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주 칼럼] 신림동 반지하처럼 참사 때만 반짝 관심
'지옥고' 쪽방촌 실태 제대로 파악 안돼
일자리 창출·기후정의 실현 두 토끼 잡기
그린 리모델링 지원 중단…"참여 적다" 핑계
기후위기 앞에서도 사람은 평등하지 않다. 재난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에게 더 가혹하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은 기후재난으로 더 크게 건강과 안전을 위협받고 때로는 생명을 잃기도 한다.
2022년 여름 신림동, 폭우로 한 빌라 반지하에 거주하던 여성 노동자, 발달장애인, 그리고 아동으로 구성된 일가족 3명이 사망했다. 갑자기 불어난 물을 피하지 못한 탓이었다. 옆집 주민이 창문을 뜯으려 했지만 그마저 가능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참사 현장을 방문했고 대통령실은 그때 찍은 사진을 국정홍보용 카드뉴스로 올렸다. 사진 위에는 “국민안전이 최우선입니다”라는 문구를 박았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방문했다. 근본적인 대책이라며 “아예 반지하 주택을 모두 없애겠다”라고 선언했다.
참사 때만 나오는 ‘국가가 나서겠다’는 헛소리
취약계층의 열악한 집은 재난 상황에서는 흉기가 되어 생명권을 앗아간다. 주거권의 문제, 즉 ‘적정 주거에 대한 권리’를 말한다. 그 중에서도 ‘지옥고’(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의 하나인 반지하 주택은 비좁고 더운데다 습기와 곰팡이 문제는 물론 침수 피해에 노출되어 있어 열악한 거주환경을 대표한다. 폭우로 물이 차오르자 변기에서 오수가 넘쳐나는 건 영화 ‘기생충’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2018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유엔주거권특별보고관은 고시원과 쪽방촌에 사는 이들도 ‘홈리스(노숙인)’로 봐야 한다며 개선책을 권고했다.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나서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지옥고’나 쪽방촌의 실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구주택총조사 자료가 있을 뿐, 전수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반지하의 거주 인원이나 주거의 질, 에너지의 효율성, 침수 예방 설비의 현황과 개선방안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기초 데이터도 없다. 민간연구소에서 반지하는 36만 가구에 이르며 70만 명 가까이가 살고 있다고 추정할 뿐이다. 대부분은 저소득 노인이거나 1인 가구, 장애인들이다(한국도시연구소).
자연재난에서 취약계층의 주거권을 보호하고, 자연재난을 일으키는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사업으로 그린 리모델링을 들 수 있다. 노후 건축물의 단열, 설비 등의 성능을 개선하고 에너지 효율을 향상해 냉난방 비용과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면서 쾌적하고 건강한 주거환경을 조성하는 사업을 말한다. 게다가 그린 리모델링은 녹색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그린 뉴딜 정책의 핵심을 차지한다. 그린 뉴딜이 녹색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취업 기회를 확대하고 노동자와 빈곤층의 생활 수준을 높이려는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에너지 전환이 화석연료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에게 실업의 우려를 안긴다면 그린 리모델링은 실업을 흡수하는 안전판의 구실을 한다.
그린 리모델링 사업은 이처럼 일자리 창출과 분배 정의, 그리고 기후 정의를 동시에 실현한다는 점에서 ‘주거부문의 정의로운 전환’이라고 불린다. 그린 리모델링은, 하기로만 한다면 비교적 적은 금액으로 신속하게 효과를 낼 수 있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그린 리모델링 사업은 제대로 진행되고 있을까?
국정 포기 의구심까지 들게 하는 그린 리모델링 사업
2018년 기준 건물부문의 탄소 배출량은 5210만 톤으로 우리나라 전체 배출량의 7.2%에 이른다(외부에서 생산된 전기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온실가스까지 감안하면 24.7%다). 정부의 목표는 2030년까지 32.8%를 줄여 3500만 톤으로 묶겠다는 것이다(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정부가 제시하는 대표적인 감축 수단은 제로 에너지 빌딩(ZEB)의 신축과 그린 리모델링 사업이다.
이 계획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을까? 먼저 정부는 2030년까지 4만 7000건의 제로 에너지 빌딩을 짓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실적은 턱없다. 2017년부터 2024년 3월 말에 이르는 7년 동안 제로 에너지 빌딩의 인증현황은 목표치의 11.5%인 5400건(누적)에 그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제로 에너지 빌딩의 건축 의무화 시기를 늦추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올해부터 30세대 이상의 민간 공동주택(아파트, 다세대, 연립주택)에 대해 제로 에너지 건축을 의무화할 계획이었지만 이를 2025년으로 유예했다. 제로 에너지 건축을 강제하면 건축 단가가 높아진다는 건설업계의 불만이 있다는 이유였다.
그럼 그린 리모델링 사업은 어떨까? 정부는 2030년까지 건물 160만 호를 그린 리모델링으로 개선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2022년 말까지 실적은 목표의 5%에도 미치지 못하는 7만 9000호. 정부가 그린 리모델링 사업을 추진한 주요 수단은 민간의 그린 리모델링 사업에 이자를 지원하는 일이었다. 2014년부터 2023년까지 지원된 금액은 9700억 원. 하지만 이자 지원사업은 가구주를 대상으로 삼는 것이어서 취약계층의 주거환경개선이나 에너지 효율의 향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나마 정부는 올들어 이 사업도 중단했다. 금리가 높아지면서 건축주의 부담이 커져 참여가 저조하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정부로서는 건설부문에서 탄소중립을 달성할 로드맵도, 그것을 실현할 정책수단도, 심지어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기후위기를 방치하는 것을 넘어 국정을 포기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인류가 직면한 존재 위기 앞에서 ‘지구를 지키려는 의지’는 물론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전환 리스크를 줄이려는 정책조차 실종된 셈이다. 건축부문은 전환부문과 산업부문, 그리고 수송부문에 이어 네 번째로 온실가스 배출량이 많은 부문이다. 그런데도 최근 몇 년간 건축부문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듯 증가하고 있다. 기후위기 정책이 아니라 정부 자체가 실종됐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기후위기 방치는 인권 침해”라는 국제법원의 판결
기후위기는 더 이상 미래의 일이 아니다. 취약계층에게 기후재난은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하지만 쪽방촌과 ‘지옥고’ 주민들의 주거 질은 정부가 지나가듯이 내놓는 공언에만 존재한다. 그 공언도 기후재난이 이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그 순간에 그친다. 우리 사회에서 몫 없는 자들의 몫은 없고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을의 민주주의’를 말하고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를 말하지만, 몫 없는 자들의 목소리는 정부의 정책 속에서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지난 4월 9일, 유럽인권재판소(ECHR)는 64세 이상 여성으로 구성된 스위스 환경단체 '기후 보호를 위한 노인 여성'(KlimaSeniorinnen Schweiz)이 스위스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측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스위스 정부가 기후위기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해 “기후 변화가 생명, 건강, 복지와 삶의 질에 미치는 심각한 악영향”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여성의 인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로이터 통신은 이를 ‘획기적인 기후 판결’(landmark climate case)이라고 표현했다. 국제법원이 최초로 정부가 인권법의 취지에 맞춰 기후목표를 달성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밝혔다는 것이다.
취약계층이 노년 여성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취약성이란 것이 건강권 훼손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법원이 기후위기에 따른 소외계층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동시에 국가의 의무를 확인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중에서도 노인들이 ‘인간다운 주거 생활을 할 권리’(주거기본법)는 기후위기에 따른 건강권과 생명권, 행복권, 그리고 에너지 복지를 포함하는 인권의 개념에 가닿는다.
국내에서도 지난 3월, ‘60+ 기후행동’과 ‘기후솔루션’이 국가인권위원회를 상대로 기후위기에 따른 노인피해를 진정했다. 미래세대의 권리 못지않게 현재 세대, 그 중에서도 노인세대의 건강과 생명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 출발로 기후위기에 직면한 노인들의 실태부터 조사하자고 제안했다. 앞서 말한 스위스 노년 여성단체의 응원과 연대에 바탕을 둔 것이다. 4월 23일에는 헌법재판소에서 청소년, 영유아, 기후단체 등이 낸 4건의 기후소송에 대한 공개변론이 열린다.
기후위기 대응과 불평등의 해소는 궤를 같이 한다. 불평등을 확대하는 기후위기를 방치한다면 정의로운 전환은커녕 그 전환의 지속가능성도 확보하지 못한다. 온실가스 배출의 감축과 에너지 효율의 향상, 일자리의 창출과 취약계층의 주거권 보장을 내용으로 하는 그린 리모델링이 주목을 받는 이유이자 그 정책의 실종을 우려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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