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때 귀족됐지만 평생 반항아로 살아

공부보다 수영이 좋은 케임브리지 대학생

사교계 단골 가십거리된 바이런의 연애사

개인 감정·욕망 솔직히 표현하는 새 시도

36년 짧은 생애에도 문학·문화 판도 바꿔

19세기 최초의 연예인이 탄생하다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 이름만 들어도 당시 영국 상류층 부인들이 부채질을 멈췄다던 그 남자. 오늘날로 치면 인스타그램 팔로워 1억 명짜리 인플루언서에 스캔들 제조기까지 겸한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그 시절엔 인스타그램 대신 시집이 있었고, 좋아요 버튼 대신 런던 사교계 부인들의 한숨이 있었을 뿐이다.

 

바이런 경의 초상화(1813년경). (위키피디아)
바이런 경의 초상화(1813년경). (위키피디아)

귀족 출신 반항아의 탄생

바이런은 1788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치광이 잭'(Mad Jack Byron, 1756~1791)이라는 별명을 가진 화려한 바람둥이였고, 어머니는 스코틀랜드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이런 집안내력을 보면 바이런이 왜 그렇게 살았는지 이해가 간다. 유전자가 이미 예고편을 보여준 셈이다.

10살 때 대백부(제일 큰아버지)가 죽으면서 바이런 경(Lord Byron)이라는 작위를 물려받았는데, 이때부터 그의 인생 시나리오가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다니면서도 공부보다는 권투, 수영, 검술에 열중했는데, 특히 수영 실력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나중에 그리스에서 독립운동을 도우러 갔을 때도 이 수영 실력이 꽤 도움이 되었다니, 인생 뭐가 어떻게 연결될지 모를 일이다.

 

바이런의 서명. (위키피디아)
바이런의 서명. (위키피디아)

하룻밤에 스타가 된 남자

1812년 바이런이 24세 때 발표한 서사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가 런던을 뒤흔들었다. 당시 출판계의 표현을 빌리면 '아침에 잠들었다가 깨어보니 유명해져 있더라'는 상황이었다. 이 작품은 젊은 귀족 해럴드가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겪는 일들을 그린 것인데, 사실상 바이런 자신의 이야기였다.

문제는 이 시가 너무나 솔직하고 파격적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영국 문학계는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작품들이 주류였는데, 바이런은 갑자기 나타나서 "인생은 권태롭고, 사랑은 허무하며, 사회는 위선으로 가득하다"고 선언했다. 마치 조용한 도서관에서 갑자기 록 콘서트를 연 격이었다.

 

바이런의 아버지, 존 '미치광이 잭' 바이런 선장의 조각품, 날짜는 알 수 없음. (위키피디아)
바이런의 아버지, 존 '미치광이 잭' 바이런 선장의 조각품, 날짜는 알 수 없음. (위키피디아)

사교계를 뒤흔든 연애사

바이런의 연애사는 당시 사교계의 단골 가십거리였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캐럴라인 램(Caroline Lamb, 1785~1828)과의 불륜은 특히 유명했는데, 램이 바이런을 두고 "위험하고 알기 어려우며 미친 사람"이라고 평했다는 일화는 오히려 바이런의 인기를 더욱 높였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독한 남자'라는 브랜딩이 성공한 셈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복누이 오거스타 리(Augusta Leigh, 1783~1851)와의 근친상간 의혹이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스캔들이었고, 이 때문에 바이런은 영국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당할 위기에 처했다. 아무리 시를 잘 써도 이건 좀 심했던 모양이다.

 

캐서린 고든, 바이런의 어머니, 토마스 스튜어드슨 r그림. (위키피디아)
캐서린 고든, 바이런의 어머니, 토마스 스튜어드슨 r그림. (위키피디아)

결혼과 이혼, 그리고 추방

1815년 바이런은 수학자이자 발명가인 애나 밀뱅크(Anna Milbanke, 1792~1860)와 결혼했다. 하지만 이 결혼은 처음부터 재앙이었다. 바이런은 결혼식 날 아침에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날이 될 것"이라고 일기에 썼다고 한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서는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정도면 결혼에 대한 의향이 얼마나 없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결국 1816년 아내가 딸 에이다(Ada Lovelace, 1815~1852, 훗날 세계 최초의 기계식 계산기 연구에 참여한 수학자가 됨)를 데리고 집을 나가면서 결혼생활이 끝났다. 이혼소송 과정에서 바이런의 각종 스캔들이 공개되면서 영국사회는 완전히 등을 돌렸다. 바이런은 1816년 4월, 영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런던에서 도버항으로 가는 길에 구경꾼들이 몰려나와 야유를 보냈다고 한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공항에서 토마토 세례를 받으며 출국하는 수준이었다.

 

바이런의 집, 노팅엄셔 사우스웰의 버게이지 매너. (위키피디아). 지난 1995년 이곳을 직접 방문했다. 김성수 시민기자
바이런의 집, 노팅엄셔 사우스웰의 버게이지 매너. (위키피디아). 지난 1995년 이곳을 직접 방문했다. 김성수 시민기자

유럽 방랑과 문학적 전성기

영국을 떠난 바이런은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를 떠돌며 오히려 더욱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쳤다. 스위스에서는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2~1822)와 메리 셸리(Mary Shelley, 1797~1851) 부부와 함께 지냈다. 이때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쓰게 된 계기도 바이런이 제안한 '무서운 이야기 쓰기 게임' 때문이었다. 바이런의 존재만으로 문학사가 바뀐 셈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돈 주앙>(Don Juan)이라는 대작을 썼다. 이 작품은 스페인의 전설적인 바람둥이 돈 주앙을 주인공으로 한 서사시인데, 바이런 특유의 해학과 풍자가 절정에 달한 작품이다. 특히 당시 영국의 위선적인 도덕관념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위선은 악덕이 덕에게 바치는 찬사'라는 식의 명언들이 가득했다.

 

바이런이 자신의 변호사이자 사업 대리인인 존 핸슨에게 보낸 친필 편지. (위키피디아)
바이런이 자신의 변호사이자 사업 대리인인 존 핸슨에게 보낸 친필 편지. (위키피디아)

그리스 독립운동과 영웅적 죽음

1823년 바이런은 그리스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그리스로 향했다. 이는 단순한 모험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스의 자유를 지지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바이런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 그리스 독립군을 지원했고, 직접 군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1824년 4월 19일 바이런은 그리스 미솔롱기에서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36세였다. 그의 죽음은 전 유럽에 충격을 주었고, 특히 그리스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추앙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에서 스캔들 덩어리로 여겨졌던 바이런이 그리스에서는 자유의 순교자가 됐다.

 

알바니아 테펠레나에 있는 바이런의 돌. (위키피디아)
알바니아 테펠레나에 있는 바이런의 돌. (위키피디아)

영국 사회에 미친 영향

바이런이 영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했다. 우선 문학적으로는 낭만주의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 이전까지 영국 문학은 대체로 교훈적이고 도덕적인 색채가 강했는데, 바이런은 개인의 감정과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새로운 문학 양식을 제시했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적 파급효과였다. 바이런의 등장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도덕관념에 균열을 불렀다. '바이로닉 영웅(Byronic Hero)'라는 개념이 생겨날 정도로, 그의 반항적이고 개성적인 캐릭터는 후대 문학과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둡고 신비로우며 기존 질서에 반항하는 주인공 유형은 바이런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바이런은 진보적 성향을 보였다. 의회에서는 러다이트 운동(기계파괴 운동)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고, 그리스 독립운동 지원도 자유주의적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는 당시 보수적인 영국 지배층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지만, 후에 영국의 자유주의 전통 형성에 기여했다.

 

리처드 웨스톨이 그린 바이런의 초상화.(위키피디아)
리처드 웨스톨이 그린 바이런의 초상화.(위키피디아)

여성해방운동의 간접적 기여자?

재미있게도 바이런은 의도치 않게 여성해방 운동에도 기여했다. 그의 딸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 1815~1852)는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 1791~1871)와 함께 기계식 계산기 연구에 참여한 수학자로, 바이런의 반항적 기질을 학문 분야에서 발휘했다. 또한 바이런과 연관된 캐럴라인 램, 클레어 클레어몬트(Claire Clairmont, 1798~1879) 등은 모두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독립적이고 진보적인 여성들이었다. 이는 바이런 자신이 여성들의 지적능력을 인정하고 평등하게 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이런의 절친, 퍼시 비시 셸리, 1819년. 초상화. (위키피디아)
바이런의 절친, 퍼시 비시 셸리, 1819년. 초상화. (위키피디아)

미디어와 대중문화의 선구자

바이런은 어떤 면에서 최초의 현대적 연예인이었다. 그의 모든 행동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그의 사생활은 대중의 호기심 거리였다. 심지어 그의 외모와 패션까지도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바이로닉 룩'이라고 해서 곱슬거리는 머리에 흰 셔츠를 목까지 단추를 풀어 헤친 스타일이 유행했을 정도다.

이는 후에 영국의 미디어 문화와 대중문화 발전에 중요한 전례가 되었다. 문학인의 사생활이 작품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뤄지는 현상, 스캔들이 오히려 인기를 높이는 역설적 상황 등은 모두 바이런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이런의 절친, 클레어 클레어몬트, 1819년 그림. (위키피디아)
바이런의 절친, 클레어 클레어몬트, 1819년 그림. (위키피디아)

시대를 앞서간 문제아의 유산

바이런은 분명 당시 기준으로는 문제투성이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의 '문제들'은 사실 기존 사회의 모순과 위선을 드러내는 거울 역할을 했다. 그가 영국 사회에서 추방당한 것은 그의 개인적 일탈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보여준 자유로운 삶의 방식이 기존 질서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바이런을 다시 보면, 그는 단순한 스캔들 메이커가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자유주의자였다. 개인의 자유, 표현의 자유, 연애의 자유를 추구했던 그의 삶은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 사회가 나아간 방향과 일치한다. 다만 그가 너무 일찍 태어났을 뿐이다.

바이런의 진짜 업적은 '개인도 사회의 틀을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그 이전까지 영국 사회는 계급과 전통에 의해 개인의 삶이 엄격히 규정되었는데, 바이런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길을 갔다. 물론 그 댓가는 혹독했지만, 그의 용기는 후대에 큰 영감을 주었다.

결국 바이런 경은 19세기 영국 사회의 '가장 성공적인 실패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회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문화적으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개인적으로는 불행했지만 역사적으로는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36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한 나라의 문학과 문화를 바꿔놓은 그야말로 '전설' 같은 존재였다.

마지막으로 바이런 자신의 말을 인용해 마무리하자면: "인생은 너무 짧아서 지루할 틈이 없다." 그의 인생이 바로 이 말의 완벽한 증명이다.

 

바이런의 절친, 메리 셸리, 1840년 그림. (위키피디아)
바이런의 절친, 메리 셸리, 1840년 그림.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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