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농복합안에 꽃길 깔아줄까 우려된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선거제개편 공론화를 위한 500인 시민참여형조사가 지난 6일(토) 첫날 회의를 끝냈다. 오는 13일 회의를 남겨놓고 있지만 동일한 패턴으로 진행될 예정이라 하루를 지켜보고도 평가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무엇이든 첫술에 배부를 수 없지만 아쉽고 실망스럽다. 정치적 의도가 작동했건 전문역량이 부족했건 공론화설계가 부실해서 외화내빈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이 글은 이런 판단에 이르게 된 이유와 배경을 설명한다.
500인 시민대표의 숙의공론조사의 진행방식
시민대표 500인은 최초 대규모 여론조사에 응한 18세 이상 시민들 중에서 공론화회의에 참여 여부를 물어 수락한 이들 가운데 여론조사결과에 맞춰 성별, 연령별, 지역별 조정을 거쳐 선발됐다. 상세한 기획설계문건이 공개되지 않아 더 이상은 알 수 없지만 나름대로 민주적 대표성을 가진 ‘미니국민’으로 구성됐을 것이다. 500인 회의는 5월 6일과 13일에 하루 8시간씩 총16시간 동안 모두 12인의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선거제개편의 여러 측면을 집단 학습하고 질의응답시간과 토론시간을 갖는다. 500인 회의는 총 16시간 동안 전문가들의 간단한 발표와 답변을 먼저 듣고 1차 내부토론시간을 가진 후 다시 전문가들과 2차 질의응답시간을 갖고 2차 내부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집단학습과 숙의과정을 진행한다.
집단적인 학습숙의과정을 거치지만 근본성격은 여론조사이기 때문에 학습숙의과정 전후에 세 차례나 동일한 설문조사를 실시해서 학습숙의과정 진행에 따른 의견의 변화와 추이를 추적한다. 500인 시민대표들은 효율적인 숙의진행과 비용절감을 위해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다섯 곳에 분산돼 회의를 진행했다. 국회정개특위가 행사컨소시엄 주체의 하나로 KBS를 끌어들인 덕분에 무대장치와 영상중계 등 기술적인 측면에서 한 치의 오차가 없었다. 다섯 지역의 시민대표들이 차질 없이 연결돼 동등하게 참여했다. 내용전문가 12인은 서울 KBS홀에서 발표하고 질문에 답변했지만 다른 4개 지역의 시민대표들과 소통하는 데 아무런 기술적 문제가 없었다.
500인 시민참여형조사, 나름 의미 있는 혁신적 시도이다
우선 국회(정개특위)가 이런 시민공론화과정을 의뢰한 점은 높이 평가해줄 만하다. 선거제개편은 국회의원과 정당이 직접당사자라서 시민의견을 듣지 않고서는 민주적 정당성이 몹시 취약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공식인정한 셈이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공영방송 KBS TV로 전국에 생중계된 점도 전 세계의 부러움을 살 만하다. 지금까지 시도된 세계 각국의 시민의회나 숙의공론조사 중 국가대표 TV방송채널로 몇 시간씩 전국으로 생중계된 건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특히 수도권 시민대표 249명이 모인 여의도 KBS홀의 무대장치가 인상적이었다. 양쪽에 계단식 벤치를 설치해 시민대표들이 층층이 마주보고 앉은 모습이 영국 국회의사당의 본회의장을 연상시켰다. 전반적으로 겉모습은 흠잡을 데 없이 진행됐다.
기획그룹은 공론화 500인 회의를 “공론조사의 한 형태인 시민참여형조사”라고 규정한다. 시민참여형조사는 “여론조사의 약점을 보완한 것으로 시민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논의하도록 함으로써 정제된 국민여론을 도출”하는 게 목적이다. 핵심적인 과정은 각 주제마다 내용전문가 3인과 50명도 넘는 진행전문가(퍼실리테이터)들의 지원으로 진행될 학습숙의과정이다. 1, 2차 숙의과정에서 시민 500인이 내놓을 의견들과 숙의과정에서 실시될 설문조사결과는 국회정개특위에 제출돼 참고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다. 선거제개편에 대해 규모 있는 시민참여형조사를 실시하고 전국적인 TV생중계를 통해 본격적인 공론화를 시도한 점은 후하게 평가할 수 있다.
국회정개특위 입김일까? 숙의자료집에 시민의회가 안 보인다
여기까지다. 숙의자료집은 공론화 방법으로 공청회, 여론조사, 시민배심, 합의회의를 열거하면서도 가장 대표적이고 수준 높은 공론화 방법인 시민의회는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숙의민주주의의 형식으로도 똑같이 소개하면서도 OECD보고서가 숙의민주주의의 기수라고 칭한 시민의회는 슬쩍 뺀다. 숙의자료집을 집필한 전문가그룹이 시민의회를 모를 리 없기 때문에 국회정개특위 검열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시민의회 용어가 배척되었다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숙의자료집에서 시민의회라는 용어를 삭제한다고 해서 OECD보고서가 “숙의물결”(deliberative wave)이 몰려온다고 표현한 시민의회의 개념과 실천이 사라질 리 없다. 숙의자료집에서 숙의민주주의나 공론화방법을 나열하면서 시민의회가 빠진 것은 시민의회 ‘분서갱유’에 다름 아니다.
국회정개특위는 옹졸할 뿐 아니라 무지하다. 의회는 모름지기 선출의회지 무슨 추첨의회냐는 생각부터 무지의 소산이다. 민주적 국민대표기관으로서 의회의 원조를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찾는다면 그때의 의회는 선출의회가 아니라 추첨의회였고 결과적으로 당연히 국민을 닮지 않은 엘리트의회가 아니라 국민을 그대로 닮은 시민의회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선거엘리트의회가 아니라 추첨시민의회가 민주적 국민대표기구의 원조였다. 추첨시민의회가 선거엘리트의회의 지위와 권한을 뒤흔드는 위험한 라이벌이기 때문에 그 불온한 개념이 확산되지 못하도록 용어의 등장부터 원천봉쇄해야한다는 국회정개특위의 생각도 무지의 소산이다. 추첨시민의회는 선거제개편, 세비책정, 지역구획정처럼 국회의원 전원이 집단제척사유를 갖는 이해충돌사안을 주권자 시민을 대표해서 처리하기 때문에 양자는 국민을 위한 분업과 협업 관계로 봐야 맞다.
엄밀히 따지자면 주권자 국민을 100% 닮는 추첨시민의회가 주권자 국민을 전혀 닮지 않는 선거엘리트의회보다 민주적 대표성과 정당성이 더 크고 직접적인 국민대표기구다. 선거엘리트의회는 정당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속성상 2차적이고 간접적인 국민대표기구로 볼 수 있다. 사안의 속성상 선거엘리트의회가 맡는 게 부적합한 세비책정 등 셀프입법사안은 물론이고 정당정치의 속성상 선거엘리트의회가 쉽게 다루지 못하거나 교착상태에 빠진 중대정책사안은 추첨시민의회를 재등장시켜서 해결해야 한다. 주권자와 선거엘리트의회 사이에 국민투표보다 신속하고 용이하게 주권자의사를 확인할 수 있는 추첨시민의회가 일정한 요건 아래 작동해야 선거엘리트의회가 국민의 뜻에 더 깨어 있을 수 있다.
시민참여형조사 대신 시민의회가 제격이었다
숙의자료집에 따르면 선거제개편을 놓고 시민참여형조사를 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선거제개편은 각 당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의회 내에서 여야합의를 도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 “국회의원들에게만 선거제도 개편을 맡기면 유권자의 의견을 적절히 반영한 제도를 만들 수 있을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셋째, “경기를 뛰는 선수가 만든 규칙이 국민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도 낮”기 때문이다. 구구절절 옳다. 이런 불편한 진실들이 숙의자료집에 버젓이 실린 사실은 국회정개특위가 시민의회란 라이벌 용어 자체를 빼줄 것과 후술하듯이 도농복합안을 최대한 배려해줄 것을 요청했을 가능성은 높지만, 달리는 공론화과정에 개입하진 않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숙의자료집에서 밝힌 세 가지 이유들은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특히 경기를 뛰는 선수가 규칙을 만들면 관중의 뜻을 얼마나 반영할지 알 수 없어서 관중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는 비유가 그렇다. 국회정개특위가 게임의 룰(선거법)은 선수합의(여야합의)로 만들어야한다는 ‘게임의 룰’ 통념을 깬 부분을 높이 평가하고 이런 입장을 향후 선거법개정국면에서도 흔들림 없이 고수하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말이다. 지금까지는 선수가 게임의 룰을 정해왔는데 그게 부적절하다면 누가 게임의 룰을 정해야 할 것인가? 국회정개특위는 여기서 딜레마에 빠진다.
국회의 셀프입법특권 수호의지가 작동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숙의자료집에서 밝혔듯이 국회(선출의회)가 게임의 룰을 만드는 게 부적절하다면 당리당략과 재선욕망에서 자유로운 시민의회가 제격이지만 국회정개특위 입장에서 시민의회는 떠올리기도 싫은 위험한 존재다. 부담스러운 권고안을 내놓을까봐 걱정되기 때문이다. 유력한 개편안 두 셋을 선택지로 주는 숙의공론조사도 선호순위가 불리하게 나올까봐 부담스럽다. 이제 남은 것은 독립전문가위원회를 구성해서 선거제개편 권고를 맡기는 방안인데 국회정개특위는 이것도 부담스럽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가장 안전한, 선택지를 주지 않는 ‘시민참여형조사’방식이다. 국회가 셀프입법방식을 통해 선거제를 개편해야만 안심이 된다는 뜻이자 셀프입법특권을 내려놓기가 그만큼 어려워서 요리저리 피한다는 뜻이다. 이는 국회의원의 셀프입법특권이야말로 선거제개편과 정치개혁을 위해 반드시 타파해야 할 영순위특권임을 말해준다.
상상해보라. 국회정개특위가 옹졸하고 구차스런 특권방어 행태에서 벗어나, 직접당사자들이 제대로 된 선거제개편을 무슨 수로 하겠냐며 시민의회를 운영해서 시민눈높이 권고안을 받겠다고 선언했더라면 오죽 좋았으랴. 선거제개편을 넘어 국민들이 바라마지않는 의원특권해소책에 대해서도 시민눈높이 권고안을 받겠다고 선언했더라면 오죽 좋았으랴. 시민의회와 함께 온라인 참여공간을 제공해서 일반시민들이 바람직한 구상과 제안을 봇물처럼 쏟아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이렇게 신명나는 과정을 거쳐 시민의회가 집단지성과 사회적 합의에 힘입어 바람직한 선거제개편안과 정치개혁안을 내놓았더라면 국회와 정치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한 뼘은 높아졌을 터이다.
책임성이 선거제의 3대 목표 중 하나라고?
4월 16일에 공론화준비 컨소시엄이 구성돼 5월 6일에 공론화회의를 했으니 공론화회의 준비기간이 고작 3주밖에 없었다. 이런 시간제약을 감안하면 숙의자료집은 전반적으로 잘 만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중대한 하자가 몇 개 있다. 첫째는 선거제의 3대 목표 중 하나로 책임성을 올려놓은 점이다. 숙의자료집의 설명과 달리 책임성이 의원 개개인의 책임성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도 의문이고 대표성과 비례성, 등가성만큼 중요한 목표인지도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의원 개인의 책임성 확보를 선거제의 3대 목표 중 하나라고 설정하는 순간 소선거구 유지나 소선거구 확대판인 중선거구제만 채택가능하고 대선거구 비례대표제나 전국단위/권역단위 비례대표제는 배척될 수밖에 없다.
숙의자료집이 보여주듯이 OECD국가 중 소선거구를 채택한 나라는 미국, 영국, 캐나다 등 5개 국에 지나지 않고 무려 24개 국이 대선거구 비례대표제나 전국단위/권역단위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렇다면 순수한 비례대표제를 채택한 대다수 OECD국가들이 모두 책임성에 아랑곳하지 않는 나라들이란 말인가. 그럴 리 없다. 이 나라들은 의원 개인의 책임성이 선거제의 3대 목표 중 하나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현대 민주주의는 정당민주주의이기 때문에 정당의 책임성을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래서 100% 비례대표제를 채택했다고 설명할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선거제의 제일 중요한 목표는 비례성이다. 모든 정당이 득표율에 비례해서 의석을 확보할수록 비례성이 강화된다. 비례성이 강화될수록 모든 표심이 제 몫의 대표를 갖게 돼 사표가 사라지고 대표성이 강화된다. 모든 정당이 제 몫의 대표를 갖게 되기 때문에 정치적 다양성이 저절로 강화된다. 비례성이 강화될수록 모든 정당이 득표율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정당의 책임성이 또한 강화된다. 요컨대, 비례성을 강화하면 다양성과 대표성, 책임성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점에서 정의로운 선거제가 지향해야할 가장 중요한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단연 비례성이다. 비례성은 선거제가 지향하는 다른 모든 가치와 목표를 선도하고 압도한다.
이렇게 볼 때 숙의자료집을 작성한 전문가그룹이 선거제의 목표를 대표성, 책임성, 비례성이라고 정식화하며 마치 세 개의 목표가 서로 대등한 가치를 가진 것처럼 서술한 것은 상당부분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숙의자료집이 대표성을 '국민 재현성'으로 설명한 부분도 설득력이 없다. 정당민주주의국가에서 선거의 기능은 국민을 닮은 대표자를 뽑는 데 있지 않고 유능한 대표자를 뽑는 데 있다. 선거결과로 구성되는 선출의회는 추첨결과로 구성되는 추첨의회와 달라서 일반국민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요컨대, 국민재현성으로 해석된 대표성은 선거의 속성에 반하기 때문에 선거제의 현실적 목표가 되기 어렵다.
설령 대표성을 국민재현성으로 해석해도 이런 의미의 대표성을 제일 잘 구현할 선거제도는 여럿을 뽑아서 정당차원에서 다양한 후보를 낼 수 있는 대선거구 비례대표제나 권역단위/전국단위 비례대표제이지 1등만 뽑는 승자독식 소선거구제나 2, 3등까지만 뽑는 중선거구가 아니다. 선거제의 목표 중 하나로서 대표성은 현실적으로는 사표성의 반대개념으로만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서 대표기관이 국민을 닮을수록 대표성이 있는 게 아니라 사표가 없을수록 대표성이 있는 것이고 이렇게 이해된 대표성은 비례성 혹은 비례대표성에 다름 아니다.
도농복합안에 대한 은근한 배려가 의심된다
반드시 지적해야할 또 다른 문제는 숙의자료집이 선거제 개편안들 가운데 도농복합안에 대해서만 특별히 지면을 할애하여 소개하는 점이다. 전문가 발표답변에서도 드문드문 도농복합안을 지원사격하는 발언이 있었다. 500인 시민대표들이 도농복합안에 꽃길을 깔아주기 위해 동원되고 있다는 의심까지 들었다. 국힘당이 제안했지만 국회의장이 선호하고 민주당도 끌리는 안이 도농복합안이다. 1인만 뽑는 도시지역의 소선거구를 2, 3인을 뽑는 중선거구로 바꾸자는 안이라서 거대양당 소속 현역의원들의 재선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숙의자료집 작성책임을 맡은 서울대사회발전연구소가 도농복합안을 특별취급 해달라는 국회정개특위의 요청과 압력을 뿌리치지 못한 결과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주최 측이 중립성 의무를 저버리고 국회의장이 선호하는 도농복합안에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숙의자료 내용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숙의자료집의 구성과 내용, 그리고 500인 회의진행방식에서 객관성을 의심할 만한 구석이 군데군데 엿보인다. 특히 국힘당이 제안하고 국회의장이 선호한다는 이른바 도농복합안으로 유도하는 부분이 유감스럽다. 여기서 숙의자료집 검증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본래 숙의자료집의 내용과 구성방식은 철저하게 이해관계자와 전문가그룹의 더블체크를 거친 후 배포되어야한다. 상이한 입장을 가진 전문가들과 상이한 이해관계를 가진 이해관계자들의 이중점검을 거쳐서 그 내용과 구성방식의 정확성과 객관성, 균형성을 검증받았어야 했다.
안 봐도 비디오다. 국회정개특위가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일정표에 맞추려면 절대적으로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이럴 때가 바로 전문가들이 자율성을 발휘해야 할 때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3주 안에 공론화회의를 개최하라는 국회정개특위의 무리한 요구에 서울대사회발전연구소가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전문가의 세계에서 섣부른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중립성은 전문가에게 요구하면 안 된다
숙의민주주의적인 공론화방식의 핵심은 의뢰기관과 설계기관, 진행기관이 모두 어떤 결과나 방향을 은근히 유도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철저하게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오해해서는 안 된다. 주최기관이 그래야 한다는 것이지 전문가 개개인에게는 중립성을 요구하면 안 된다. 오히려 전문가 각자는 뚜렷한 입장과 풍부한 논거를 제시하며 다른 전문가의 상이한 입장을 개념적, 경험적, 규범적으로 반박, 비판할 수 있어야한다. 한마디로 숙의민주주의 혹은 공론화는 상이한 관점과 입장을 가진 전문가들을 요구한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전문가의 발표내용은 정확성과 객관성, 균형성이 요구될 뿐 중립성이 요구되지는 않는다. 이번 500인 회의의 전문설계그룹은 이 점에서 결정적인 인식오류를 범했다.
12인 전문가들은 시종일관 최대한의 중립적 해설자를 자임했다. 그 결과 딜레마에 빠졌다. 중립성을 지키려니 뾰족한 얘기를 할 수 없었다. 자칫 특정한 방향이나 해법으로 끌고 가려한다는 의심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발표시간과 질의응답시간이 기본사항의 되풀이에 그치고 쟁점이나 장단점 비교가 평면적으로 밋밋하게 제시된 이유다. 학습숙의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과 함께 전문가들에게 잘못된 중립의무를 부과한 부실설계가 결과를 신뢰하기 어려울 만큼 학습숙의과정을 부실하게 만들었다.
학습숙의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전문가 발표방식을 잘못 선택했더라도 학습숙의시간이 충분하면 시민참여단 개개인이 충분하게 이해하고 집단지성을 가동하는 데 별 문제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이번 500인 회의의 학습숙의시간은 1일 8시간씩 총 16시간으로 선거제도의 다양성과 복잡성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참고로 캐나다 BC주의 2004년 선거제개편 시민의회는 주말 이틀, 하루 8시간씩 격주로 12회, 총 192시간을 학습숙의 및 권고안작성에 사용했다. 그만큼 복잡하고 중대한 사안이라 설렁설렁 해서는 민의를 오히려 왜곡할 위험이 크다고 주최 측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500인 공론화회의 16시간은 1/12밖에 안 되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주최 측이 설렁설렁 시늉만 하기로 마음먹지 않고는 16시간만 잡을 리 없다. 이렇게 16시간밖에 할애하지 못하는 이상 선거제도의 기본요소와 선택지를 넘어 학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500인 회의 설계팀이 16시간만 잡은 이유는 회의 의제와 일정에서 선거제도 선택지를 빼기로 결정했기 때문이고 그 배후에는 국회정개특위의 딜레마 회피의지가 있을 것으로 본다.
16시간은 선거제의 기본사항과 선택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도 짧은 시간이다. 전문가의 주제발표시간이 5분, 질문답변시간이 2분으로 제한된 탓에 전문가도 관련개념만 간신히 설명할 수 있었을 뿐 다양한 사례나 실태, 수치와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파워포인트를 사용하지 않고 말로만 설명하다 보니 복잡한 얘기를 하는 데 제약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쟁점들이 뚜렷하게 부각되지 못하고 논거가 추상화되었다. 질의응답과정에서도 답변이 밋밋하고 생생한 사례와 수치가 제시되지 못했다. 결국 본격적인 선거제도 선택지도 없이 기초적인 학습과 숙의만 진행하다 말았다. 500인 공론화 회의는 이처럼 학습숙의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어떤 결과가 나와도 큰 의미를 갖기는 어렵다.
부실설계 공론화 500인 회의의 조사결과가 우려된다
500인 오프라인 회의를 앞두고 17개 시도를 돌며 지역순회공청회를 열어서 예열을 가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최소한 숙의자료집을 온라인에 올려서 관심 있는 모든 시민이 댓글로 선거제개편에 관한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출할 수 있게 했어야 했다. 이러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의견이 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추첨시민대표 500명은 오프라인에서 모이고 그 100배인 5만 명은 온라인으로 결합해서 선거제개편을 갖고 학습, 토론하며 사회적 합의와 사회적 압력이 형성되도록 설계했어야 했다. 거꾸로 국회정개특위는 무슨 비밀작전 하듯이 500인 회의를 기획해서 회의개최 3일을 앞두고서야 기자회견을 하고 보도자료를 뿌리며 공론화 일정과 계획을 공개했다. 국회정개특위가 본격적인 공론화에 진심이 아니었다는 점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그래서다. 지금의 어정쩡한 시민참여형조사는 국회의 셀프입법특권 수호의지를 확인시켜줄 뿐이어서 아무런 감동과 신뢰를 줄 수 없다. 특히 중요한 것이 공론화 설계와 진행을 담당하는 전문가그룹(이번에는 서울대사회발전연구소와 12인 전문가그룹)의 높은 전문역량 및 독립성 수호의지다. 주최 측의 중립성은 그 결과로 따라오는 법이다. 설계진행기관이 중립성과 전문역량에서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공론화작업이 별다른 의미를 가지 못하고 심지어는 의뢰기관의 이익을 위해 시민을 동원했다는 비판까지 받게 돼 있다. 속사정을 알 길이 없지만 이번 500인 공론화회의를 이렇게까지 폄훼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혹시라도 국힘당이 제안했지만 국회의장이 선호하고 민주당도 마다할 이유가 없는 도농복합안의 3대 구성요소(도시중선거구, 농촌소선거구, 권역단위 병립형비례대표제)가 최종설문조사에서 각각 높은 지지를 받는 것으로 드러나면 500인 공론화회의가 자칫 도농복합안에 꽃길을 깔아주지 않을까 우려된다. 학습숙의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운데 그나마 도농복합안이 이해하기 쉽고 개혁적으로 보여서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충분한 학습시간과 치열한 숙의과정으로 시민의 집단지성이 충분히 깨어나지 않을 경우 얼마든지 가능한 결과다. 숙의민주주의와 시민공론화의 이름으로 양당제 강화방안을 꽃가마에 태워주며 시민의 이익과 기대를 배신하는 이런 참사가 없기를 희망할 뿐이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