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섭 칼럼]총선 계기로 생각하는 한국 ‘생명정치’
생명정치 코드: ‘파멸의 지속’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인구를 생명이 아닌 생산으로 보는 사회체계의 붕괴
강력한 헤게모니 기표 ”3년은 너무 길다!“
보수주의적인 진보, 기회주의적인 보수
전쟁영화의 ‘대회전(大會戰)’ 장면이 떠오른다. 4월 10일 총선 이야기다. 진보/보수 양 진영 외엔 보이지 않는다. ‘제3지대’가 잠시 주목을 받았지만,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였다. 양대 진영 사이에 낀 녹색정의당은 생존 자체가 위태롭고, 생태파국을 경고하는 ‘기후정치’는 존재감이 희미하다. 그렇다면, 4.10 총선 역시 ‘진영정치’로 끝날 것인가?
총선 정국에 대한 무기력과 치욕감
4.10 총선에 대한 나의 감정 언어적 키워드는 ‘치욕감’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따지기 이전, 정치판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는 자의 무기력과 부끄러움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선거 때마다 반복되었다는 생각은 ‘욕되고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감정’, 즉 ‘치욕감’을 일으킨다.
우선 내가 지금 생활하고 있는 전라북도 정읍. 1987년 민주화 이후 40여 년간 민주당 독점체제다. 항상 예선이 본선인 민주당 경선과 후보들의 면면, 그리고 경선 후 무의미해진 소도시의 선거운동 풍경이 쓸쓸하다. 이미 강고한 이익결사체가 된 민주당의 지역 내 정파들이 풀뿌리 정당 민주주의의 역설적 후과(後果)라니 더욱 씁쓸하다.
중앙정치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신선함이라고는 일(一)도 없고, 오로지 당내 패권과 이합집산으로만 관찰되는 정당 민주주의의 왜곡과 고착이 절망스럽다. 부동산과 코인 투기에, 변호사 개업 후 전관예우까지 마음껏 누리고 또 누릴 예정인 그들이 이번엔 검찰혁명의 투사가 되어 공천을 받는다(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아주 많다. 그러나 요사이 내 눈엔 그런 인물들만 눈에 들어온다.). 대통령과 양당의 대표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정당의 대표까지 이른바 ‘법조인’들이다. 이제 우리는 ‘법의 지배’뿐 아니라, 서로에게 ‘쓰레기’를 투척하며 정치적 혐오를 부추기는 ‘법조인들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이런 감정들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진영정치’, ‘심판정치’, ‘패권정치’ 식으로 짐짓 냉정한 듯 뻔한 논평을 늘어놓거나, ‘기후정치’라는 새로운 정치 캠페인에 참여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남은 것은 정신승리밖에 없는 것인가?
정치의 최종심급은 '생명'
그렇다. 길은 ‘이론적 정신승리’뿐이다. 나에게 심판정치를 비롯한 오늘의 정치적 양태들은 ‘생명정치’의 표현일 뿐이다. 현 정치체계의 여/야 구도와 패권쟁투 역시 ‘생존(生存)’과 ‘생계(生計)’, 나아가 ‘생성(生成)’의 한 양태일 뿐이다. 기후정치 역시 생태적 위기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에서 ‘생명정치’의 또 다른 주제일 뿐이다.
요컨대, 정치의 “최종심급은 생명”이라는 것이다(놀랍게도 이 문구는 라틴아메리카의 학자 엔리케 두셀에게서 발견된다). 정치체계는 ‘생각’과 ‘이념’과 연동되어 있기보다는 ‘신체’와 ‘정념’에 연동되어 있다는 말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이성적 판단력이 아니라, ‘살려는 마음’이라는 정동적 생명력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치욕의 감각’ 자체가 생명정치를 증거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모든 정치가 생명세계와 연동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또 정치의 최종심급이 생명이라고 하더라도 ‘생명정치’라는 이름이 붙기 위해서는 기존의 정치와 구분되는 새로운 정치형식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은 이미 수많은 ‘생명정치들’이 있었다.
푸코의 ‘생명권력’ 다시 보기
생명정치는 이미 보통명사다. 푸코와 아감벤을 비롯해 서유럽의 수많은 철학자와 사회과학자들이 나름의 생명정치론을 펼쳐 왔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생명정치는 더욱 활발하게 논의가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논의의 출발점은 미셸 푸코다.
푸코의 생명정치는 생명관리권력을 의미한다. 인간생명은 권력에 의해 관리되고 규율되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코로나19 시기 국가라는 치밀한 생명관리권력은 생명정치를 다시 한번 강력하게 증명했다. 권력은 인간생명을 길들이고 장악한다. 정동이론가들에 따르면, 더욱이 오늘의 생명정치는 산업화시대와는 다르게 권력의 장악력을 ‘개별적 주체’에서 ‘생명 자체’로 전환한다.
한편, 또 다른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푸코의 생명권력론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생명의 저항’을 강조한다. 들뢰즈가 푸코에 관해 쓴 책에서 언급한, “권력이 생명을 대상화할 때, 생명은 레지스탕스가 된다”라는 말은 들뢰즈의 ‘저항의 생명철학’을 절묘하게 표현한 경구이다.
그러나 나에게 생명의 신체적 형식은 무엇보다 ‘굴신(屈身)’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스스로 ‘굴신하는 신체’를 문득문득 자각한다. 반려동물 고양이가 먹고 살기 위해 집사에게 복종하듯, 인간생명은 살기 위해 줄을 서고 마스크를 쓴다. 사실 사회체계는 인류의 특별한 성취였다. 인간생명은 안정적인 생존을 위해 사회체계를 발명했고, 스스로 사회체계에 복종해왔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인간생명의 만남에 의해 유지되는 결혼제도에 굴신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정치체계가 ‘민생(民生)’을 강조하며 돈을 뿌릴 때, ‘생민(生民)’인 우리들은 살기 위해 정치적 인물들에게 굴종한다. 그것은 정치사회적 태도 이전에, 신체의 작동이다. 시인의 표현을 빌어 말하면, ‘생명은 바람보다 빨리 눕는다’.
그러나, 생명이 굴신만 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은 바람보다 빨리 일어난다’. 들뢰즈가 말하는 ‘저항의 생명’, ‘탈주하는 신체’가 그것이다. 권력이 강대해서 감히 넘볼 수 없게 되는 경우, 저항의 형식은 몹시 비루해진다.
굴종하며 저항하는 생명의 이중성
중국 청년들의 퍼포먼스가 이를 잘 보여준다. ‘탕핑족’이라는 이름이 붙은 ‘죽은 척하기’ 퍼포먼스, 최근 보도가 되고있는 ‘역겨운 복장 출근’ 퍼포먼스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굴종하면서 저항하는 생명의 이중성에 주목한다. 35억 년 ‘생명의 시간’ 동안 형성된 ‘생명의 문법’ 앞에 5만년 ‘사회의 논리’는 ‘새 발의 피’ 아닌가?
이제 우리는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나는’ 생명과 신체의 잠재성에 주목한다. 나에게 생명은 고통이고, 분열이고, 혼돈 그 자체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생명은 우상화된 기존 질서로부터 탈주하는 ‘초월적 돌파’의 우주적 잠재력이다.
그렇다면, 자본과 권력에 의해 착취되고 규율되는 근대성의 진실은 전혀 다르게 기술될 수도 있다. 이탈리아의 생명정치학자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언급은 그 일단을 보여준다.
”근대성이 생명의 자기보존이라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생명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범주의 총체로서의 근대성을 창출(실현)하고, 이른바 ‘발명한’ 것이다.“
생명정치의 코드: ‘파멸의 지속’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68혁명의 ‘상상력에게 권력을’에 빗댄 ‘생명력에게 권력을’이라는 슬로건은 어떠한가? 앞에서 정치의 최종심급은 생명이라고 말했거니와, ‘상상력’을 소환하거나 격발하는 것은 ‘생명력’일 것이기 때문이다. 김지하를 빌어 말하면, 민중, 혹은 국민은 무엇보다 ‘생명의 담지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생명력을 권력화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형식으로의 번역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생명정치는 ‘생명력의 고양을 구현할 가능성’이 된다. 예컨대, 우리는 신경역사학(neurhistory)이 주장하는 ”기분을 전환시키는 제도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경역사학자 스메일(Smail, Daniel Lord)에 의하면 인류는 구석기시대부터 환경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기분을 변화시키는 실천들, 행동들, 제도들을 지속적으로 고안해내고 갱신해왔다.
이제부터 생명정치는, 그 유명한 링컨의 민주주의론을 빌어 말하면, ‘생명력의, 생명력에 의한, 생명력을 위한 정치’이다. 생명정치는 생명의 활력과 창조적 고양이라는 목표를 갖게 되고, 그 자체로 정치과정인 정치를 의미하게 된다. 생명정치가 가치판단이 아닌 기쁨, 슬픔 활기, 우울, 감동 등의 생명감각과 생명경험을 정치화하는 것이라면, 이제 우리의 구호는 ”생명력에게 권력을“ 혹은 ”생명력의 정치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구를 생명이 아닌 생산으로 보는 사회체계의 붕괴
생명정치의 출발점은 ‘생명감각’이다. 정확히 말하면, ‘생명에 의해 구성된 감각’이다(그것은 초월적 주체를 전제하는 ‘주관적 감각’과 구별된다.) 우리는 생명정치적 신호들에 유의해야 한다. 기후격변 자체와 그로 인한 재난도 치명적인 생명정치적 신호들이지만,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보다 직접적인 것은 기후격변과 그것의 후과를 감각하고 예감하는 신체들의 감응이다. 출산률 감소, 자살, 우울감, 외로움 등이 그것이다. 은둔과 자발적 고립과 같은 탈사회화 경향들도 그렇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생명력은 날 것 그대로 권력이 될 수 없다. 정치적 형식과 문법을 통해, 정치체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학적 체계이론을 빌려 말하면, 인간생명은 생존을 위해 권력이라는 ‘사회적 매체’를 사용할 수 있다.(생명력의 고양을 위한 사회적 매체 중 가장 탁월한 것은 예술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보/보수’의 구도가 그렇듯이 하나의 이진법적 코드로 창발되어야 한다. 진보/보수를 대체하는 새로운 선택지가 제시되어야 한다. 생명정치의 코드가 유권자들에게 각인되어야 한다. 예컨대, ‘파멸의 지속’인가? 새로운 시작인가?‘도 그것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파멸의 위기를 극복(?)해가며 시간을 끌 것인가‘, ’기존 사회체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체계를 구성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오늘의 정치체계를 비롯한 현대의 사회체계는 생명의 지속을 작동 불능상태 빠뜨렸다. 파국적인 기후격변과 극단적인 저출산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생명의 거처인 현대 사회체계의 무능력에 대해 생명이 발신하는 ‘최후의 저항적 신호’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생명정치는 종말론적이다. 인구를 ‘생명’이 아니라 ‘생산’의 관점에서 보는 기존의 사회체계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정치체계의 무능력과 무기력은 위기가 아니라 체계 붕괴의 증후인 것이다. 이때 파국이나 붕괴는 세계의 종말이 아니다. 현존하는 사회체계의 종식을 의미한다.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본 4.10 총선 관전 포인트 세 가지
그렇다면, 생명정치의 관점에서는 4.10총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본 4.10 총선 관전 포인트는 다음 세 가지다. 첫째, 기존의 보수/진보의 구도를 넘어서 차원변화의 신호와 변이가 출현했는가? 둘째 정동(情動)의 생명정치는 어떻게 작동되는가? 셋째, 양대 진영정치 사이 녹색정의당은 생존할 수 있는가?
첫째, 기존의 보수/진보의 구도를 넘어서 차원변화의 신호와 변이가 출현했는가?
역시나 이번 총선에서도 새로운 신호나 변이를 관찰하지 못했다. 오히려 기존의 구도가 강화된 느낌이다. 제3지대 정당들 역시 양대 진영의 ‘중간지대’일 뿐 차원변화를 예감케 하는 새로운 비전과 이미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기존의 진보/보수 구도를 넘어선 초월적 구도를 발견할 수 없었다. 정치의 변방 지리산 실상사에서 2021년부터 3년여간 ‘문명전환의 정치’를 모토로 정치교육을 시행했다. 지리산정치학교가 그것이다. 하지만, 제3의 정치적 흐름을 기대했던 지리산정치학교도 2024년 4.10 총선과 관련해서는 가시적인 정치활동을 조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정동’의 생명정치는 어떻게 작동되는가?
사람들이 흔히 감성정치라고 말하는 것들,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생명정치는 ‘정동’ 개념을 통해 설명하려 한다. 정동적 생명의 활력이 정치적 선택과 연결될 때, ‘정동정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동’은 판단에 대한 몸의 반응인 ‘감정’과 다르다. 그것은 오히려 ‘생명력(vital forces)’에 가깝다. 나에게 정동정치는 ‘조국혁신당’ 열풍의 배경이고, 진보당 홍보전략의 핵심으로 읽혀진다.
강력한 헤게모니 기표 ”3년은 너무 길다!“
최근 서유럽의 저명한 좌파이론가들의 최종 도착지도 ‘정동’이다. 샹탈 무페와 프레데리크 로르동 등이 그들이다. 이들에 의하면, 정치는 ‘정치적 신체’의 문제이고, ‘정동’의 문제이다. 이들의 정동정치론에 의하면, 합리적인 숙의과정을 통한 사회계약으로는 정치적 집단화를 형성하지 못한다. 개개인들을 대중이라는 정치적 신체로 묶어내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정동’이다. 그러므로 결정적인 것은 ”대중을 형성하기 위해 정동을 활성화할 수 있는 헤게모니 기표는 무엇인가?“이다. 예컨대, 조국혁신당의 경우 조국이라는 인물 자체의 정동적 활력이 대중을 묶어내고 있으며, ‘3년은 너무 길다’라는 슬로건은 강력한 헤게모니 기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정동정치가 원한이 아니라, ”사회정의를 향한 정동을 키우는 방식으로 우리/그들이라는 대립을 그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셋째. 녹색정의당은 생존할 수 있는가?
여/야 이항코드의 현대 정치체계에서 진영 논리는 ‘제도 의존성’에 따라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강력한 양대 진영의 구도 아래서 탈-진영은 곧 죽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서 녹색정의당의 경우 생존 자체로도 의미가 적지 않을 것이다. 독자적 정치세력화와 독자적 가치의 추구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특히 선거연합의 한 주체인 녹색당의 경우, ‘정당의 존속’이라는 ’체계 합리성’의 관점에서 볼 때, 피할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보통 사람들은 두루뭉수리하게 ‘정치현실’이라고 말한다.).
또한 초록 빛깔 선명한 녹색정의당 정책공약도 의미가 적지 않다. “기후를 살리다, 사람을 돌보다”를 슬로건으로 하는 정책공약집에서 녹색정의당은 ‘살림’을 키워드로 생태·생명·생계·생존·생활의 다섯 가지 살림살이를 제시하고 있다. ‘살리는 생태’, ‘돌보는 생명’, ‘평등한 생계’, ‘평화로운 생존’, ‘풍요로운 생활’이 그것이다.
그러나,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진보와 녹색은 ‘연대’할 수는 있으나, ‘방향성’이라는 측면에서, ‘양립’할 수는 없다. ‘탈성장’ 체제전환론을 주장하면서 ‘진보주의’와 ‘이념적 목적론’을 포기하지 않는 점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생명정치의 관점에서는 ‘녹색’ 그 자체도 아쉽다. 유럽적 전통에서 녹색은 청색이나 적색과 구별되는 정치적 이념적 방향성을 지시하지만, 동아시아에서 녹색은 청색과 구분되지 않으며 청적황백흑의 오방색 중 하나일 뿐이다. 더욱이 오행은 순환한다.
생명엔 진보/보수의 우열이 없다. (진보/보수의 이중성은 논의할 수 있다.) 정동이론을 빌어 말하면 생명의 정동에는 기쁨과 슬픔이 있을 뿐이다. 혹 고-활력과 저-활력으로 구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생명에서 좋은 정치의 척도는 ‘생명의 활력’이며, 활력의 결과인 복잡성과 창발의 능력이다.
손가락을 보라
“사회는 너무 빨리 바뀌어서, 보수 세력들은 기회주의자로서만 버틸 수 있는 반면, 좌파들은 여전히 실현되지 못한 이상들에 집착하는 보수주의자가 된다.”
니클라스 루만이 68혁명 직후 언급한 말이다. 루만의 관찰이 통렬하다. 1960년대말 독일과 유럽의 정치는 오늘의 한국 정치 현실과 다르지 않았나 보다. 진보/보수의 구도가 성립한 이후 시간이 지나고 사회적 변화가 이어지면서 진보나 보수 양 진영 모두 그들이 천명한 가치를 추구할 수 없게 된다. 결과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은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고 진보주의자들은 여전히 옛 가치를 붙잡고 있는 보수적 입장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남은 것은 ‘자연스럽게’(?) 권력의 획득을 위한 쟁투다.
보수주의적인 진보, 기회주의적인 보수
오늘 우리는 한국사회에서 ‘보수주의적인 진보’와 ‘기회주의적인 보수’를 관찰한다. 그들의 생존을 위한 쟁투를 목격한다.
루만에 따르면, 권력은 정치적 의미소통을 위한 매체이다. 그리고, 그것의 사용 권한은 찬/반 코드의 투표를 통해 결정된다. 진실은 투표용지 안에 존재할 수 없다. 몇 개의 선택지에 가둘 수 없다. 그러나, 현대 정치체계는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문제들과 인물들과 마음들을 투표장의 손가락 몇 개에 위임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잘 작동해왔다.
불가에서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달은 지시될 수는 있으나 인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손가락이다. 나에게 손가락은 직접적으로는 투표용지의 어느 칸을 지시하는 손가락이지만, 그것은 ‘코드화된 신체’다. 찬/반의 이항 도식으로 선택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배경에는 알 수 없는 정동적 신체의 흐름이 있고, 우리는 알 수 없는 어떤 믿음에 따라 우연적으로 ‘투표’한다. 조국에 대한 짠한 마음, 대통령의 얼굴에 대한 거부감,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좌파에 대한 적대감 등의 정동정치와 나름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이념정치 혹은 진리정치가 작동하고, 그 결과물은 여/야 이항도식으로 환원된 투표용지를 통해 표현된다.
“생명력에게 권력을”, “손가락에게 권력을
우리에게 달은 너무 멀리 있다. 우리는 진리를 알지 못한다. 다만 진리가 있다고 믿을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없으면 달도 사라질 것이다. 물론 ‘손가락에 대한 자각’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혹 생명력이 달이라면, 손가락은 권력과 그 작동으로서의 정치체계 아닐까.
생명정치의 본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구성’되는 것이라면,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손가락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손가락들에 대한 섬세한 감각과 치밀한 분석, 그리고 손가락들의 활동과 소통들일 것이다. 그렇다. “생명력에게 권력을”, “손가락에게 권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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