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 부정하며 정부의 역할 강조
대표작 <일반 이론>으로 대공황 극복에 기여
설명 못 한 스태그플레이션, 대처리즘의 역공
2008년 금융위기 터지자 부활한 케인스주의
"정부, 경제 적극 개입해 국민복지 책임져야"
1883년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나 1946년 세상을 떠난 존 메이너드 케인스. 이름만 들어도 경제학 교수들이 흥분하고, 정치인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일반인들은 "아, 그 어려운 경제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그 사람이다.
케인스를 한 줄로 말하면 "시장이 알아서 척척 잘한다고? 웃기지 마라!"고 외친 경제학자다. 당시 주류 경제학자들이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아담 스미스(1723~1790)의 명언을 앵무새처럼 되뇌일 때, 케인스는 "그 손이 실업자들 밥그릇은 언제 챙겨주나?"고 직격탄을 날렸다.
1929년, 세상이 무너지다
1929년 대공황이 터졌을 때, 기존 경제학자들은 "시장이 스스로 회복할 테니 기다리자"며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마치 집에 불이 났는데 "자연스럽게 꺼질 테니 기다려보자"고 하는 격이다.
케인스는 이런 상황을 보며 속이 터졌다. 1936년 그의 대표작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 이론〉을 내놓으며 "정부가 나서서 돈을 써라! 일자리를 만들어라! 가만히 앉아서 시장의 기적을 기다리지 말고!"라고 외쳤다.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영국 정부를 흔든 케인스의 처방전
케인스의 아이디어는 단순 명쾌했다. 경기가 침체되면 정부가 돈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승수 효과(multiplier effect)'라는 그럴듯한 이름도 붙여줬다. 정부가 1파운드를 쓰면 경제 전체에는 그보다 훨씬 큰 효과가 난다는 논리였다. 마치 연못에 돌멩이 하나 던지면 파문이 온 연못으로 퍼지는 것처럼 말이다.
영국 정부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제2차 대전(1939~1945) 중 전쟁 경제를 운영하면서 케인스의 이론을 실전에서 검증해 볼 기회를 얻었다. 정부 지출이 대폭 늘어나자 실업률이 뚝 떨어지고 경제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어? 이 양반 말이 맞네?"
브레턴 우즈 회의, 케인스 vs 미국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케인스는 영국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했다. 그는 '방코'라는 국제 통화 체계를 제안했는데, 쉽게 말해 세계 각국이 공통으로 쓸 수 있는 돈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다. 상당히 진보적인 발상이다.
하지만 미국 대표 해리 덱스터 화이트(1892~1948)는 "아니다, 달러를 기축 통화로 쓰자"고 맞받아쳤다. 결과는? 미국의 승리. 케인스는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쟁에서 이긴 나라가 경제에서도 주도권을 잡는 법이니까.
케인스주의의 황금기와 몰락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그야말로 케인스주의의 전성기였다. 영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케인스 처방전을 따랐다. 정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하고, 복지국가를 건설하고, 완전고용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1970년대 석유파동이 터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물가는 치솟는데 경제는 침체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났다. 케인스 이론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현상이었다. '물가와 실업률은 반대로 움직인다'는 케인스의 가설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대처의 역공, "국가는 없다"
1979년 집권한 마거릿 대처(1925~2013)는 케인스주의에 정면으로 맞섰다. "사회라는 것은 없다. 개인과 가족만 있을 뿐"이라는 그녀의 발언은 케인스가 지하에서 벌떡 일어나게 만들 정도였다. 대처는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였다.
케인스주의자들은 "이게 무슨 역사의 퇴행이냐"며 반발했지만, 대처의 개혁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영국 경제가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사회적 불평등이 심해지고 전통적인 산업지역이 몰락하는 부작용도 따랐지만.
2008년 금융위기, 케인스의 부활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지자 세계 각국은 다시 케인스를 찾기 시작했다. "시장이 알아서 한다"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쥐구멍에 숨고 싶어 했다. 영국의 고든 브라운(1951~) 총리를 비롯한 각국 정상들은 앞 다투어 경기부양책을 내놨다.
'죽은 케인스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자유주의의 본고장이던 미국과 영국이 가장 적극적으로 정부 개입에 나섰다. 케인스가 살아있었다면 "이제야 정신을 차렸군"이라며 흐뭇해 했을 법하다.
영국 사회에 남긴 케인스의 유산
케인스가 영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경제 정책을 넘어선다. 그는 정부의 역할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바꿔놓았다. '정부는 최소한의 역할만 해야 한다'던 19세기적 사고에서 '정부는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해 국민의 복지를 책임져야 한다'는 20세기적 사고로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영국의 국민건강서비스(NHS), 복지국가체계, 완전고용정책 등은 모두 케인스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비록 대처 시대를 거치며 많이 축소되긴 했지만, 여전히 영국 사회의 기본 틀을 이루고 있다.
케인스, 그는 누구였나
케인스는 단순히 경제학자가 아니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엘리트이자, 블룸즈버리 그룹(Bloomsbury Group)의 일원으로 예술과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버지니아 울프(1882~1941), 리튼 스트레이치(1880-1932) 같은 당대 지식인들과 어울리며 토론을 즐겼다.
블룸즈버리 그룹이란 1900년대 초부터 1930년대까지 런던의 블룸즈버리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모인 작가, 예술가, 철학자, 경제학자들의 비공식 모임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서 만들어졌다.
케인스는 투자가로서도 상당한 수완을 발휘해, 킹스 칼리지의 재정을 크게 늘려놓기도 했다. 이론만 아는 상아탑 학자가 아니라 실무에도 능통한 '실전형 경제학자'였던 셈이다.
오늘날의 케인스
지금도 경제위기가 터질 때마다 케인스는 소환된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도 각국 정부가 케인스식 처방전을 꺼내들었다. "돈을 풀어라, 일자리를 지켜라, 소비를 늘려라."
하지만 케인스의 이론도 만능이 아니다. 정부 부채 문제, 인플레이션 우려, 경제구조의 변화 등 새로운 과제들이 등장했다. 케인스가 살아있다면 "내 이론을 교조적으로 따르지 말고 상황에 맞게 응용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 너무 먼 미래만 생각하지 말고 지금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라는 뜻이었다. 이 말 한 마디가 케인스 경제학의 핵심을 보여준다.
케인스는 경제학을 상아탑에서 현실로 끌어내린 사람이다. 복잡한 수식과 이론 뒤에 숨어있던 경제학을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는 정책 언어로 번역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정치인들이 "케인스가 이랬다, 저랬다" 하며 자신의 정책을 정당화하려 든다.
물론 케인스도 완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경제학이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학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자리와 생계에 직결된 실용적인 도구라는 점을 보여줬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한 유산이 아닐까.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되돌아보게 되는 케인스. 그는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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