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 동참 요구

미국 기업 보호 위해 플랫폼 법안 제동

트럼프 재집권 땐 대미 투자 기업 타격

“미국 치중 외교로 정부 입지 좁아져”

한국에 대한 미국 정부와 재계의 간섭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추진 중인 ‘플랫폼 공정경쟁촉진법안’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는가 하면, 한국 반도체 장비의 중국 수출을 추가로 통제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올해 11월 5일 예정된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미국 내 투자를 늘린 한국 기업들은 큰 혼란을 겪을 수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했던 정책이 철회되거나 축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세 장벽이 높아져 대미 수출이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바야흐로 ‘아메리카 리스크’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이 지난해 9월 19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열린 하원 과학우주기술위원회의 반도체법 1년 평가 청문회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이날 러몬도 장관은 기업의 중국 사업 확장을 제한한 반도체법 가드레일 최종 규정이 수주 내로 완성될 것이라고 밝혔다. 2023.09.20. UPI 연합뉴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이 지난해 9월 19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열린 하원 과학우주기술위원회의 반도체법 1년 평가 청문회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이날 러몬도 장관은 기업의 중국 사업 확장을 제한한 반도체법 가드레일 최종 규정이 수주 내로 완성될 것이라고 밝혔다. 2023.09.20. UPI 연합뉴스

미국 반도체 업계는 최근 중국에 수출하는 반도체 장비에 대한 통제 조치에 외국 기업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미국 정부에 호소했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는 지난 17일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에 이런 내용을 담은 입장문을 전달했다. 미국의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가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보다 포괄적이라 미국 기업에 불리하다는 게 SIA의 주장이다. 예컨대 미국 기업들은 수출통제 대상으로 명시하지 않은 품목도 첨단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면 중국에 수출할 수 없고 기존에 판매한 장비에 대한 지원 서비스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SIA는 “미국 기업과 달리 한국과 일본, 네덜란드, 대만 등 외국 기업은 수출통제 대상에 포함되지만 않으면 모든 장비를 중국에 수출하고 기술 서비스도 제공할 수 있다”며 “이는 궁극적으로 미국 반도체업계의 경쟁력 약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등 미국의 주요 반도체 장비 업체도 규제의 형평성을 강조하는 내용의 개별 의견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했다.

미국 정부는 업계 건의를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 상무부의 엘렌 에스테베스 산업안보차관은 지난달 12일 한국 전략물자관리원이 개최한 행사에서 “반도체 칩이나 관련 장비를 만드는 국가가 많지 않다”며 “(이런 국가 중 한 곳인) 한국의 참여 없이 (다자 수출통제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미국 재계는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플랫폼 독과점 규제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미국상공회의소는 지난달 29일 한국 공정거래위원회가 추진하는 플랫폼 공정경쟁촉진법안에 이의를 제기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법안은 네이버와 카카오, 구글과 아마존, 메타 등 플랫폼 공룡기업을 시장지배적 사업자로 지정해 불공정 행위를 사전 감시한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미국 상공회의소는 플랫폼 규제 자체의 여러 부작용을 거론하고 있으나 진짜 이유는 구글과 아마존 등 미국 기업이 규제 대상에 포함될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미국 상공회의소는 미국 정부와 의회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제단체다. 미국 정부가 재계 요구에 부응해 한국 정부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법안 추진이 힘들 수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미 공화당의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예비경선)를 앞둔 21일 로체스터에서 선거 유세를 펼치고 있다. 2024. 01. 21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미 공화당의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예비경선)를 앞둔 21일 로체스터에서 선거 유세를 펼치고 있다. 2024. 01. 21 [로이터=연합뉴스]

플랫폼 독점 규제와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가 현재 문제라면 트럼프 전 대통령 재집권은 내년 이후 한국 경제와 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미래 사안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바이든 대통령이 추진했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과학법 등 주요 정책의 효력이 정지되거나 축소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무역협회는 지난달 23일 발표한 ‘공화당과 트럼프의 통상 분야 공약 주요 내용과 시사점’ 보고서에서 트럼프와 공화당이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을 철회하면 한국 기업들이 직격탄을 받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삼성과 현대차, SK, LG 등 많은 한국 기업은 IRA과 반도체지원법 발효에 맞춰 미국 투자를 늘려왔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2022년 8월 이후 미국 내 1억 달러 이상 투자 계획 발표 건 중에 한국 기업의 투자 건수가 20건으로 가장 많았다. 투자 금액도 기업별로 수조 원에서 수십조 원에 달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 당선돼 정책이 바뀌면 엄청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관세 장벽이 높아질 수 있다는 점도 한국 기업에는 악재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모든 외국산 제품에 대해 지금보다 최고 10%포인트 더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른바 ‘보편적 기본 관세’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미국으로 수출하는 한국 제품의 경쟁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대미 교역 규모 자체가 쪼그라들 게 뻔하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통상 분야 공약. [한국무역협회]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통상 분야 공약. [한국무역협회]

이처럼 ‘아메리카 리스크’가 커지고 있는데도 정부 대응은 안이하고 소극적이기만 하다. 중국 관영매체인 글로벌타임즈는 최근 보도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이 발전하려면 대중국 수출을 늘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미국의 정치적 간섭이 주는 영향을 줄여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글로벌 반도체 산업 반등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한국 반도체 산업의 추가적인 회복 열쇠는 미국의 반도체 무역 통제와 아시아 공급망 분열의 영향을 제거하고 감소시키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반도체 산업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미국에 치중된 경제 외교는 우리 정부의 입지를 좁히고 세계 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의 위상을 떨어뜨릴 수 있다. 글로벌타임즈 보도가 중국 국익을 대변한 논평이지만 현 시점에서는 한국 정부도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미국 정부의 요구가 부당하면 적극 해명하고 미국 대선 이후 급변할 상황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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