 자연재해로 인해 이민이 급증하고, 지정학적 갈등으로 전쟁이 터지고, 정교하게 구성된 글로벌 공급망이 끊어지고, 나아가 국내외 정치 질서가 무너지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현재 자본주의 질서에서 최상층만 살아남거나(기후 리바이어던) 자원을 강제로 배분하거나(기후 마오) 극단적 보호주의(기후 베헤못)로 돌아서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기후 X는 민주주의를 지키면서 로컬, 내셔널, 글로벌 차원의 정치경제 질서를 재구성하자는, 실낱같은 희망이다.
중요한 것은 로컬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로컬(지역)이다. 로컬 중심의 자급적 순환경제와 재난 대비체제를 지금부터라도 만들어가야 한다. 다른 지역에 세워진 석탄화력이나 원자력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역시 다른 여러 지역에 걸친 송전선으로 가져와서 사용하고,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인해 발생한 폐기물을 가장 힘없는 지역에 내다 버리는 부정의가 하루빨리 사라져야 한다. 이는 사회적 정의일 뿐만 아니라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인다는 점에서 기후정의이기도 하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후재난 역시 로컬 단위로 예방하고 적응하고 수습할 수밖에 없다. 대형 재난이 일어난 뒤 중앙정부가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해주길 기다리는 일로는 부족하다. 로컬을 삶과 경제, 재난 대응, 돌봄의 최소 단위로 재구성하려는 노력 위에서 내셔널, 글로벌의 재구조화를 모색하는 일이 바람직한 미지의 정치일 것이다.
계급, 젠더, 탈식민, 기후 운동 연대해야
아직도 기후위기는 호들갑이고 잘난 척하는 말이며 아직 급하지 않은 일이고, 진보정치에서도 후순위라고 생각하거나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다. 기후위기를 여러 문제 가운데 하나로 본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기후위기는 모든 문제의 가장 밑바닥에 놓여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면 달라진다.
에코 페미니스트 마리아 미즈는 끝없는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는 화폐경제(공식경제)를 보완하는 다양한 착취적 노동(가내노동, 파트타임노동, 아동노동, 성매매 등)과 함께 여성의 가사노동, 식민지에서의 노동, 자연에 대한 착취 없이는 유지 불가능한 시스템이라고 주장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최재인 옮김, 갈무리, 2014)
그렇다면 계급, 젠더, 탈식민, 기후 운동은 현재 지배체제에 맞서 굳건히 연대해야 한다. 기후위기를 계기로 인간 사회의 배경이던 지구(Earth)는 불현듯 일어나 자기주장을 하는 행성(Planet)으로 불린다.
그래도 한 발 더 나아간 2024년 총선
한국에서 기후운동이 본격화한 것은 2019년으로 볼 수 있다. 2018년 IPCC가 인천 송도에서 「1.5°C 특별보고서」를 발표하면서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고, 2019년 기후위기비상행동이 만들어져 기후정의행진이 시작되었으며, 2020년 헌법재판소에 청소년 기후소송이 처음 제기되었다. (그 첫 심리가 4년만인 올해 4월과 5월에 열린다.)
그리고 2024년 22대 총선에서는 기후유권자, 기후정치라는 말이 등장했다. 여전히 기후위기를 녹색성장의 기회로 보고 토건개발 공약이 난무하는 등 한계가 분명하지만, 모든 원내 정당이 기후정책을 10대 공약에 넣는 진전을 이루었다.
향후 2026년 기후 지선, 2027년 기후 대선을 향한 씨앗을 뿌린 셈이다. 대의민주주의와 각종 선거만으로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의민주주의부터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쪽이 정확하다. 향후 조직된 기후시민의 힘을 바탕으로 기후시민의회 등 다양한 대안이 분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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