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농장 경영하면서 노예제 폐지 주장
노예 기반 직물 사업 거두고 은행업 진출
산업혁명 시대 영국의 금융 인프라 구축
설립한 바클레이은행 여전히 중요 역할
계몽주의 벤자민 프랭클린과 깊은 교분
은행가와 해방자라는 두 얼굴
18세기 말 영국 런던 롬바드 거리를 걷던 누군가가 '바클레이'라는 간판을 보고 훗날 세계적인 은행으로 성장할 줄 알았다면, 아마도 그는 그 시대에 가장 똑똑한 투자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알았어야 할 것은 그 간판 뒤에 숨어 있던 한 남자의 기묘하고도 모순적인 인생 이야기다.
데이비드 바클레이(David Barclay, 1729~1809)는 한 손으로는 노예제 폐지를 위해 힘쓰고, 다른 손으로는 노예농장에서 나오는 이익을 세던 남자였다. 그는 양심과 자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때로는 성인의 모습을, 때로는 모순의 극치를 보여준 인물이다.
가문의 영광과 그림자
바클레이는 퀘이커교도 상인인 아버지 데이비드 바클레이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프리실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프리실라가 롬바드 거리의 은행가 존 프리임(John Freame)의 딸이었으니, 태생부터 돈과 인연이 깊었던 셈이다.
젊은 바클레이는 형 존 바클레이(John Barclay, ?~1787)와 함께 아버지의 린넨(직물) 등의 사업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이 형제들에게는 하나의 커다란 골칫거리가 있었다. 바로 그들의 사업이 노예제와 깊이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다.
신앙과 현실 사이의 딜레마
퀘이커교도로서 바클레이 형제는 노예제에 반대했다. 그들은 노예제에 반대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린넨 사업에서 손을 떼고자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그들의 사업 파트너들, 특히 베반(Bevan) 가문은 노예제와 노예 소유가 별 문제 아니라고 여겼고, 은행은 계속해서 그 사업에 자금을 지원했다.
이는 마치 금연을 다짐하면서도 담배회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바클레이는 이러한 모순 속에서 살아가야 했고, 이는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주요 갈등이 되었다.
은행가로의 변신
1766년 어머니의 오빠인 외삼촌 조제프 프리임(Joseph Freame, ?~1766)이 세상을 떠나자, 바클레이 형제는 어머니를 통해 은행의 지분을 상속받았다. 그들은 린넨 사업에서 벗어나 은행업에 전념하기로 결정했다. 1776년 은행은 '바클레이, 베반, 베닝'으로 개명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바클레이 은행의 직계 전신이다.
이 은행은 '퀘이커 지방 은행가들의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어 다리와 운하뿐만 아니라 무역 기업들에도 자금을 지원했다. 바클레이는 단순한 은행가가 아니라 산업혁명 시대 영국의 인프라 구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노예해방의 선구자인가, 위선자인가
1787년 형 존이 세상을 떠나자, 바클레이는 그가 소유하고 있던 나머지 30명의 노예를 모두 해방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이들을 자메이카에서 미국 필라델피아로 데려가 그곳에서 자유인으로 살 게 하도록 지시했다.
이것만 보면 바클레이는 시대를 앞서간 인도주의자였다. 그는 '무상해방'이라는 실험을 통해 자메이카 농장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더 나은 미래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왜 그는 애초에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을까? 그는 노예제 폐지의 열렬한 옹호자였고 카리브해 지역의 점진적인 노예제 종료를 촉구했지만, 동시에 그의 은행은 서인도제도 무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농장 담보대출에 자금을 지원했다.
벤자민 프랭클린과의 우정
바클레이가 펜실베이니아의 퀘이커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과 좋은 친구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프랭클린과의 우정은 바클레이가 단순한 영국의 보수적 은행가가 아니라, 대서양을 아우르는 계몽주의 네트워크의 일원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노예해방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영국 사회에 미친 영향
바클레이의 영국 사회에 대한 영향은 여러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오늘날 바클레이 은행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서, 이미 한 세기 앞서 금융 분야에 기반을 쌓았다. 바클레이 은행은 현재까지도 영국의 주요 금융기관으로 남아 있으니, 그의 경제사적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퀘이커교도로서 종교적 관용과 평화주의를 실천했다. 당시 영국에서 퀘이커교도들은 소수 종파였지만,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그들의 숫자에 비해 훨씬 컸다. 바클레이는 이러한 퀘이커교도의 사회적 영향력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바클레이는 1783년부터 1792년까지 노예제에 관한 노예해방 지원모임 위원회의 구성원이었다. 이는 영국의 노예제 폐지운동에서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모순의 인간, 시대의 산물
하지만 바클레이를 온전한 성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의 삶은 모순으로 가득했다. 한편으로는 노예제 폐지를 외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은행이 노예제에서 이익을 얻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이는 개인의 도덕적 한계라기보다는, 당시 자본주의 체계 전체가 노예제와 얽혀 있었던 현실을 보여준다.
마치 오늘날 환경을 걱정하면서도 플라스틱을 완전히 끊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제도의 일부로 살아가면서 동시에 그 제도를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의 교훈
데이비드 바클레이의 삶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 도덕적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과 현실적 타협 사이의 균형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둘째, 개인의 선한 의도만으로는 구조적 악을 완전히 극복하기 어렵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선한 행동을 실천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바클레이가 해방시킨 30명의 노예들에게는 그가 완벽한 성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바클레이는 자유를 선물한 은인이었다.
역사는 완벽한 영웅을 기다리지 않는다. 불완전하지만 노력하는 인간들의 작은 선행들이 모여 변화를 만들어낸다. 데이비드 바클레이는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성인도, 악인도 아닌, 자신의 시대와 씨름하며 최선을 다해 살려고 했던 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억할 만한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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