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현의 정치 새판] 시민 집단지성으로 현안 해법 도출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모든 정당은 민심과 여론, 즉, 국민의사를 신주단지처럼 받들어 모시겠다고 말한다. 모든 사안에서 국민을 위한 최상의 해법이나 국민의사에 따른 최상의 해법이란 것을 내놓고 서로 경쟁한다. 국민의사에 따라 문제해결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민의사를 확인할 수 있어야한다. 국민의사란 것이 사안이 발생할 때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자동으로 생기는 게 아니다. 복잡다단하고 민감미묘한 사안일수록 일반시민들은 언론매체의 뉴스보도, 정치권의 설전, 전문가 방송토론, 지인과의 대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알게 모르게 학습하며 서서히 또한 역동적으로 자기의견을 형성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국민의사는 순간적인 반응이나 오랜 숙성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시민 개개인의 찬반의사와 호불호판정, 가치평가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해 그때그때의 국민의사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여론조사다. 여론조사는 무작위 추출된 미니국민 500명 이상을 대상으로 진행된다. 인구수와 상관없이 1000명 대상이 가장 흔하다. 오차율이 위아래로 3%밖에 안 되는 반면 여기서 더 줄이려면 기하급수적으로 더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삼아야 해서 비용을 감당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비전과 원칙, 광장 운영 및 활용 방안에 대한 의견 수렴을 위한 1차 시민대토론회. 서울시는 19세 이상 25개 자치구 거주자를 성별, 연령별로 총 300명을 균형 표집해 시민토론단을 구성했다. 2019.12.7 연합뉴스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비전과 원칙, 광장 운영 및 활용 방안에 대한 의견 수렴을 위한 1차 시민대토론회. 서울시는 19세 이상 25개 자치구 거주자를 성별, 연령별로 총 300명을 균형 표집해 시민토론단을 구성했다. 2019.12.7 연합뉴스

여론조사로 표출되는 중요한 사안에 대한 5000만의 국민의사란 게 100% 단일한 경우는 상상하기 어렵다. 언제나 다양한 의견으로 갈리게 마련이고 성별, 연령대별, 지역별, 교육수준별, 소득층위별, 정치성향별 등 많은 차이가 의견의 단층선을 제공한다. 여론조사 결과는 언제나 신중한 해석을 요구한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각 항목별로 집계된 단선적 데이터를 총체적, 복합적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설령 총체적, 복합적으로 이해해도 여론조사 결과가 보여주는 것은 대체로 표층적인 국민의사이기 때문이다. 사안의 중요도와 복잡성에 비해 여론조사 응답자들의 정보편차가 클수록 그렇다.

여론조사 표층성 한계 극복할 수 있는 대안

여론조사 결과로 드러나는 표층적 국민의사는 심층적 국민의사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일 뿐 그 자체로 심층적 국민의사로 보기는 어렵다. 설령 심층적 국민의사라고 해도 다소 시간이 지나고 나서 자기파괴적인 국민의사로 판명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이는 심층적 개인의사에도 어둡고 잘못된 측면이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여론조사결과로 드러나는 표층적 국민의사는 물론이고 체계적이고 정교한 해석을 통해 드러난 심층적 국민의사라 할지라도 ‘닥치고 추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여론조사의 몇 가지 한계를 꼽자면, 첫째, 여론조사는 ‘다른 조건들이 같다면’이라는 비현실적인 조건을 전제하고 여러 문항을 질문한다. 여론조사를 통해 확인된 국민의사도 다른 조건들이 바뀌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개개인은 학습이나 토론, 숙고 없이 즉각적으로 자기의견을 말해줘야 하지만 같은 응답자들이 학습이나 토론, 숙고를 거칠 경우 얼마든지 의견이 달라질 수 있다. 둘째, 복잡한 설명이 필요한 새로운 발상이나 가상적 사고실험은 조사대상으로 삼기에 부적합하고 단편적인 찬반의견을 넘어 종합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여론조사의 본령이 아니다.

셋째, 여론조사는 돈이 들기 때문에 설문문항을 통해 돈을 대는 의뢰자의 관심과 이해관계를 반영하게 마련이다. 대통령실과 여야정당, 언론기관과 대기업이 가장 유력하고 빈번한 의뢰자들이다. 이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의제는 아무리 중요해도 여론조사대상이 되지 못하고 여론조사 문항과 선택지는 기본적으로 이들의 관점과 관심을 반영하게 돼있다. 한마디로 여론조사는 강자의 무기다. 넷째, 여론조사결과는 아무런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현실세계의 정치권은 여론조사 결과를 자기에게 유리한 경우에만 선택적으로 추종하고 불리한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입을 닫아버리는 경우가 많다.

여론조사의 몇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찬반이 팽팽하게 갈리지 않고 2대 1 이상으로 나뉘어 어느 한쪽이 2배 이상 압도할 경우에는 그쪽으로 상당한 수준의 사회적 합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그 사회적 합의를 충분하게 숙의를 거친 상태에서 강력하게 근거 지워진 사회적 합의라고 하기는 어렵다. 여론조사로 드러난 사회적 합의는 언제나 표층적인 사회적 합의로 봐야 한다.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 언론매체나 시민단체 등이 다양한 학습토론 기회를 제공하는 경우에도 여론조사 응답자 개개인의 학습토론 참여 편차가 몹시 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여론조사 결과로 드러난 사회적 합의는 여론조사 응답자들이 균질적으로 학습, 토론할 경우에 도달할 사회적 합의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고작 1000명~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여론조사결과에 공신력이 주어지는 이유는 여론조사 샘플집단을 랜덤 샘플링 기법을 통해 인구통계학적인 국민의 축소판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1000명의 샘플집단은 조사항목에 관해서 1회성으로 국민전체를 대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국민투표를 실시해서 18세 이상 4400만 유권자 모두에게 국민의사를 묻지 않는 이상 여론조사와 같은 방식으로 미니국민집단을 만들어서 국민의사를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시민의회는 여론조사와 동일한 방식으로 국민을 쏙 닮은 미니국민집단을 만들어서 국민의사를 확인하는 방법이지만, 그 미니국민들에게 상이한 입장을 가진 최고수준의 전문가들을 붙여서 집단학습과 숙의과정을 제공함으로써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국민의사가 아니라 집단지성으로 다듬어진 국민의사를 확인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여론조사와 구별된다.

정치인이나 전문가는 직업적으로 공적 문제에 대한 학습과 토론을 하지만 일반시민은 생업에 바쁘고 자기 일이 아니라서 그러기 어렵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민주주의가 정치인의 지배나 전문가의 지배를 의미하지 않고 일반시민의 지배를 의미한다면 일반시민의 뜻을 알아야 하는데 일반시민은 공적 사안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무지하거나 무기력한 경우가 많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여기저기서 논란과 반발이 끊이지 않는 중대정책현안에 대해 깨어 있고 책임지는 국민의사가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인가? 시민의회는 이와 같은 민주주의의 핵심 질문에 대한 혁신적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질문에 대한 혁신적 해법

시민의회 해법은 첫째, 선거엘리트의회에 대비되는 추첨시민의회를 만드는 데서 출발한다. 성별, 연령대별, 지역별, 직업별, 소득층위별, 학력수준별, 정치성향별로 최대한 국민을 빼닮은 미니국민집단을 추첨으로 만들어낸다. 둘째, 이렇게 만들어진 시민의회에 상이한 관점과 입장을 가진 최고수준의 전문가들을 붙여서 시민의원들이 안건에 관한 상이한 주장과 논거를 충분히 학습하고 동료시민들과 토론과 숙의를 거치게 한다. 셋째, 집단지성으로 옷 입은 시민의회는 진영논리나 당파성, 특수이익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일반시민의 현실감각과 균형감각을 동원해서 정책권고안을 작성, 공표한다. 깨어있는 국민의사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시민의회의 독특한 장점은 논란이 많은 정책현안에 대해 충분히 학습하고 숙의한 미니국민이 어떤 종합 진단을 내리고 어떤 처방을 권고할지 알려주는 데 있다.

물론 시민의회 방식 외에도 국민의사를 대표하든가 확인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에서 선거의회나 사법부(헌재 포함)는 엘리트 대의권력의 세상이라 자기네들끼리의 토론숙의에 그칠 뿐 일반시민이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반면 일반시민이 목소리를 내는 여론조사나 국민투표는 공식적인 학습숙의과정을 제공하지 않는다. 촛불광장집회나 타운홀미팅도 다르지 않다. 때때로 거대한 집단지성과 뜨거운 집단열정이 출렁이지만 참여자들에게 잘 준비된 집단학습기회를 제공하진 않는다. 이 점에서 시민의회는 독보적이다.

시민의회는 OECD국가들에서 이미 민주주의혁신 조류로 자리잡았다. OECD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까지 가입국가들에서 총 282회의 시민의회가 운영됐다. 영국, 독일, 프랑스처럼 큰 나라와 벨기에, 아일랜드, 아이슬란드처럼 작은 나라를 가리지 않고 '숙의 파도'의 세례를 받았다. 시민의회는 전 유럽에서 특히 지자체 차원에서 혁신적인 민주적 대표기구이자 정책현안 해결기구로 각광받는 숙의민주주의의 깃발이다. 선거의회가 20세기 민주주의의 새 표준이 되었듯이 시민의회는 21세기 민주주의의 새 표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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