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표:29표…'글로벌 중추국'서 '변방국' 전락
사우디, 우크라전쟁‧가자전쟁 평화적 해결 주도
가치‧이념에 경도된 미‧일 추종 외교 파탄 위기
국제사회 대세 거스른 '가치 외교' 재편 절실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119표 대 29표. 28일 오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박람회기구(BIE) 제173차 총회의 2030년 세계박람회(엑스포) 개최지 선정 투표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와 대한민국 부산이 각각 받아 든 성적표다. 비상하는 사우디와 추락하는 한국을 상징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또한 유치전을 진두지휘했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유능함과 윤석열 대통령의 무능함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지난 5월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반 동안 두 나라 정상이 보여온 엇갈린 외교 행보를 보면 이번 참사는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빈 살만, '국익 우선' 내걸고 독자 영역 구축
미‧중 서로 지렛대로 활용해 양국 지지 확보
빈 살만 왕세자는 한마디로 종횡무진이다. 미국과 서구 동맹국의 강력한 대중국 봉쇄와 줄서기 요구를 물리친 채 '국익 우선'을 내걸고 독자적 외교 영역을 구축해왔다. 그 신호탄이 작년 12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국빈방문 초청과 극진한 대접이었다.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로 격상하면서 '밀월'을 과시했다. 앞서 지난해 7월 러시아 제재 차원에서 유가 하락을 겨냥한 원유증산을 요청하고자 사우디를 찾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냉대했던 터여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대중 봉쇄를 위해 지정학적 전략의 중심을 중동에서 인도·태평양으로 옮긴 미국은 결국 사우디에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올해 6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사우디를 찾은 것이다. 바이든이 빈 살만을 '배후'로 지목하며 국제 왕따를 만들겠다고 공언한 계기였던 2018년 10월의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암살 사건까지 불문에 부쳤을 정도다. 심지어 당시 사우디 방문 기자회견에서 블링컨은 "우리는 누구에게도 미국과 중국 중에서 선택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경고와 협박에서 회유와 타협으로 미국의 접근법이 바뀐 것이다. 미‧중 패권 경쟁과 세계 에너지 시장들, 중동 안보 등이 뒤얽힌 복합적 상황에서 중국 지렛대 전략을 절묘하게 구사한 빈 살만의 완승이었다.
진영 외교 거부…국제사회 화해‧평화 흐름 주도
'배척‧대결 외교'로 고립 자초한 윤석열과 대조
뭣보다 빈 살만은 이분법적 진영 외교를 거부하며 화해와 평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취임후 미국 진영에 가담해 '가치 외교'를 내걸고 배척과 대결로 일관해온 윤 대통령과는 달랐다. 그 첫걸음이 지난 3월 이란과의 국교 정상화 합의다. 베이징에서 중국의 중재로 이슬람 수니파의 수장인 사우디 왕국과 시아파 수장인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오랜 적대 관계를 끝내기로 다짐한 것이다. 2016년 사우디의 이란 성직자 처형으로 단교한 지 7년 만이었다. 이런 흐름을 타고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 지난달 11일 사우디를 찾아 빈 살만과 정상회담을 했다. 사우디-이란 발 화해 기류는 중동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다. 한 달 후인 4월에 카타르와 바레인, 그리고 시리아와 튀니지가 각각 관계 정상화를 발표했고, 사우디와 시리아가 단교 12년 만에 국교 정상화에 합의했다. 5월에는 2011년 아랍의 봄 때 잔혹 행위를 저질러 아랍연맹에서 퇴출됐던 시리아의 공식 복귀를 허용했다. 예멘 내전의 종식 협상도 진행 중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10‧7 하마스 공격에 따른 가자 전쟁으로 전면 중단됐지만, 미국의 중재로 '두 국가해법'을 통한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전제로 이스라엘과의 수교 논의도 추진 중이었다.
사우디, 우크라전쟁‧가자전쟁 평화적 해결 주도
'팔 문제' 아랍·이슬람권 공동결의안 채택 산파
평화의 흐름도 주도해왔다. '우크라이나 국제평화회의'(8월 5~6일‧제다)와 팔레스타인 문제 논의를 위한 '아랍‧이슬람 합동 특별 정상회의'(11월 11일‧리야드)가 대표적 사례다. 사우디가 현재 가장 절박한 두 가지 글로벌 현안인 러시아-우크라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의 종식 및 평화적 해결 방안을 찾는 일에 앞장선 것이다. 미국과 사우디가 공동 주관한 8월의 우크라 국제평화회의엔 요청국인 우크라이나는 물론 한국과 미국, 유럽연합(EU), 중국,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을 포함해 약 40개국이 참가했다. 전쟁의 또 다른 당사자인 러시아를 초청하지 않아 구체적 성과 없이 '반쪽짜리'가 됐지만, 국제무대에서 빈 살만의 위상을 보여주기엔 충분했다. 특히 6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1차 비공개회의엔 불참했던 중국은 사우디 주관 회의에는 참여함으로써 빈 살만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11월의 아랍‧이슬람 합동 특별 정상회의도 대규모 행사였다. 라이시 이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과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비롯한 아랍연맹 소속 22개국과 이슬람협력기구(OIC) 회원국 등 57개국 정상이 참석했다. 회의에선 가자 전쟁과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57개국의 공통된 입장을 모아 '결의문'을 발표했다. 아랍·이슬람권 이슈에서 팔레스타인 문제가 '중심'이며 이 문제를 풀어야 중동 지역의 평화가 가능하며, 그러려면 이스라엘의 점령 종식과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이 이뤄져야 하며, 그 투쟁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곁에 서겠다는 내용이다. 당연히 이견들이 있지만, 아랍‧이슬람권이 단합해 한 목소리를 낸 건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빈 살만은 "팔레스타인 주민에게 저지른 범죄의 책임은 점령 당국에 있다"며 가자 군사작전의 즉각 중지와 모든 포로와 인질 석방을 촉구해 미국과 이스라엘을 압박했다. 당연히 호응을 받았다.
가치‧이념에 경도된 미‧일 추종 외교 파탄 위기
국제사회 대세 거스른 '가치 외교' 재편 절실
그동안 빈 살만은 국제 현안에 대한 사우디의 입장을 결정해야 할 때 미국과 서방의 눈치를 보기보단 글로벌사우스(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 중남미의 개도국, 저소득국)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대세를 따랐다. 작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 침공과 관련해 사우디는 대러 규탄에는 참여했지만, 글로벌 사우스 대부분과 함께 제재 가담은 거부했다. 당시 유엔의 대러 규탄 결의안에 141개국이 찬성했지만, 대러 제재 결의안에는 서구 33개국만이 찬성했다. 10월 27일 유엔 총회의 이-팔 휴전 촉구 결의 채택 과정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펼쳐졌다. 사우디와 글로벌 사우스 대부분을 포함해 120개국이 찬성했고, 미국과 이스라엘 등 14개국이 반대했으며, 한국 등 45개국은 기권했다. 내년 1월부터 신흥 경제대국 모임인 브릭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공)의 정식 회원국이 되는 사우디는 대러 제재 참여 거부와 가자전쟁 휴전 촉구를 놓고 국제사회 '다수'와 보조를 맞췄다.
그러나 한국은 대러 제재엔 적극 가담, 가자전쟁 휴전 결의안엔 기권함으로써 스스로 '소수'임을 자처했다. 그 결과가 이번 BIE 파리 총회에서 받아 든 29표다. 국제 질서가 지역 강국들 중심으로 빠르게 다극화하면서 전통적으로 국제 질서를 주도했던 미국과 서방 진영이 상대적으로 고립되는 가운데 눈감고 미국만을 좇은 윤 정부가 치른 대가가 아닐 수 없다. 취임 직후부터 가치와 이념에 경도된 미‧일 추종 외교에 '올인'한 나머지 글로벌 사우스에 큰 영향력을 지닌 중국과 러시아를 배척하고 대결하는 정책을 편 데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글로벌 중추국가'는커녕 '변방 국가'로 전락한 모양새가 됐다. 윤 대통령은 29일 '파리 참사'와 관련해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하고 "모든 것은 전부 저의 부족"이라고 말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국제사회의 다극화 흐름에 역행하는 이분법적인 가치 외교 기조를 전면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같은 일이 반복될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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