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대 기업 상반기 현금 자산 62조 급증
법인세 인하분 투자와 채용에 쓰지 않아
기업 실적 악화와 법인세율 인하 겹치며
법인세 올 들어 8월까지 20조 이상 감소
“다수의 연구와 국제기구 등이 법인세 인하가 투자 확대와 일자리 창출 효과가 있고 성장 효과가 있다며 권고하고 있다. 이들(기업들)이 투자를 늘리면 생산성이 높아지고 일자리와 세수의 선순환이 일어난다. (법인세 인하 효과는) 다 국민께 돌아간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년 전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기재부 국정감사에 출석해서 한 발언이다.
그의 말이 ‘희망 사항’일 뿐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또 드러났다. 지난해 세법 개정으로 올해부터 법인세 최고세율을 25%에서 24%로 낮추었는데도 대기업의 현금과 현금성 자산이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이다. 여기에는 법인세 인하분도 포함됐을 것이다. 법인세를 깎아주면 기업들이 투자와 채용에 투입할 것이라는 기대가 허상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기업 데이터연구소인 CEO연구소가 11일 발표한 500대 기업 중 반기보고서를 제출한 278개 기업의 현금 보유 현황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이들 대기업의 현금을 포함한 현금성 자산이 294조8254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2조2336억 원이 늘었다. 같은 기간 이익잉여금은 1136조3612억 원에서 1189조2233억 원으로 52조8621억 원 증가했다. 현금성 자산이 26.8% 넘게 늘어나는 동안 이익잉여금의 증가율이 4.7%에 그친 것이다.
CEO스코어는 “기업 대다수가 이익잉여금 증가액 이상으로 현금을 늘려 가용 자원을 확보한 상태”라며 “불안정한 경제 탓에 기업들이 변동성에 대응하기 위해 위험 관리 역량을 강화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현금성 자산이 가장 많은 기업은 삼성전자로 6월 말 기준으로 79조9198억 원에 달했다. 1년 전의 39조5831억원의 2배 이상인 40조3367억 원이 늘어난 것이다. 이는 전체 증가분의 65%에 육박한다. 삼성전자는 올해 상반기에 단기금융상품을 대거 처분하는 방식으로 현금 유동성을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전자를 포함해 현금성 자산이 1조 원 이상 늘어난 대기업은 모두 9곳이었다. 현대자동차(4조6483억 원)와 LG에너지솔루션(2조8767억 원), SK에너지(1조8442억 원), 두산에너빌리티(1조6271억 원), LG화학(1조5676억 원), SK하이닉스(1조4945억 원), 삼성물산(1조2496억 원), 현대삼호중공업(1조151억 원)이다.
대기업들은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투자는 물론 인력 확충에도 소극적이다. 한국경제인협회가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올해 하반기 신규 채용계획을 조사한 결과 10곳 중 6곳 이상은 신규 채용을 늘리지 않겠다고 답했다. 올해 채용계획이 없다는 기업도 16%가 넘었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법인세 인하를 밀어붙였다. 법인세 부담을 줄여주면 기업 투자와 고용이 증가하는 낙수효과가 생길 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 주요국 등 선진국에 비해 한국의 법인세율이 높다는 점을 개편해야 할 이유로 내세웠다. 재계는 한술 더 떴다. 최고세율을 22%까지 낮추고 과세표준 구간을 지금의 4단계에서 2단계로 단순화하라는 것이었다. 야당과 시민단체의 반발로 최고세율을 1%포인트 낮추는 선에서 세법 개정안이 통과됐으나 정부와 여당은 여전히 부자 감세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 7월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23년 세법 개정안’에도 증여세 감면 등 감세 방안이 담겼다.
법인세 인하로 기대했던 효과는 없는데 부작용은 점점 커지고 있다.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8월 국세 수입 현황’을 보면 법인세는 올해 들어 8월까지 62조3000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조2000억 원 감소했다. 같은 기간 국세 수입이 47조 원 줄었으니 감소분의 43%를 법인세가 차지한 셈이다. 이는 수출과 내수 동반 부진으로 기업들의 영업이익이 감소한 것과 법인세 인하가 맞물린 결과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은 법인세 인하의 낙수효과가 없다는 보고서를 여러 차례 발표한 바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감세 정책을 비판하며 똑같은 주장을 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시대착오적인 이론을 ‘전가의 보도’처럼 여기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법인세를 많이 내고 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 법인세 최고세율은 높아도 실효세율은 주요국 대비 높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실효세율은 각종 공제나 감면 조처를 받은 뒤 기업이 실제 납부할 때 적용하는 세율을 말한다. 실제 기업의 세금 부담을 더 잘 보여주는 지표일 수 있다.
각국은 연구개발과 시설투자 등을 명목으로 법인에 대한 세금을 감면 또는 공제하고 있다. 나라마다 제도가 달라 실효세율을 단순 비교하기 어렵다. 다만 한국도 법인에 주어지는 각종 공제·감면 제도가 수십 개에 달하는 만큼 경제 규모가 비슷한 주요 국가들과 비교해보면 실효세율이 높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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