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생애 내내 총칼 난무해도 "평화" 외쳐
평범한 교사 신분으로 역사적 순간마다 조력
인도·파키스탄의 평화로운 독립 과정에 기여
새처럼 갈등 경계 자유롭게 비행한 조류학자
호레이스 알렉산더(Horace Alexander, 1889~1989)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아마 대부분은 "누구?" 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하지만 평범해 보이는 영국인 교사인 그는 20세기 역사의 가장 극적인 순간들을 뒤에서 조용히 움직인 숨은 조력자였다. 마치 새들의 이동경로를 연구하던 조류학자답게, 그는 대영제국이라는 거대한 새가 어떻게 날개를 접고 인도대륙에서 떠나갈지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도왔다.
전쟁을 거부한 평화주의자의 탄생
1889년 영국 크로이돈에서 태어난 알렉산더는 뼛속까지 퀘이커교도였다. 영국 퀘이커교도 가문 출신으로 1912년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한 후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는 다른 젊은이들처럼 총을 들고 참호로 달려가는 대신 양심적 병역거부자로서 반전위원회 비서를 맡았다.
당시 영국에서 "비겁자"라고 손가락질 받기 십상이었던 선택이지만, 알렉산더에게는 신념의 문제였다. 전쟁터에서 죽고 죽이는 것보다는 평화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용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겠다'는 구약성서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려는 자세다.
우드브룩에서 시작된 국제정치학의 새 장
1919년 버밍엄의 우드브룩 퀘이커 연구소에 임용된 알렉산더는 영국 최초의 국제관계학과를 개설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일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어떻게 하면 나라들이 서로 싸우지 않을까?'를 학문으로 연구하겠다고 나선 것이니 말이다.
그는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에 큰 희망을 걸었다. 물론 우리는 이후 역사를 통해 국제연맹이 얼마나 무력했는지 알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대화로 해결하자'는 발상 자체가 획기적이었다. 마치 동네 꼬마들이 주먹다짐 대신 가위바위보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합의하는 모습이다.
간디와의 만남, 동양의 성자와 서양의 평화주의자
1928년 알렉산더의 인생을 바꾼 만남이 있었다. 처음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1869~1948)와의 만남이다. 한쪽은 영국의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백인 교육자, 다른 쪽은 인도의 독립을 위해 비폭력 투쟁을 벌이는 갈색 피부의 성자. 겉보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었지만, 평화에 대한 신념만큼은 완전히 통했다.
1930년 간디가 소금 행진(Salt March)으로 영국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을 때, 알렉산더는 간디와 인도 총독 어윈 경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당시 상황을 상상해보자. 간디는 "우리가 만든 소금에 세금을 내라니, 말도 안 된다!"며 항의했고, 영국 관리들은 "법은 법이다!"라고 버텼다. 그 사이에서 알렉산더는 마치 부부싸움을 중재하는 현명한 이웃처럼 양쪽을 달래며 대화의 물꼬를 텄다.
제국의 평화로운 해체를 도운 조용한 혁명가
알렉산더는 아가사 해리슨과 함께 영국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정부로의 평화로운 권력 이양에 크게 기여했다. 이는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300년 넘게 인도를 지배해온 대영제국이 그냥 "안녕히 계세요" 하며 떠날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렉산더 같은 사람들의 끈질긴 중재 덕분에, 영국은 다른 유럽 열강들처럼 피비린내 나는 독립전쟁을 겪지 않고도 인도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물론 1947년 분할독립 과정에서 수많은 비극이 일어났지만, 그나마 더 큰 재앙을 막는 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마치 거대한 집을 허물 때, 폭파로 한 번에 무너뜨리는 대신 벽돌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분해하는 것과 같았다. 시간은 오래 걸리고 번거롭지만,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는 현명한 방법이었다.
새를 사랑한 평화주의자의 역설
흥미롭게도 알렉산더는 조류학자이기도 했다. 새를 관찰하고 연구하는 일과 평화운동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싶지만, 사실 둘 다 자유와 경계를 넘나드는 것에 대한 관심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새들은 국경이 무의미하듯, 그의 평화주의 역시 민족과 종교의 경계를 뛰어넘었다.
그의 형제들인 윌프레드 백하우스 알렉산더(Wilfred Backhouse Alexander)와 크리스토퍼 제임스 알렉산더(Christopher James Alexander) 역시 조류학자였다. 이 집안은 아예 새에 푹 빠진 가족이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새들의 자유로운 비행을 보며 인간도 증오와 갈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100세까지 산 평화의 전도사
알렉산더는 1989년 100세를 맞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생을 마감한 그의 인생은 그 자체로 국경을 넘나드는 평화주의를 상징했다. 100년 동안 두 차례의 세계대전, 냉전, 탈식민지화, 핵무기 등장 등 인류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시대를 살아내며, 그는 줄곧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싸우지 말고 대화하자."
그의 삶을 돌아보면, 때로는 너무 순진해 보이기도 한다. 총칼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평화, 평화" 하고 외치는 모습이 마치 태풍 속에서 양산을 든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진함'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졌고, 제국의 해체가 좀 더 인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영국 사회가 얻은 교훈, 제국은 가도 품위는 남는다
알렉산더 같은 인물이 영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은근하지만 깊다. 그는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에서 '그냥 유럽의 한 섬나라'로 격하되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품위는 지킬 수 있도록 도왔다.
다른 제국들을 보라. 프랑스는 알제리에서,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서, 포르투갈은 앙골라에서 얼마나 추하게 발버둥 쳤는가. 하지만 영국은 적어도 인도에서만큼은 비교적 체면을 차리며 물러났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알렉산더 같은 중재자들 덕분에 최악은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영국 사회에 '강력함보다는 현명함이, 지배보다는 대화가 더 지속 가능하다'는 교훈을 남겼다. 오늘날 영국이 여전히 외교와 중재에서 한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바로 이런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조용한 영웅들의 가치
호레이스 알렉산더는 화려한 정치인도, 유명한 장군도, 부유한 사업가도 아니었다. 그저 신념을 지키며 평생을 산 평범한(?) 교사였을 뿐이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들에서 그는 늘 그곳에 있었다. 마치 무대 뒤에서 조명을 조절하는 이름 없는 직원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없으면 안 되는 존재였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 역시 갈등과 대립으로 가득하다. 이념갈등, 종교갈등, 민족갈등... 뉴스만 틀면 어디선가는 누군가가 싸우고 있다. 그런 때일수록 알렉산더 같은 사람들의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한다.
그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갈등을 키우는 사람인가, 아니면 평화를 만드는 사람인가?" 답은 뻔하지만, 실천은 쉽지 않다. 하지만 100년을 살며 평화의 씨앗을 뿌린 한 영국인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듯,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끈기 있게 노력하면 언젠가는 열매를 맺는 법이다.
새들이 국경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것처럼, 평화도 언젠가는 모든 경계를 넘어 세상을 덮을 수 있다. 그 꿈을 품고 살다 간 호레이스 알렉산더를 기억하며,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평화를 만들어 가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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