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현의 정치 새판] 일반시민의 집단지성과 숙의에 맡겨보자
정치권은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처리 과정과 국민의힘 대표 경선 과정에 몰입하느라 국회의장이 원내정당의 정치개혁안 제출기한으로 설정한 2월 말을 정신없이 흘려보냈다. 김진표 의장이 전원위원회를 소집해서 각 당의 정치개혁안을 집중토론할 기간으로 설정한 3월 한 달도 과거사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윤 대통령의 3·1절 담화와 강제동원 피해 제3자변제 방침을 둘러싼 여야 격돌로 이미 3분의 2가 지났다. 이번에도 총선 1년 전인 금년 4월 초까지 선거제도 관련 입법을 끝내라는 선거법의 명령을 입법자가 지키지 않는 파렴치한 전통이 이어질 게 확실하다. 이쯤 되면 김진표 국회의장이 나서서 정치개혁 추진일정의 차질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고 원내대표들과 정개특위위원장을 불러 새 일정을 제시하며 독려해야 마땅하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선거 1년 앞인데 개편 가능할지 의문
선거법 개정은 게임의 룰이라 여야합의로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선거가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 선거법을 개정하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규범적으로 적절한지 몹시 의문이다. 거대양당은 이미 여러 가상시나리오를 동원해서 내년 선거의 윤곽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각 당은 협상테이블에 오른 선거제도 개혁안이 1년도 안 남은 총선에서 자당에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상당 부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사정없이 반대할 것이 틀림없다. 사실상 거대양당제 체제에서 거대양당의 하나가 반대하는 선거법안을 일방적으로 통과시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거대양당의 합의 불발은 100% 유불리 계산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어느 당도 선거제도의 유불리를 예측할 수 없도록 시행 시기를 몇 년 뒤로 늦추면 선거법 합의가 상대적으로 용이해질 것이다. 이번에 선거법을 제대로 합의개정하되 2028년 총선부터 적용하기로 합의하면 된다. 물론 이번에 위성정당 금지조항은 반드시 입법해야 한다.
실은 국회의원에게 적용될 선거구제와 기타 정치개혁 입법을 국회의원에게 맡기는 것부터가 잘못이다. 국회의원들은 선거제도 개편이나 정치개혁 방안에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일 수 없다. 무엇보다 본인의 재선 욕망이 작동한다. 논의 테이블에 오른 개정안이 본인의 재선에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따져서 불리하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로는 당리당략이 작동한다. 국회의원은 거의 모두가 정당 소속이라 개정안이 소속 정당에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계산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국민에게 좋아도 소속 정당에 불리한 제도개혁이라면 무슨 궤변을 동원해서라도 반대하게 돼 있다. 이런 사정을 김진표 국회의장이나 여야 대표가 모를 리 없다. 당연히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는 정치관계법에서 발생하는 이런 이해충돌 사실을 정직하게 국민에게 알리고 선거제도 개편 등 정치개혁안은 추첨시민의회를 구성해서 맡기는 식으로 혁신 리더십을 발휘해야 시대정신에 맞지만 감감무소식이다.
국회의원의 이익 관련된 사안 '셀프입법' 피해야
입법기관인 국회의원이 주권자와 본인을 동시 대리하는 데서 발생하는 잠재적 이해관계 충돌은 비단 선거구제 개편 사안에 한정되지 않는다. 국회의원 선수 제한, 임기 단축, 세비 감액, 보좌진 축소, 무기명투표 금지, 국민발안권 / 국민거부권/ 국민소환권 신설, 원외위원장 정치후원금 허용 등에서는 이해관계가 더 직접적이라 위와 같은 입법은 전혀 기대난망이다. 국회의원은 주권자, 정당, 대통령, 사법부, 지자체와 권한을 배분할 때 국회(의원)의 권한을 확대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애쓰게 돼 있다. 주권자 등 여타 헌법기관과 국회의원의 권한 배분은 헌법이 정하는데 현행 헌법에는 권위주의 시절의 헌법 잔재가 많이 남아 있고 비교헌법 관점에서 부족한 점이 많지만 현재로서는 헌법개정권을 국회의원들이 독점하기 때문에 국회(의원) 기득권은 개헌과정에서도 축소하기가 어렵다.
비유컨대 국회의원의 권한과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입법사안들까지 국회의원에게 맡기는 것은 생선가게를 고양이에게 맡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셀프 입법' 사안에서 국회의원은 멀리서 보면 국민대표 모자를 쓰고 있지만 가까이서 보면 본인대표 모자를 쓰고 일한다.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80~90%가 지지하는 입법안도 본인들에게 불리하면 국회의원들은 소속과 성향을 가리지 않고 집단적으로 뭉쳐서 거부하고 외면한다. 그렇다면 국회의원이나 소속 정당이 이해당사자가 될 수밖에 없는 헌법, 선거법, 정치자금법, 정당법, 국회법, 지자체법 등 정치관계법 개정작업을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국회정개특위에 맡겨온 오랜 관행은 폐기되어야 한다. 국민의 유불리와 제도의 합목적성보다 국회의원 개개인의 유불리와 소속 정당의 당리당략을 앞세우는 행태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예시한 사안들처럼 주권자와 국민의 이해충돌 성격이 뚜렷하고 대리비용이 심대한 경우에는 제도적으로 두 가지 비상탈출구를 마련해야 한다. 하나는 국민발안권이나 국민거부권을 법제화해서 대처하는 방안이다. 국민발안권이 국민이 제안한 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가결시킴으로써 국민의 뜻에 따라 입법할 수 있는 국민의 정치기본권이라면 국민거부권은 국회가 통과시키고 대통령이 공포한 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부결시킴으로써 국민의 뜻에 따라 폐기할 수 있는 국민의 정치기본권이다. 이런 직접민주주의적인 정치기본권이 신설되면 국민의 정치관계법안을 얼마든지 국민이 입법할 수 있고 국회의 셀프입법안을 얼마든지 국민이 폐기할 수 있다. 둘 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정되지 않아서 개헌을 통해서만 도입할 수 있다. 주권자의 관점에서는 이런 주권자 권한 강화 개헌이 자칫 대통령 임기와 혁신 주기만 8년으로 연장하기 쉬운 대통령 중임제 개헌보다 더 중요하다.
깨어 있는 국민 의사의 최대 근사치 도출 방안
다음으로는 추첨시민의회를 구성해서 맡기는 방안이다. 셀프입법 성격을 가진 입법사안에 대해서는 적정한 수(예컨대 유권자의 3%) 이상의 국민이 요구하거나 국회의원 3분의 1 이상이 결의하면 국회가 추첨시민의회를 의무적으로 운영해서 추첨시민의회의 정책권고안을 받아보고 최대한 존중하도록 제도화하면 된다. 추첨시민의회는 다단계 무작위추첨을 통해 인구학적으로 국민(주민)을 쏙 빼닮은 100~300인의 ‘미니 국민’을 만들어내서 국민(주민) 대표성을 확보한다. 추첨시민의원들은 국회의원과 달리 평범한 시민들이라 선거나 정당을 의식하지 않고 당파성이나 진영논리도 강하지 않다. 다양한 입장을 넘나들며 시민의 눈높이에 맞는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진단과 해법을 내놓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이유다.
대표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시민의회의 숙의성이다. 무엇보다도 시민의회에 상이한 관점과 진단, 해법을 제시하는 최고의 전문가들을 붙여서 이들이 합의하는 객관적인 학습자료를 시민의원들에게 미리 제공한다. 시민의회는 다양한 전문가들의 발표를 듣고 질의시간을 갖는 등 수십 시간의 집단학습과 숙의과정을 거친다. 전문가들이 배포할 학습자료와 발표자료, 답변자료는 정확성, 객관성, 균형성이 생명이다. 상이한 전문가들에 의한 상호검증은 물론이고 제3의 독립전문가그룹에 의한 더블체크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시민의회는 추첨시민의원들의 인지다양성과 집단지성에 기대어 사회적 합의에 가까운 정책권고안을 마련해서 국회에 제출한다.
다양한 전문가의 관점과 진단, 처방을 일반시민의 집단지성으로 녹여낸 추첨시민의회의 최종권고안은 숙의시민들을 통해 확인 가능한 깨어 있는 국민의사의 최대 근사치이자 숙의시민들이 도달 가능한 사회적 합의의 최대 근사치라고 볼 수 있다. 이만하면 시민의회 방식이 최상의 문제해결 방식은 아닐지라도 주권자의 관점에서 충분히 활성화해 봄 직한 차선의 방책은 되지 않겠는가. 정치권, 특히 민주당이 공론조사, 시민의회, 시민배심 등 미니국민에 의한 숙의적 문제해결 방식을 민주주의의 새로운 형식으로 적극 수용하여 민주당 지자체들에서 시범실시하고 신속하게 법제화할 것을 촉구한다. 직접민주주의와 숙의민주주의로 대의민주주의의 단점과 한계를 보강하는 민주주의 제도혁신 작업은 21대 촛불국회가 감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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