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의 사랑꾼, 집안에선 가장의 현실

18살에 8년 연상 앤과의 급작스런 결혼

세 자녀 부양 위해 런던 간 '기러기 아빠'

흑사병 유행하던 시기 11살 아들 앞세워

후기 작품에선 화해와 용서 주제로 담아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1600년경 작품)의 이 유명한 대사처럼,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에게도 평생 따라다닌 문제가 있다. 바로 '좋은 남편이 되느냐 안 되느냐, 좋은 아버지가 되느냐 안 되느냐'였다. 무대 위에서는 온갖 사랑의 찬가를 불렀지만, 정작 현실에서 셰익스피어는 어떤 남편이자 아버지였을까?

 

셰익스피어. (위키피디아)
셰익스피어. (위키피디아)

18세 총각과 26세 처녀의 급작스런 결합

1582년 11월 18세의 윌리엄은 26세의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 1556~1623)와 결혼했다. 당시로서는 꽤 파격적인 나이 차였다. 보통은 남자가 연상인데, 셰익스피어는 여덟 살 연하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결혼 6개월 만에 첫딸 수잔나(Susanna, 1583~1649)가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수학에 약한 사람을 위해 친절히 설명하자면, 이는 결혼 전 임신을 의미한다.

아, 그 시대의 '샷건 웨딩'이었나? 셰익스피어는 훗날 <좋으실 대로(As You Like It)>에서 "결혼이란 축복받은 유대이자 저주받은 족쇄"라고 썼는데, 혹시 자신의 경험담이었을까? 당시 그가 살던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Stratford-upon-Avon)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이 '로맨스'는 분명 온 동네의 화젯거리였을 것이다.

앤 해서웨이는 농부의 딸로, 셰익스피어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낮지도 않았다. 문제는 셰익스피어가 당시 별다른 직업도 재산도 없는 청년이었다는 점이다.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John Shakespeare, 1529~1601)는 한때 스트랫퍼드의 시장까지 지냈지만, 1570년대 후반부터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니 아들의 갑작스런 결혼과 출산은 가계에 또 다른 부담이었을 터이다.

 

셰익스피어 서명.(위키피디아)
셰익스피어 서명.(위키피디아)

런던행 남편, 고향에 남은 아내

결혼 2년 후인 1585년, 쌍둥이 햄넷(Hamnet, 1585~1596)과 주디스(Judith, 1585~1662)가 태어났다.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셰익스피어에게는 생계 걱정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1585년 이후 1592년까지 약 7년간 셰익스피어의 행적이 역사에서 사라진다. 학자들은 이 시기를 '잃어버린 세월(Lost Years)'이라고 부른다.

다시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곳은 런던이었다. 1592년 극작가 로버트 그린(Robert Greene, 1558~1592)이 셰익스피어를 '신흥 까마귀'라며 비난한 글에서 그의 존재가 확인된다. 즉, 셰익스피어는 아내와 세 아이를 고향에 남겨두고 홀로 런던으로 떠나 연극계에 뛰어들었다.

현대로 치면 서울에서 일하며 가족은 지방에 두고 사는 '기러기 아빠'였던 셈이다. 다만 그 시대에는 기차도 자동차도 없었으니, 주말부부는커녕 '월간부부' 또는 '계절부부'였으리라. 스트랫퍼드에서 런던까지는 말을 타고 이틀은 걸리는 거리였으니까.

앤은 세 아이를 홀로 키우며 남편의 성공을 기다려야 했다. 그녀에게 셰익스피어는 어떤 존재였을까? <한여름 밤의 꿈>에서 "사랑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고 한탄한 것도 혹시 자신의 심경고백이었을까?

 

셰익스피어의 탄생지로 여겨지는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의 존 셰익스피어의 집.(위키피디아)
셰익스피어의 탄생지로 여겨지는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의 존 셰익스피어의 집.(위키피디아)

성공한 예술가, 소원해진 가족

런던에서 셰익스피어는 점차 성공가도를 달렸다. 배우로 시작해서 극작가로, 나아가 극장 지분까지 소유한 사업가로 성장했다. 1596년에는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의 명의로 문장(紋章) 사용권을 획득하여 '신사' 계급에 올랐다. 이제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생겼지만, 가족과의 거리는 여전했다.

그런데 바로 그 해인 1596년, 셰익스피어에게 인생 최대의 비극이 찾아왔다. 11세의 아들 햄넷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사인은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흑사병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런던에서 성공을 쌓아가던 아버지는 아들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흥미롭게도 그 4년 후인 1600년경 <햄릿>이 무대에 올랐다. 햄넷과 햄릿, 우연의 일치일까? 당시에는 같은 이름의 다른 철자였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이 덴마크 왕자의 복수극으로 승화되었다면, 이보다 더 극적인 예술적 전환이 또 있을까? "산다는 것, 그 자체가 고통"이라던 햄릿의 독백에서 한 아버지의 깊은 상처를 엿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문장으로 '코트와 크림의 책'(1602)에 나온다. 프로프투아리움 아르모룸. 가문 이름에 말장난으로 창이 등장한다. (위키피디아)
셰익스피어의 문장으로 '코트와 크림의 책'(1602)에 나온다. 프로프투아리움 아르모룸. 가문 이름에 말장난으로 창이 등장한다. (위키피디아)

딸들과의 각별한 관계

아들을 잃은 후 셰익스피어는 두 딸에게 더욱 애착을 보인 것 같다. 특히 큰딸 수잔나는 똑똑하고 의지가 강한 여성으로 성장했다. 1607년 의사 존 홀(John Hall, 1575~1635)과 결혼하여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셰익스피어는 만년에 런던과 스트랫퍼드를 오가며 점차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수잔나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소중히 여겼다.

반면 둘째딸 주디스는 아버지의 속을 꽤나 태운 것 같다. 1616년 2월 31세의 나이에 토마스 퀴니(Thomas Quiney, 1589~1655)와 결혼했는데, 남편이 혼전 임신시킨 다른 여성 문제로 교회 재판을 받는 처지였다. 셰익스피어는 이 일로 유언장을 수정하기까지 했다.

<리어왕>에서 늙은 왕이 딸들에게 배신당하는 이야기를 쓴 셰익스피어. 혹시 자신의 가족사에서 영감을 얻은 것은 아닐까? 다만 리어왕과 달리 셰익스피어의 딸들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것 같다.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 있는 셰익스피어의 장례 기념물. (위키피디아)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 있는 셰익스피어의 장례 기념물. (위키피디아)

유언장에 드러난 '현실적' 남편

1616년 3월 임종을 앞둔 셰익스피어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런데 아내 앤에게 남긴 유산이라곤 '두 번째로 좋은 침대'가 전부였다. 가장 좋은 침대는 손님용이니 그나마 부부가 함께 쓰던 침대를 물려준 셈이지만, 낭만적이지는 않다.

반면 두 딸에게는 상당한 재산을 물려주었다. 특히 큰딸 수잔나는 대부분의 재산을 상속받았고, 작은딸 주디스에게는 혼수 성격의 재산과 조건부 상속을 남겼다. 혹자는 이를 두고 "셰익스피어는 딸바보 였다"고 말하지만, 당시 관습상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자동으로 재산의 3분의 1을 상속받았으니 굳이 유언장에 명시할 필요가 없었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좋은 침대'라는 표현은 여러 추측을 낳는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부부간의 애정을 상징한다고 보고, 어떤 학자들은 냉담함의 표현이라고 본다. 결혼 생활 34년, 그 중 상당 기간을 떨어져 산 부부의 마지막 인사치고는 묘하게 건조하다.

 

셰익스피어가 세례를 받고 묻힌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의 홀리 트리니티 교회.(위키피디아)
셰익스피어가 세례를 받고 묻힌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의 홀리 트리니티 교회.(위키피디아)

무대 위의 가정사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보면 가족 관계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돋보인다. <리어왕>의 부녀 갈등, <로미오와 줄리엣>의 세대 갈등, <오셀로>의 부부 갈등, <템페스트>의 부녀 애정 등등. 혹시 이 모든 것이 런던과 스트랫퍼드를 오가며 겪은 자신의 가정사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닐까?

특히 그의 후기 작품들에서는 화해와 용서의 주제가 두드러진다. <겨울이야기>에서 16년간 떨어져 지낸 부부가 재회하는 장면, <템페스트>에서 아버지가 딸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모습 등은 만년의 셰익스피어가 가족에 대해 느꼈던 복잡한 감정을 반영하는 듯하다.

 

셰익스피어의 무덤은 그의 아내 앤 셰익스피어와 그의 손녀의 남편 토마스 내시의 무덤 옆에 있다.(위키피디아)
셰익스피어의 무덤은 그의 아내 앤 셰익스피어와 손녀의 남편 토마스 내시의 무덤 옆에 있다. (위키피디아)

당대의 가부장, 영원한 예술가

17세기 초 상당수 남성들이 그랬듯, 셰익스피어도 전형적인 가부장이었다. 아내는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남편은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역할분담. 하지만 그가 특별한 것은 그 역할을 예술가로서 탁월하게 수행했다는 점이다.

런던에서의 성공은 단순히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가족의 사회적 지위 향상으로 이어졌다. 수잔나가 의사와 결혼한 것도, 주디스가 문제가 있는 남편과 결혼했음에도 사회적으로 매장당하지 않음 것도 모두 아버지의 명성 덕분이었다.

 

19세기 무명 미술가가 그린 셰익스피어 희곡의 등장인물 행렬.(위키피디아)
19세기 무명 미술가가 그린 셰익스피어 희곡의 등장인물 행렬. (위키피디아)

불완전한 인간, 완벽한 예술가

셰익스피어는 성인이 아니었다. 때론 책임감 있는 가장이었고, 때론 예술에 빠진 한량이었다. 아내와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더 많은 남편이었고, 아들의 죽음을 평생 안고 산 아버지였다. 현대의 기준으로 본다면 '워킹맘'의 고충을 아내에게 떠넘긴 이기적인 남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이 인간적인 따뜻함을 자아낸다. 완벽한 가정인이었다면 과연 그토록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작품들을 쓸 수 있었을까? 가족과의 갈등과 화해, 사랑과 이별의 경험이 없었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의 순수한 사랑도, <오셀로>의 파괴적인 질투도, <리어왕>의 쓰라린 배신도 그토록 생생하게 그려낼 수 없었으리라.

결국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한 인간의 삶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연극이었던 셈이다. 1막은 갑작스런 결혼과 출산, 2막은 런던에서의 성공과 아들의 죽음, 3막은 명성과 부의 축적, 그리고 4막은 고향으로의 귀환과 가족과의 화해, 마지막 5막은 죽음과 불멸의 예술적 유산이다.

그리고 4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그 연극의 객석에 앉아 박수를 보내고 있다. <맥베스>에서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서 시끄럽게 떠들다가 사라지는 불쌍한 배우.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 같아서 소음과 분노로 가득하지만 아무 의미도 없다"고 썼던 그이지만, 셰익스피어의 인생만큼은 충분히 의미 있었다. 불완전한 남편이자 아버지였지만, 그래서 더욱 완벽한 인간이었으니까.

 

햄릿, 호레이쇼, 마셀러스, 그리고 햄릿 아버지의 유령. 화가 헨리 퓨젤리가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햄릿, 호레이쇼, 마셀러스, 그리고 햄릿 아버지의 유령. 화가 헨리 퓨젤리가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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