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대권 칼럼] 지구생태계 파괴범은 제국주의

평화 말하기 전에 폭력구조부터 알아야

‘아류 제국주의’로 가는 대한민국

“생명의 소중함과 평화 염원이 나의 좌표”

황대권 '야생초 편지' 작가
황대권 '야생초 편지' 작가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거리로 쏟아져 나온 군중들이 외친 ‘독립만세’와 2024년 1월 18일 전주의 한 식장에서 연설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국정기조를 바꾸라”고 소리친 한 국회의원의 행위는 얼마나 다를까? 행위가 이루어진 배경과 시대 상황은 다르지만 행위의 본질은 완전히 같다. 둘 다 구조적 억압에 대한 반발이고,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이다. 전자는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직접적 반발이므로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후자를 제국주의와 연관시키다니 너무 심한 비약이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 얘기를 하려고 이 글을 쓴다.

지구 생태계 파괴범은 제국주의

나는 생명평화운동가이다. 평생을 생명의 옹호와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오기까지의 과정은 고통과 몰이해, 무시와 비난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럼에도 나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반제국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산다. 내가 가진 사상과 신념이 진리라고 말하진 않겠다. 어차피 이 세상에 무엇이 진리인지 말해 줄 사람은 없다.

내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가난한 나라와 사람들을 도탄에 빠트리고 지구생태계를 파괴한 범인이 제국주의라는 점과 (세상의) 평화는 제국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평화는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어려움이 있다. 마하트마 간디나 마틴 루터 킹 같은 위대한 평화운동가들이 암살자의 총탄에 쓰러졌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26일(현지시간) 저녁 미국 워싱턴D.C.의 이스라엘 대사관 밖에, 이날 분신자살한 미 공군 병사 에런 부슈널(25)을 추모하는 꽃다발과 포스터가 놓여 있다. 부슈널은 "(미국이 지원하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주민) 학살의 공범이 될 수 없다"고 외치며 자기 몸에 불을 붙여 자살했다. 2024.02.27. AP 연합뉴스
26일(현지시간) 저녁 미국 워싱턴D.C.의 이스라엘 대사관 밖에, 이날 분신자살한 미 공군 병사 에런 부슈널(25)을 추모하는 꽃다발과 포스터가 놓여 있다. 부슈널은 "(미국이 지원하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주민) 학살의 공범이 될 수 없다"고 외치며 자기 몸에 불을 붙여 자살했다. 2024.02.27. AP 연합뉴스

평화와 제국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평화로운 세상이란 제국주의가 사라진 세상이다. 사람들은 평화의 반대말이 전쟁이라고 하지만, 아니다. 평화의 반대말은 제국주의이다. 전쟁은 제국주의의 속성일 뿐이다. 전쟁 없는 평화로운 시기라 해도 제국주의는 열 일을 하고 있다. 전쟁이 없다고 해서 결코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역사 용어 가운데 가장 황당한 말은 ‘팍스 로마나’ 또는 ‘팍스 아메리카나’이다. 로마나 아메리카처럼 강력한 제국이 세상을 호령하는 동안 전쟁이 없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지속 가능한 발전’처럼 형용모순에 해당하는 말이다. 제국 자체가 폭력인데 그 앞에 평화(PAX)를 갖다 붙이다니! 이는 서양인들이 자신들 문명의 원조인 로마제국의 위대성을 찬양하면서 만들어낸 허구이다.

만약 팍스 로마나가 진정한 평화였다면 로마제국의 변방에서 예수라는 사나이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제국의 폭력성과 위선을 폭로하고 진정한 평화를 가르쳐 준 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어처구니없게도 기독교에 팍스 로마나를 덧씌워 종교 제국주의로 나아갔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감추기 위해 “내 안의 평화, 내 안의 예수”만을 외쳤다.

평화를 말하기 전에 폭력구조부터 알아야

지난 2월 17일 평화학의 창시자 요한 갈퉁 박사가 서거했다. 나는 젊은 시절 정치학을 공부할 적에 그의 저서를 탐독하고 한국에서 행해진 강연회에 참석한 인연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의 서거를 애도하는 이유는 그의 학문적 업적이 내게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나는 태생적으로 성품이 온화하고 폭력을 싫어한다. 그런데 살아오면서 너무도 자주 폭력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내가 이런 상황을 불러오는 건지 아니면 세상이 원래 폭력적인 건지 궁금했다. 어쩌면 두 가지가 다 작용하고 있지 않나 싶다. 전자는 내면과 관련된 문제라 명상과 정신세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후자는 사회에 대한 문제여서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요한 갈퉁
요한 갈퉁

학창시절 내내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던 나는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전공을 농학에서 정치학으로 바꾸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데모만 하던 농대생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미국으로 건너가 1년을 헤맨 끝에 내가 궁금해하던 모든 것을 공부할 수 있는 대학을 찾았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학교였던 ‘뉴스쿨 대학원’(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 들어가 정치학을 공부했다. 한국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자본론> 강의를 비롯해 <제3세계론>, <제국주의론> 등을 그야말로 마른 수건이 물을 빨아들이듯 열심히 공부했다.

이때 요한 갈퉁의 제국주의론을 접했다. 1983년의 일이다. 그의 논문이 발표된 지 12년 지난 후이고 제3세계에서 반제국주의 혁명의 열기가 여전히 불타오르던 시기였다. 당시에 학교도서관에서 공산권 이론가를 비롯해 서양의 유명 정치학자들의 제국주의론을 두루 검토했지만, 적어도 내게는 갈퉁만큼 이해하기 쉽고 깔끔하게 정리한 것을 보지 못했다.

갈퉁의 평화론을 알기 전에 제국주의론을 먼저 알게 된 것이다. 실제로 그의 대표작인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 (Peace by Peaceful Means)는 제국주의론이 나온지 25년 후에나 발간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면, 폭력의 구조를 제대로 알고 나서야 평화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턱대고 평화와 전쟁 반대를 외친다고 하여 평화를 쟁취할 수 없다. 도둑을 막기 위해 그저 문단속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도둑이 어떤 물건을 훔치길 좋아하는지, 어떤 침투 기술을 가졌는지, 왜 도둑질을 하는 건지... 이런 항목들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제대로 된 방어를 할 수 있다. 요한 갈퉁이 평화론을 집필하기 전에 제국주의의 구조를 그토록 자세히 살펴본 이유이다.

 

요한 갈퉁의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
요한 갈퉁의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

‘아류 제국주의’로 가는 한국

나는 전문 학자가 아니므로 젊은 시절 공부한 갈퉁의 학문을 더 깊이 연구하지 못하다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을 좀 들여다봤더니 이런저런 비판의 글이 꽤나 있었다. 그런데 평화론의 근거가 되는 그의 제국주의론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우선 그의 제국주의론을 철 지난 종속이론으로 치부해버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적어도 그 글이 발표되고 나서 20년 동안은 그런 비판이 없었으나,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종속이론의 틀을 깨고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바람에 종속이론은 현실에 맞지 않은 낡은 이론이 되고 말았다.

과연 그런가? 갈퉁의 제국주의론은 여느 이론보다도 구조적이고 포괄적이다. 제국주의를 구성하는 요인을 경제, 정치, 사회, 문화, 정신 심리적인 측면까지 고려하여 설명하고 있다. 공산권 이론가처럼 경제 결정론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제국주의가 경제, 정치, 군사적 지배를 넘어 미래에는 문화와 미디어를 통해 계속될 것으로 예측했다.

갈퉁뿐 아니라 어느 정치학자도 1971년의 시점에 제국주의 지배 아래 있는 국가가 선진국에 진입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어찌 보면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은 대단히 예외적인 사례이다. 여전히 과거 제3세계에 속했던 대부분의 나라들은 종속적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극히 일부분의 예외적 사례를 일반화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학자들은 어째서 그런 예외가 성립할 수 있었는지 연구했다. 많은 이들이 교육을 중시하는 유교 전통과 중국 변수를 든다. 중국 변수란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중국의 주변 국가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이들 나라가 선진국 반열에 들었다 하여 백여 년에 걸친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경제적으로는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으나 정치 군사적으로는 여전히 미국이 주도하는 제국주의 질서에 사로잡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더 무서운 것은 경제적 성공에 힘입어 ‘아류 제국주의’의 길을 가고 있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 일제의 핍박 아래 갖게 된 ‘제국에 대한 부러움’이 바로 이어진 미국의 지배를 통해 ‘제국주의적 부국강병론’으로 발전한다.

나는 근대화된 한국의 정체성은 제국주의라고 본다. 시대적 상황이 다르고 아직 국력이 미치지 못해 제대로 된 제국주의로 나아가진 못해도, 제국주의 왕초 미국을 따라 끊임없이 제국주의를 연습하고 있다. 요즘 국뽕에 빠진 한국인들이 열광하는 한류는 문화제국주의의 편린일 뿐이다. 문화를 수출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기쁜 일일지 몰라도 자국의 전통문화를 계승발전 시키려는 수입국의 문화인에게는 재앙과 같은 상황이다. 동등한 교류를 통한 자극과 영향력을 넘어선 지배는 제국주의로 나갈 수밖에 없다. 해방 후 지금까지 한국문화에 끼친 미국 팝 문화의 파괴력을 떠올리면 금세 이해할 수 있다. 오죽하면 지금 세계를 호령한다는 한류 음악의 이름조차 ‘K-Pop’일까. 케이팝은 미국 팝 문화의 전 지구적 영향력을 전제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한민족이) 중국대륙을 지배했다는-그것이 사실일지라도-고대사 연구자들의 열정과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추구하는 국방부의 노력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해 4월 4일 제주도 앞바다 공해에서 실시된 한미일 합동 해군훈련. 미국 해군 항공모함 니미츠(가운데)를 중심으로 한국 해군 구축함 율곡 이이(앞줄 오른쪽), 일본 해상자위대 우미기리(왼쪽)가 편대를 이루고 항해하고 있다. 2023.4.4. AP 연합뉴스
지난해 4월 4일 제주도 앞바다 공해에서 실시된 한미일 합동 해군훈련. 미국 해군 항공모함 니미츠(가운데)를 중심으로 한국 해군 구축함 율곡 이이(앞줄 오른쪽), 일본 해상자위대 우미기리(왼쪽)가 편대를 이루고 항해하고 있다. 2023.4.4. AP 연합뉴스

현대 국가들의 정치체제는 ‘파시즘’

나는 제국주의 성향을 띠는 나라들의 정치체제는 예외 없이 ‘파시즘’이라고 본다. 자타가 인정하는 민주주의 국가 미국도 그렇다면 파시즘이란 말인가? 그렇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미국이야말로 안팎으로 민주주의 국가라고 믿으며, 조금 아는 사람들은 안으로는 민주주의를 하지만 밖으로는 제국주의를 한다고 말한다. 푸른색 치약 튜브를 짜면 푸른색 치약이 나온다. 미국의 대외 정책은 아무리 보수적인 정치학자가 보더라도 제국주의 그 자체임을 부인할 수 없다.

내부적으로 민주주의를 하는데 밖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펼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모순이다. 내부적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대외 정책이 결정되는 것이지, 대통령 혹은 일부 엘리트 관료들이 멋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1776년에 발표된 미국독립선언서는 사문화된 지 오래다. 미국이 그렇다면 제국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는 다른 서구 국가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들의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구공산권 국가들과 제국주의 지배 아래 있는 대부분의 약소국가들도 그렇다. 요컨대 20세기 이래 지금까지 현대 국가들의 정치체제는 ‘파시즘’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있다. 파시즘의 정의는 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①국가와 자본이 결합한다. ②소수의 관료집단과 정치엘리트가 헤게모니를 장악한다. ③민주주의처럼 보이려고 대의제를 선택한다. ④부국강병을 추구한다. ⑤팽창주의를 선호한다.”

위 다섯 가지 특징을 잘 살펴보면 모두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행위들이다. 인류 역사가 끝없는 전쟁으로 점철되어 왔음을 상기해 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모든 국가가 파시즘을 장착하고 끊임없이 경쟁하다가 몇몇 특정 국가가 결정적 우위를 갖게 되면 속성상 바로 제국주의로 치고 나가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이 제국주의 지배 아래 있는 한 모든 나라의 정치체제는 파시즘 외에 달리 선택할 것이 없다. 파시즘만이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확실한 체제라고 믿기 때문이다. 전체가 부분을 규정한다는 물리학의 법칙이 정치에도 적용된다.

 

19일(현지시간) 이스라엘 남부 가자지구 국경에서 이스라엘 여군들이 밝은 표정으로 가자지구 폐허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고 있다. 이들이 현역 군인인지 훈련병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2024.02.21. AP 연합뉴스
19일(현지시간) 이스라엘 남부 가자지구 국경에서 이스라엘 여군들이 밝은 표정으로 가자지구 폐허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고 있다. 이들이 현역 군인인지 훈련병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2024.02.21. AP 연합뉴스

“생명의 소중함과 평화 염원이 나의 좌표”

모두가 파시스트이고 제국주의 지배 아래 있다면 그것이 인류라는 종의 불가피한 현실이니 적응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조직화 되지 않은 개인의 처지에서 볼 때 그런 무력감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게 전쟁을 하고 같은 인간에게 짓밟히면서도 인류라는 불가사의한 종은 그와 정반대 되는 이념과 정신세계를 발전시켜 왔다. 어쩌면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고래의 종교 전통과 철학 사상에서 그 편린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특정 종파나 유파를 믿는 사람들은 자기네 것이 유일한 진리요 구원의 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주장들은 오히려 구원의 다양성을 말해 준다. 특정 종교나 사상에 의지하여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이 폭력의 세기를 견뎌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후위기와 환경파괴, 전쟁과 고물가로 신음하는 지구촌 시대에 뭇 종교와 사상들로부터 가장 중요한 요소를 뽑아내어 그것을 가지고 새로운 좌표로 삼고 싶다.

첫째는 살아 있는 생명의 소중함이고, 둘째는 살아 있되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염원이다. 이름하여 ‘생명평화 사상’이다.

제국주의는 상대방을 착취하여 내가 이득을 본다. 상대방이 이득을 얻으면 나는 그보다 더 큰 이득을 얻어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니면 상대방을 죽여서라도 내가 살아야 한다. 제국주의는 죽임의 사상이자 노예됨을 강요하는 지배질서이다. 제국주의 지배질서에 편입되는 순간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우위에 서려고 부국강병에 집착한다. 그 결과 파시즘이 강화되고 자연과 인간 모두가 병들고 죽어간다. 탄소배출을 줄이자고 줄기차게 국제회의를 열어도 지켜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1월 3일 플로리다주 서프사이드에서 대서양 위로 해가 뜰 때 새 한 마리가 날아가고 있다. 최근의 새로운 연구는 기후 변화를 추적하는 과학자들이 기온 상승(온난화)의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024.1.3. AP 연합뉴스
지난 1월 3일 플로리다주 서프사이드에서 대서양 위로 해가 뜰 때 새 한 마리가 날아가고 있다. 최근의 새로운 연구는 기후 변화를 추적하는 과학자들이 기온 상승(온난화)의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024.1.3. AP 연합뉴스

조화와 균형 속 단순 소박함으로 돌아가야 

생명평화는 모든 생명을 살리는 사상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죽여야 사는 자연계의 먹이사슬 법칙을 받아들인다. 먹이사슬은 더 큰 차원에서 생명계 전체를 살리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생명평화는 자기 자신의 평화는 물론 다른 생명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원한다. 생명평화는 조화와 균형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다. 지나친 소유와 지나친 성장은 나 자신과 상대방의 평화를 깨뜨린다.

사실 인간 사회는 지난 세기에 지나치게 성장함으로써 다른 생물종과의 균형을 상실했다. 인간으로 인해 생물종 다양성이 사라지고 온실가스가 대기를 가득 채워도 남 탓만 한다.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성장을 멈추고 지금보다 훨씬 더 겸허해져야 한다. 그러자면 제국주의와 파시즘 체제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대안의 문명, 대안의 삶을 살아야 한다. 조화와 균형 속에서 모두가 행복해지는 단순 소박함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현실적인 몽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두고 보라. 비현실적이라고 조롱한 것이 조만간 현실이 될 것이다.

 

지난 28일 런던 트리니티 스퀘어 가든에서 기후 변화 대응단체 '멸종 저항'(XR)이 주최한 시위 행진을 앞두고 참가자들이 화석연료 사용 반대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와 깃발들을 흔들고 있다. 2024.2.28. AFP 연합뉴스
지난 28일 런던 트리니티 스퀘어 가든에서 기후 변화 대응단체 '멸종 저항'(XR)이 주최한 시위 행진을 앞두고 참가자들이 화석연료 사용 반대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와 깃발들을 흔들고 있다. 2024.2.28. AFP 연합뉴스

제국주의 관습과 질서를 거부하자

마지막으로 2006년 한국을 방문한 갈퉁 박사의 강연 내용을 간략히 덧붙인다. 18년 전에 말한 내용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당시의 강연 주제는 “한반도 통일과 미국”이었다. 이 글의 제목이 ‘평화와 제국주의’인 만큼 초일류 제국주의 국가 미국에 관해서만 얘기하겠다. 나는 평소 존경해마지 않던 분의 강연이라 맨 앞자리에 앉아 정성스럽게 메모하며 경청했다.

박사는 강연의 서두에 평화란 평등과 상호존중, 균형이 이루어진 상태라고 규정한다. 평화와 관련해 미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터무니없이 멀리 떨어져 있는지 구체적인 수치로 설명한다. 미국은 건국 이래 214회나 전쟁에 개입했으며, 2차 대전 이후만 70여 회에 이른다. 거의 전쟁으로 먹고사는 나라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전 세계 140개 국에 미군기지가 있다.

놀랍게도 미국은 그 모든 전쟁에서 전승에 가까운 전과를 올렸다. 전쟁에 승리하지 못한 경우가 딱 두 번 있었다. 베트남전 패배와 한국전 휴전이다. 미국은 한반도의 휴전 상태를 승전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미국은 전승 신화에 도취되어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세계를 생지옥에 빠뜨리고 있다. 미국 사회는 결국 부패와 혼돈에 빠져 향후 25년 내에 제국의 위상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박사는 미국의 인권은 세계 최악이라고 말한다. 이 점에 관한 한 중국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 그런 미국이 걸핏하면 중국과 북한에 대해 인권문제를 들고 큰소리친다. 나는 지금 반미선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평화를 원하고 모든 생명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기 원한다면 제국주의와 제국주의가 강요한 모든 관습과 질서를 거부하자고 당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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