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언어로 쓰는 문학…대중문화 출발
"시, 귀족의 전유물 아니다"…시의 민주화
자연 애호가로 오늘날 환경운동의 원조격
'낭만주의 아버지' 칭송, 너무 보수적 비판도
호수 지방의 은둔 시인, 세상을 뒤흔들다
윌리엄 워즈워드(1770~1850). 이름부터 '말의 가치'라는 뜻이니, 태어날 때부터 문학을 하라고 신이 점지해 준 이름 아닌가. 80년 생애에서 무려 50년을 영국 북부 호수지방(Lake District)에서 보낸 이 남자는, 도시를 등지고 자연 속에 파묻혀 살면서도 영국 사회 전체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기이한 인물이다.
그가 살던 시대를 보자. 증기기관차가 쿵쿵거리며 달리고, 공장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가리던 산업혁명 한복판이었다. 사람들은 돈에 환장해서 자연을 마구 파헤치고, 시골사람들은 도시로 내몰려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이때 워즈워드는 "잠깐, 우리가 뭔가 중요한 걸 잃어버리고 있는 거 아닌가?"라며 제동을 걸었다.
평범한 말로 비범한 감동을, 민주주의 시학의 탄생
워즈워드가 진짜 혁신적이었던 건 시 쓰는 방법이다. 당시 시인들은 '오, 찬란한 아폴론이여!' 같은 거창한 말로 점잔빼며 시를 썼는데, 워즈워드는 '길에서 만난 할머니가 하는 말'을 시로 만들었다. 귀족들이 "이게 무슨 시야!"라며 코웃음 쳤지만, 일반 민중들은 열광했다. 처음으로 자신들의 언어로 쓰인 시를 만난 때문이다.
그의 대표작 <수선화(Daffodils)>를 보라. '구름처럼 외롭게 떠다니다가 / 황금빛 수선화 무리를 보았네'라는 단순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시는, 복잡한 수사법 없이도 깊은 감동을 준다. 이게 바로 시의 민주화다. 시는 더 이상 학자나 귀족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읽고 느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자연보호의 원조, 환경운동가의 아버지
워즈워드가 요즘 살았다면 분명 환경단체에서 활동했을 법하다. 철도회사가 호수지방에 철길을 놓으려 하자 그는 격렬히 반대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돈으로 바꿀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생각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개발이 곧 발전'이라고 여기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그의 영향으로 호수지방은 영국 최초의 국립공원이 되었고,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관광사업의 성지가 된 셈이다. 워즈워드가 이걸 알았다면 "내가 자연을 지키려다가 자연을 망쳤구나!"라며 혀를 찼을지도 모른다.
사회개혁가의 숨겨진 면모
젊은 시절 워즈워드는 꽤나 급진적인 사상가였다. 프랑스 혁명(1789~1799)을 열렬히 지지했고, 당시 혁명가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물론 나중에 나폴레옹(1769~1821)이 황제가 되면서 "역시 혁명도 결국 권력놀음이구나"라며 실망했지만 말이다.
그는 평생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어린이와 가난한 사람들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주장이다. 귀족들은 "평민들이 글을 배우면 반란을 일으킨다"며 교육을 반대했다.
동료들과의 명콤비, 낭만주의 드림팀
워즈워드는 혼자 활동한 게 아니었다. 절친한 친구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1772~1834)와 함께 <서정 가요집>(1798)을 출간하며 낭만주의 운동의 포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성격이 정반대였다. 워즈워드는 규칙적이고 성실한 타입, 콜리지는 천재적이지만 아편에 중독된 방탕한 타입. 그런데 이 조합이 기가 막히게 잘 맞았다.
나중에는 젊은 시인 바이런(1788~1824), 셸리(1792~1822), 키츠(1795~1821) 등이 등장해서 낭만주의 2세대를 형성했다. 이들은 워즈워드를 '낭만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렀지만, 동시에 '너무 보수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혁명가였던 워즈워드가 나이 들면서 보수화된 것을 꼬집은 것이다.
계관시인이 된 혁명가의 아이러니
1843년 워즈워드는 영국의 계관시인이 되었다. 젊은 시절 기존체제에 반항했던 혁명가가 결국 체제의 최고자리에 오른 셈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변절'이라고 했고, 어떤 이는 '성숙'이라고 했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혁명도 해봤고, 보수도 해봤으니 이제 중도가 최고야"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워즈워드가 남긴 유산, 오늘까지 이어지는 영향
워즈워드의 영향은 문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가 시작한 '자연회귀' 운동은 현대의 환경보호운동으로 이어졌고, '평범한 언어로 쓰는 문학'은 대중문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개인의 감정과 경험'을 중시하는 개인주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전까지 문학은 주로 영웅이나 신화, 역사적 사건을 다뤘는데, 워즈워드는 '내 마음속의 작은 감동'도 충분히 문학이 될 수 있다고 증명했다. 요즘 누구나 자신의 일상을 SNS에 올리는 것도, 따지고 보면 워즈워드가 시작한 '개인경험의 문학화' 전통의 연장선이다.
호수를 사랑한 남자가 세상을 바꾸다
윌리엄 워즈워드. 평생 시골에서 산 이 남자가 영국사회에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문학의 민주화, 자연보호운동, 개인주의 문화의 확산... 이 모든 것이 '수선화를 보고 감동받은 한 남자'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그도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의 급진성을 나이 들어 포기한 것도, 자연을 사랑한다면서 결국 관광지로 만든 것도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인간적이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며 감동받고,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SNS에 올리고, 환경 보호를 외칠 때, 그 뿌리에는 200년 전 호수지방에서 수선화를 바라보며 시를 쓴 한 남자가 있다.
워즈워드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무엇일까? 아마도 '평범한 것에서 비범함을 발견하는 눈'이 아닐까. 그리고 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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