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 봐주기 현상에 '비정상의 정상화'
예외 뒀는데도 “고발 남발우려” 재계 반발
공정위 고발 지침 개정안 수정·보완 검토
모처럼 한 건 하나 했더니 결국 한 발 빼
대기업집단의 일감 몰아주기는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를 목적으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감 몰아주기로 인한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는 중소기업의 사업 기회를 부당하게 박탈하고 자유경쟁 시장 질서를 해친다는 점에서 죄질이 매우 나쁜 불공정거래 행위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일감 몰아주기를 감행한 법인을 고발할 때 여기에 관여하거나 지시한 총수 일가를 함께 고발하는 내용으로 공정거래법 지침을 개정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공정위의 고발 지침 개정은 심각한 범죄인 일감 몰아주기와 사익편취를 차단하는 최소한의 장치라는 점에서 당연하다. 그런데도 재계는 “총수 일가에 대한 과도한 고발로 기업 활동을 위축시킬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재계는 또 "위반 행위가 명확할 때만 고발한다는 공정거래법 조항과도 상반된다"고 주장한다.
광고주인 기업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보수언론도 재계와 동조하며 공정위를 전방위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이에 공정위는 고발 지침 개정안을 재검토하기로 했다고 연합뉴스가 7일 전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 모처럼 제대로 된 정책을 내놓은 공정위가 재계의 억지 논리와 생떼에 밀려 한발 물러서려는 모양새다.
공정위는 지난달 19일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등의 위반행위의 고발에 관한 공정거래위원회의 지침’ 개정안을 이달 8일까지 행정예고 한다고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공정거래법 제47조 1항 또는 3항 이하에 명시된 ‘특수관계인에 대한 부당한 이익제공 등’의 행위(사익편취 행위)가 중대해 해당 행위를 한 사업자, 즉 법인을 고발하는 경우 이에 관여한 특수관계인(총수 일가)도 원칙적으로 고발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공정위는 “그동안 중대한 사익편취 행위를 한 사업자를 고발하더라도 공정위의 (임의) 조사만으로는 특수관계인의 관여 정도를 명백히 입증하기 곤란해 특수관계인을 고발하지 못하는 사례가 있었다”며 고발 지침 개정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대한 사익편취 행위에 특수관계인이 관여했다면 그 관여 정도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는 게 마땅하므로 이를 원칙 고발 대상으로 규정해 검찰 수사를 통해 특수관계인의 관여 정도를 명백히 밝힐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정위의 행정예고가 나오자 재계는 "기업인에 대한 고발이 남발될 수 있고 고발 사유가 불분명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공정위는 고발 권한을 엄정하고 객관적으로 행사하기 위한 조항을 두고 있다. 지침상 원칙 고발 대상은 아니지만 고발할 수 있는 예외적 고발 사유와 원칙 고발 대상이지만 고발하지 않을 수 있는 예외적 고발 제외 사유를 구분해 그 사유를 구체적으로 열거한 것이다.
예컨대 예외적 고발 사유에는 생명과 건강 안전에 영향을 주거나 사회적 파급효과, 국가재정에 끼친 영향, 중소기업에 미친 피해 등이 포함된다. 예외적 고발 제외 사유는 위반행위의 자진 시정, 과거 법 위반 전력의 부존재 등이다. 무조건 고발되는 사태를 막기 위한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재계의 주장이 ‘반대를 위한 반대’일 뿐 근거가 빈약하다는 의미다.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 금지 규제는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4년 2월 도입됐다. 대기업집단이 특정 계열사를 부당 지원하는 과정에서 총수 일가가 이익을 보더라도 제재할 수 없었던 구멍을 메운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공정위가 대기업집단의 사익편취 제재하면서 수혜자인 총수 일가를 고발하는 건이 크게 줄었다.
경제개혁연대에 따르면 2020년 이후 공정위는 미래에셋과 금호아시아나, 하림, SK, 한국타이어, 호반건설, OCI, 세아 등 대기업집단 8곳의 사익편취를 적발해 제재했다. 이중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을 뺀 나머지 기업의 총수 개인은 고발하지 않았다. 한국타이어의 경우 공정위가 고발하지 않았으나 검찰이 자체 수사를 통해 지난 3월 사익편취 수혜자인 조현범 회장을 구속기소 한 바 있다.
공정위는 2020년 이전엔 현대와 한진, 하이트진로, 효성, 대림, 태광 등 6개 기업의 사익편취를 제재하며 6건 중 5건에 대해 총수 일가를 고발했다. 법원도 사익편취 사건에서 특수관계인, 즉 총수 일가의 ‘관여’를 적극적으로 판단하는 추세다.
올해 3월 대법원(2022두38113 판결)은 태광그룹 사익편취 사건에서 “특수관계인이 계열회사의 임직원 등에게 부당한 이익제공행위를 장려하는 태도를 보였거나 특수관계인이 해당 거래의 의사결정 또는 실행과정에서 계열회사의 임직원 등으로부터 부당한 이익제공행위와 관련된 보고를 받고 이를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승인하였다면 그 행위에 관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또 “특수관계인의 관여 여부는 여러 정황과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하며 특수관계인은 기업집단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법원의 이런 판단과 달리 최근 4년 간 공정위는 사익편취 제재를 하면서 총수 일가에 대한 고발에는 소극적이었다. 총수 일가의 직접적 관여나 지시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총수 봐주기’라는 비판이 제기되자 이번에 공정거래법의 고발 지침을 개정해 총수의 사익편취를 더 적극적으로 판단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할 수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사익편취를 확실하게 규제하려면 심사 지침에 특수관계인의 관여와 지시의 판단 방법을 상세하게 명기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법원 판결의 취지에 맞게 특수관계인의 지시와 관여를 판단하는 기준을 구체적으로 적시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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