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인권 대변자 행세한 서구에 실망‧분노 반영
의장성명, 가자‧서안서 팔'인 강제이주 "전쟁 범죄"
'아파르트헤이트' 겪은 남아공, 이스라엘에 초강경
시진핑 "이-팔 갈등 근본 원인, 팔'권리 방치‧무시"
나흘간 휴전…어린이‧여성 인질과 수감자 맞교환
신흥 경제대국 모임인 브릭스가 국제정치 무대에서도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브릭스(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는 21일 올해 의장국인 남아공의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 주재로 긴급 화상 정상회의를 열어 46일째에 접어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문제를 협의했다.
그동안 경제 이슈 위주로 협력을 모색했던 브릭스가 가장 뜨거운 국제정치 현안을 두고 서방 진영과는 다른 독자적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 밑에는 가자 전쟁에서 무차별 폭격과 지상 작전으로 최소 1만4000명의 팔레스타인 민간인 사망자를 낳은 이스라엘의 '만행'을 일방적으로 두둔해온 미국과 영국, 유럽연합(EU)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깔려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대변자로 행세하면서 정작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만행에는 철저히 눈 감고 있기 때문이다.
회의에는 내년 1월부터 새 회원국으로 가입이 확정된 사우디아라비아, 아르헨티나, 이집트, 에티오피아, 이란, 아랍에미리트(UAE)의 정상들도 초청받았다. 이 가운데 인도와 아르헨티나, UAE는 정상 대신 외무장관이 참석했다.
이날 정상회의에서 브릭스 11개국 정상과 대표는 '적대 행위 종식으로 이어지는 즉각적이고 지속가능한 인도주의적 휴전'을 촉구하는 의장성명을 채택했다. 가자 전쟁에 대한 시각이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어 단일한 공동선언 채택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첫술에 배부를 수 없듯이 '글로벌 사우스'(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 중남미의 개도국, 저소득국)를 대표하는 브릭스가 집단으로 회동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내는 자체를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한다. 국제정치 현안과 관련해 서구 진영에 '체급'이 밀리지만, 서구의 눈치만 살피던 과거의 수동적 자세에서 벗어나 서구의 지배적 견해완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게 서구에 부담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정상회의는 '브릭스의 진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의장성명, 가자‧서안서 팔'인 강제이주 "전쟁 범죄"
'아파르트헤이트' 겪은 남아공, 이스라엘에 초강경
정상들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서 벌어진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일제히 비난하고 가자 전쟁 종식과 하마스에 인질 석방을 촉구했다.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민간인 살해와 인질 납치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은 그동안 병원과 학교, 교회, 난민 캠프를 가리지 않고 가자 지구를 무자비하게 폭격해 전세계를 경악시켰다. 또한 회의에서 대다수 정상은 가자와 요르단강 서안에서 팔레스타인인의 강제 이주는 "전쟁 범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장성명은 "우리는 팔레스타인인을 개별로든 대규모든 자기 땅에서 강제로 이주나 추방시키는 것을 비난한다"며 "이는 중대한 제네바협약 위반이며 전쟁 범죄이고, 국제인도주의법(전쟁법) 위반 행위"라고 말했다. 또한 의장성명은 "이스라엘이 불법적인 무력 행사로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집단 처벌하는 것은 전쟁 범죄"라며 "가자 주민에게 의약품, 연료, 식량, 물 공급을 거부하는 것은 대량 학살이나 다름 없다"고 비판했다고 연합뉴스는 전했다.
전체의 입장을 반영해 상대적으로 '온건한' 내용의 의장성명과는 달리 일부 정상의 발언은 이스라엘 비판 수위가 높았다. 300년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를 겪은 남아공의 라마포사 대통령도 그 중 하나였다. 개회사에서 라마포사는 즉각적이고 포괄적인 휴전을 촉구하며 적대 행위 중단을 감시하고 민간인 보호를 위한 유엔군 투입을 제안했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그는 또한 이스라엘의 행위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며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집단적 처벌은 전쟁 범죄이자 제노사이드(집단 학살)와 마찬가지"라고 비판하고 "하마스도 국제법을 위반했으며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런 강경한 분위기는 여러 군데서 확인된다. 남아공 정부는 주이스라엘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한 데 이어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가자에서의 전쟁 범죄 여부 조사를 제기했으며 20일에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를 ICC에 촉구했다. 그리고 남아공 의회도 21일 프레토리아 소재 이스라엘 대사관 폐쇄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시진핑 "이-팔 갈등 근본 원인, 팔'권리 방치‧무시"
유일한 길은 "두 국가"…국제평화회의 소집 제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발언을 통해 긴급을 요하는 필수 조치로 △ 적대 행위 중지와 즉각적인 휴전 △ 민간인에 대한 모든 형태의 폭력과 공격 중단 △ 억류된 민간인 석방 △ 인도주의 회랑 보장 △ 가자 주민에 대한 집단적 처벌 중지 등을 요구했다고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가 전했다. 특히 시 주석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근본 원인과 관련해 팔레스타인 인민의 국가를 가질 권리, 생존할 권리, (고향에) 복귀할 권리가 "오랫동안 방치되고 무시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시 주석은 "분쟁의 악순환을 끊는 실행 가능한 유일한 길은 두 국가 해법, 즉 팔레스타인의 정당한 민족적 권리 회복과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수립에 있다"고 말했다. 시 주석은 이와 함께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룰 국제평화회의의 조속한 개최를 제안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독립된 두 주권 국가 수립과 평화 공존을 규정한 유엔의 결의가 이행되지 않으면서 팔레스타인인은 불공정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지적했다. 푸틴은 특히 가자 전쟁이 "미국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중재를 독점하려는 욕망으로 인한 결과"라면서 "미국의 단독 시도는 실행 불가능하고 역효과를 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두 국가 해법의 이행 외에는 팔레스타인의 안보와 안정을 달성할 방법이 없다"며 이를 위한 포괄적인 평화 프로세스의 시작을 제안했으며, 이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은 자기 운명 결정을 위한 팔레스타인인들의 국민투표를 촉구했다.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은 어린이 등 막대한 팔레스타인 민간인 희생을 개탄하며 끝없는 이스라엘의 공격을 중단시키고 가자 주민을 돕는 게 "이집트의 우선순위"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이스라엘과 관계가 깊고 최근 미국과 급속히 밀착한 인도의 수브라마냠 자이샨카르 외교장관은 "자제와 즉각적 인도주의적 지원과 대화와 외교를 통한 평화적 해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흘간 휴전…어린이‧여성 인질과 수감자 맞교환
이스라엘, 극우 각료 극렬 반발에도 중재안 의결
한편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 발발 46일만인 22일 4일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AP,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이스라엘 정부는 하마스가 억류한 약 50명의 어린이와 여성 등을 나흘간 하루에 10여 명씩 단계적으로 석방하기로 했으며, 추가로 인질 10명을 석방할 때마다 휴전 기간을 1일씩 연장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도 수감 중인 팔레스타인 어린이와 여성 등150명을 풀어주고 가자지구에 연료와 인도주의 지원을 허용하기로 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휴전 기간 가자지구에 대한 공격이나 체포는 없을 것이다. 항공기 운용도 제한하겠다"며 "구호 물자와 연료를 지원할 트럭 수백 대도 가자지구로 진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마스도 휴전 사실을 확인하고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앞서 21일 오후에 열린 이스라엘 각료회의는 유대교 근본주의 정당인 '종교적 시오니스트당'의 지도자 베잘렐 스모트리히 재무장관과 이타마르 벤-그비르 국가안보장관이 극렬하게 반발했으나, 결국 카타르가 중재한 이런 내용의 인질 석방 및 임시 휴전안을 통과시켰다. 벤-그비르는 "매우, 매우 큰 실수가 될 것이다. 재앙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으나, 네타냐후는 "하마스를 파괴하고 포로와 실종자를 모두 송환한다는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계속 전쟁을 할 것"이라며 달랬다. 극우 각료들의 반대에 대해 메르바 미카엘리 노동당 대표는 "성경에 입각해 유대 국가를 만들겠다는 해묵은 사기"라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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