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만, 어로만 하는 마을 아니라 연계한 산업으로

전후좌우 넓혀 함께 먹고살게 되면 그게 대동세상

 

어업과 농업을 병행하는 전형적인 반농반어촌 율티마을의 ‘우해이어보체험텃밭’
어업과 농업을 병행하는 전형적인 반농반어촌 율티마을의 ‘우해이어보체험텃밭’

해수부의 어촌 신활력증진 사업이 한창인 율티마을은 창원시 서남단인 마산합포구  진전면에 속한 작은 어촌 마을이다. 창원시 서남단에 펼쳐진 창포만 해안 생태습지의 거점 지역이라는 가치를 지녔다. 율티마을 북쪽으로 국도 77호선이 지나고 있어 창원시뿐만 아니라, 진주시, 고성군, 통영시, 거제시, 김해시 등 경남권에서 접근성이 좋은 입지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어항의 기능이 상실되고 물고기, 조개 등 어패류 자원도 고갈되는 등 전통적인 어업은 이미 쇠락기에 접어들었다. 바닷가 어촌마을이라 근본적으로 농지가 적어 농업도 어업의 대체산업으로 적합지 않다.

결국 율티마을 마을공동체사업의 최대 현안은 ‘먹고 사는 문제’와 ‘일자리 문제’의 해결, 즉' 어업의 대체산업은 과연 무엇인가?'로 귀결된다. 단순히 1차산업으로서 어업이 아니라, 어업과 관련된 2차, 3차산업을 아우르는 ‘어업 전후방 연관 산업’에서 해법과 활로를 자꾸 모색하게 된다. 가령 앞으로는 조개나 물고기가 아닌 ‘문화’로 먹고 살 수는 없을까 하는 그런 혁신적인, 실제적인 고민말이다.

 

어업의 거점기지로서 ‘물고기를 잡아 돌아오는 어항’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율티항
어업의 거점기지로서 ‘물고기를 잡아 돌아오는 어항’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율티항

다행히 율티마을이 위치한 마산합포구 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체험, 관광을 선호한다는실증적인 통계자료가 있다. 구체적으로 해양, 어촌, 생태 테마의 휴식 휴양, 힐링(치유), 레포츠, 아웃도어 캠핑, 트레킹, 낚시 등에 관심도가 높다.

마산합포구의 거점지역인 창포만의 어촌마을인 율티마을은 ‘호수 같은 바다’, ‘달과 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어촌’으로서 특별한 경관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 최초의 물고기도감의 발현지’ 라는 독보적인 역사문화 스토리텔링 자산도 자랑거리다.

그렇다면 마산합포구 관내는 물론 창원시 전역을 통틀어서도 이 정도의 마을은 없지 않을까. 가히 어촌체험·휴양마을 사업지로서 이만큼 최적의 환경, 차별화된 고유사업기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마을이 있을까.

 

기후변화 등의 영향으로 율티마을 갯벌에도 조개가 잘 보이지 않는다.
기후변화 등의 영향으로 율티마을 갯벌에도 조개가 잘 보이지 않는다.

어업경제는 쇠락하고 어촌사회는 소멸하지만

오늘날 율티마을이나 창포만 지역만이 아니라, 어업경제는 쇠락하고 어촌사회는 소멸하는 위기상황이다. 어촌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인한 어촌사회 활력 감소, 어족자원 감소 등으로 어업 경제의 활력 및 동력 저하는 이미 충분히 예견된 결과다.

국가나 정부의 조치나 처분만 기다릴 게 아니라고 생각한 율티마을은 자구적이고 자생적인 노력으로 어촌마을 공동체 사업을 선택한 것이다. 주력사업으로 집중하고 있는 ‘어촌체험·휴양마을사업’의 소득사업화 가능성은 충분하다. 율티마을은 경남 중부 해안권역 최대 규모의 갯벌인 창포만을 보유하고 있다. 또 탄소중립 실천 마을로 지정되어 갯벌과 탄소중립 홍보관을 활용한 프로그램을 이미 운영하고 있다.

이른바 ‘마을공유가게 직판사업’의 소득 사업화도 타당성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도감이자 천주교 성지순례 주요 테마로서, 대표적 사업 자산인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가. 이를 테마로 한 역사·문화 콘텐츠, 상품(굿즈), 프로그램, 서비스 등을 연계히면 된다. 이제 율티마을 어민들은 조개나 물고기를 잡아 먹고 사는 수산업이 아닌 ‘문화산업'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기대감을 품기 시작했다.

나아가 율티마을의 어민 또는 주민들과 도시민, 지역주민, 귀어인 등 관계(생활) 인구(Liquid Politan)들과 생태 관광·어촌 체험·도농(어) 교류·도농(어) 직거래 등을 통한 중장기 지역경제 선순환 생태계(Ecosystem)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율티마을에서 2km 지척에 자리잡은 천주교 마산교구청 관할 성당의 신자 18만여 명, 우해이어보 저자 김려 선생의 후손인 연안 金씨 대종회 12만여 명을 잠재적인 교류 및 거래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어민들과 주민들의 의지와 열망을 모은 사업책임주체로서 마을협동조합을 중심(Center & Hub)으로 지속 발전가능 소득사업 책임경영 플랫폼(Platform)이 가동될 준비도 단단히 하고 있다.

'천하지대본'이던 농업, 자본주의로 인해 '농산업'으로

일반적으로 전국에 산재한 농산어촌을 먹여살리는 산업의 기본은 농업이다. 물론 어촌마을을 주로 먹여살리는 산업은 어업일테지만, 어촌조차 대걔 식량곡물을 생산하는 농업을 병행한다. 농업(agriculture)이야말로 인류의 생존을 책임지는 기본 토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식량 및 식료품을 생산하는 농업을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대접한다. 예로부터 농업은 천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근본이라는 뜻으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일컫지 않던가.

인류를 먹여살리는 농업의 역사는 유구하다. 인류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석기 시대(1만~1만 3000년 전)부터 인류는 작물을 경작하고 가축을 사육하기 시작했다. 정착농업의 발생은 대개 BC 6000여 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동양에서는 농작물 재배를 중심으로 하는 집약적 경종농업으로, 서양은 양축농업(養畜農業) 중심 이동농업에서 정착농업으로 전개되었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자연조건에 절대적으로 좌우되던 농사 일은 인간의 힘에 의해 동식물을 합리적으로 재배·사육하는 본격적 농업의 단계로 올라섰다. 마침내 근대에 이르러 과학기술이 농업에 도입돼, 생산력과 경제규모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오늘날의 ’농산업‘이라 부르는 산업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렇게 농업이 본격적으로 농산업의 경지까지 비약적으로 발달한 배경과 계기는 자본주의 때문이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는 마을에 사는 대부분의 마을주민들은 농사를 지어서 먹고사는 농민이었다. 국가 경제란 곧 자급자족형 농민경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식량은 물론이고 마을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일반적인 생활필수품도 거의 농민 스스로 만들어 썼다.

자본주의가 생성 발전하고 공장제 공업, 도시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비농업인구의 증대로 식량의 수요도 증대했다. 아울러 공업이 발전하면서 공업의 원료가 되는 농산물의 수요(면화·양모·식료품 등)도 폭증했다. 이로써 이전의 자급자족형 농업에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판매, 자본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상품생산 농업으로 크게 변화했다. 농업기술도 발달하고 농업생산력도 높아졌다. 이는 곧 농민층의 분해 또는 양극화로 직결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농민들은 양극화하기 시작했다. 상품생산 농업을 주도하는 부유한 농민층으로서 ‘농업 자본가’와 토지와 생산수단을 잃은 빈곤한 농민층 ‘농업 노동자’로. 농민이 양극화하면서 마을공동체의 질서가 깨지고 토대가 무너지기 시작한 건 물론이다. 이제 농촌마을은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생활공동체 터전이 아니라, 도시민의 식량과, 공장의 원료를 조달하는 농산업의 생산기지로 전락했다. 세계적 단위 및 차원에서도 양극화는 심화 확산됐다. 생산과잉으로 고민하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 식량부족으로 신음하는 후진개발도상국으로.

 

유휴어업시설(위판장)을 극장식레스토랑 '해녀의 부엌'으로 재생, 문화산업으로 먹고사는 제주 종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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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농업, 저임금·저농산물가격 정책의 희생양

마을을 먹여살리는 우리 농업 현실의 변화는 8·15해방 직후부터 예고되었다. 미국 등 세계시장에 의존하는 대외의존적 경제구조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이후 우리나라를 농산물시장으로 취급하는 미국의 압력과 국내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농업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다. 게다가 우리의 농업은 공업의 자본 및 원료 공급원이나 국내 시장으로서 기능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노동력 공급원과 부분적인 식량 공급원으로서만 기능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 결과 우리의 농업은 1970년대 후반부터 ‘개방농정’이 노골화됐다. 식량자급률의 급격한 하락, 농가 부채, 이농, 소작률의 급증 등 위기 국면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1950년대까지 국내 자본은 축적 기반이 취약해, 경제정책은 미국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예속돼 있었다. 미국 잉여농산물이 일방적으로 쏟아져 들어온 건 당연하다. 아울러 극단적인 저농산물가격이 유지되면서 국내 농업기반은 취약하고 위태롭기 그지 없는 상태가 지속됐다.

1960년대에는 오로지 수출 주도형 경제성장 전략을 추진했다. 오직 수출 경쟁력 확보를 위한 저임금·저농산물가격 정책이 노골적으로 전개, 농업과 농민이 희생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970년대에는 수출을 위한 중화학공업화에 따라 대외의존적 축적 방식이 구조화되면서 국내 농업은 더욱 위축되었다. 국제수지 문제와 세계 식량 파동에 따라 주곡에 대한 자급은 강조되었지만 전체 식량 자급률은 더욱 하락했다. 결국 1970년대 후반부터는 국제무역의 보호주의 강화와 더욱 노골화된 미국의 수입 개방 압력에 따라 '개방 농정'이 본격 전개되기에 이른다.

 

율티마을에 인접한 천주교마산교구청. 18만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율티마을 ‘우해이어보' 천주교 테마 명소’를 방문할 수 있기를...
율티마을에 인접한 천주교마산교구청. 18만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율티마을 ‘우해이어보' 천주교 테마 명소’를 방문할 수 있기를...

마을에선, 일과 삶이 하나되는 ‘농업 전후방 연관 산업’을

우리 마을의 농업구조는 한마디로 ‘영세농’으로 대변된다. 취약한 경지기반 조건과 자작농의 분산적 토지소유에 기초한 영세소농 경영구조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농어촌 종합발전 대책’ 등 농업 구조개선 정책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개별경영의 규모 확대 정책, 이른바 농산업을 주도하는 기업농 육성 정책을 강행했다. 정책의 사각지대로 밀려난 영세농에 대해서는 농촌공업화, 농촌지역 개발사업 등을 통한 농외소득 창출 전략을 강권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 농업과 농촌의 현장에서는 정부 주도 정책의 무리한 구조악이 작동되고 있다.

하지만 세계 5대 곡물 메이저가 세계농산업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농정개방 시대에 그런 국가 단위의 정책과 전략으로는 한계가 있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농업만으로 마을을 농산업을 감당하기에는, 마을을 먹여살리고 마을주민들도 먹고사는 데에는 역부족이다.

늦었으나 이제라도, 마을의 농업 또는 농산업은 ‘농업 전후방 연관 산업’으로 진화해야 한다. 이른바 선도적이고 혁신적인 농업인 및 농업 경영체들에게 정보통신기술(ICT)·바이오기술(BT) 등 신기술도 선택적으로 접목될 필요도 있다. 농업도 푸드테크·그린 바이오 등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거나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농업도 전후방 산업을 아우르는 ‘농산업’의 개념을 적용하되, 그 주체는 농업 경영체를 포함하는 ‘농산업 경영체’로 재정의,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식품산업, 생산 소재·장비산업, 유통·마케팅, 농업·식품 기반 벤처사업, 농업교육·지도·컨설팅 등 농업의 전방과 후방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가히 ‘농업전후방연관산업’의 패러다임으로 진화할 때가 바야흐로 도래한 것이다.

그래야, 마을도 농사를 짓는 농민만 모여사는 농촌이 아니라, 물고기만 잡고 사는 어민들만 모여사는 어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농업 전후방 연관 산업, 그리고 어업 전후방 연관 산업에 종사하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농어촌 주민들이 마을에서도 능히 먹고 살 수 있다.

마침내, 마을에서 일은 삶과 하나될 수 있다. 나도 먹고 살고, 우리도 함께 먹고 살고, 마을도 먹여 살리는 ‘살림마을 공동체’라는 넓고 깊은 대동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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