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약'은 주민 서로가 약속한 상생의 기초 규칙

원주민과 이주민 간 갈등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마을 공동체는 법치보다 자치사회가 더 어울려

율티마을 어촌계에서 어촌체험프로그램과 연계해 운영할 공동체험농장을 어촌계원들이 ‘자발적으로’ 조성하고 있다.
율티마을 어촌계에서 어촌체험프로그램과 연계해 운영할 공동체험농장을 어촌계원들이 ‘자발적으로’ 조성하고 있다.

지난 2월 12일, 율티마을에서는 연중 가장 크고, 중요한 연례행사가 열렸다. 어촌계 정기총회다.

이날 총회의 주요 안건은 ‘계원 정리의 건’이었다. 어촌계원도, 마을주민도 아닌 단순한 참관인 처지인 외부인이어서 ‘계원 정리’라는 안건의 제목과 목적만 보고 약간 긴장감이 들었다.

안건의 골자는 어촌계 자치교육 제9조(계원의 자격) 1항부터 7항까지 위반한 계원을 이번 총회에서 정리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중 논란의 쟁점은 제 5항이었다. “계원은 어촌계 공동 행사 시 년 3회 불참 시 제명 처리한다.” 물론 총회에서 소명의 기회를 준다는 단서가 붙어있기는 했으나 한 계원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1년 동안 정기총회에만 단 1차례 참석할 뿐, 평소 공동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5항을 위반, 제명 처리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반론을 미리 단단히 준비한듯한 이 계원은 자치규약 위의 어촌계 정관, 심지어 상위 실정법까지 들먹이며 항의를 했다.

어쨌든, 율티어촌계 자치규약을 두고 서로 입장이나 해석의 차이가 있었지만, 다행히 이 계원이 불가피한 사유를 잘 소명하고, 어촌계도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해 원만히 수습이 되었다고 한다.

 

율티마을을 관통하는 남파랑길 산책로에 가구별로 분양받은 장미화분. 각자 ‘자율적으로’ 책임지고 관리하자고 굳게 약속했다.
율티마을을 관통하는 남파랑길 산책로에 가구별로 분양받은 장미화분. 각자 ‘자율적으로’ 책임지고 관리하자고 굳게 약속했다.

마을에선 ‘법’ 없이 ‘자치규약’으로 살 각오를

율티마을은 기존의 어촌계 자치규약말고 또 하나의 자치규약을 준비하고 있다. 어촌마을공동체사업을 더욱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운영하려고 ’어촌체험·휴양마을사업자 지정‘을 신청하기 위해서다. 그러자면 어촌계 말고도 마을협의회를 따로 구성해야 하고, 협의회를 운영하는 자치규약도 따로 있어야 한다.

’어촌체험·휴양마을사업‘이란 마을 주민이 마을의 자연환경, 전통문화 등 부존자원을 활용해, 도시민에게 생활체험·휴양공간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사업이다. 이와 함께 지역 수산물 등을 판매하거나 숙박 또는 음식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어촌체험·휴양마을사업 운영자로 지정받은 마을협의회 회원은 율티마을의 각종 사업 활동에 적극 협력해야 하며, ‘도시와 농어촌 간의 교류촉진에 관한 법률’ 등 관계법령과 규약에 따른 모든 규정을 준수해야 한다.

이 규약에서도 “회원이 지켜야 할 사항을 위반해 총회에서 재적회원의 3/4 이상이 제명에 동의하면 제명한다”는 조항이 있다. 또한 회원들은 “율티마을의 발전과 이익을 위해 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협력한다”는 준수사항을 지켜야 한다.

이렇듯 마을에서는 어쩌면 상위 실정법보다 우선될 수 있는 그 마을의 법, ‘마을자치규약’을 따를 필요가 있다. 마을자치규약은 통제나 구속을 하기 위한 법 이전에, 마을공동체 주민들 사이에 서로가 믿음으로 약속한 상생의 기초규칙이자 공동체의 기본질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를 떠나 지역의 마을로 귀농, 자발적 하방을 선택하는 도시민들은 일단 용감하다. 하지만 아무리 용감한 도시민이라도, 외지인인 이주민 처지로 낯선 지역의 마을에 평범한 주민으로 안착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당장 먹고사는 생업 등 경제적 문제도 크지만, 그보다 먼저 마을주민으로 마을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사회적 문제, 즉 일상의 생활환경과 생활방식에 적응하는 게 어렵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듯, 마을에 가면 그 마을의 법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뜻하는 법이란 일반적인 실정법이나 성문법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마을의 설촌 이래 수백년에서 수십년 동안 그 마을의 원주민들끼리 만들고 지켜온 일종의 약속 같은 것들이다. 법보다 더 견고하게 굳어져 마을주민 서로를 연결하는 일종의 고유관습, 전통의례, 생활문화 등이다.

더군다나 마을공동체사업을 열심히 벌이는 마을의 경우에는 자치규약의 형태로 성문화된 사례가 흔하다. 그러나 법이 있다고 법치사회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듯, 마을에 서로 약속한 자치규약 매뉴얼이 있다고 해서 마을내부에 갈등과 분쟁이 사라지지 않는다.

법을 지키지 않거나 같은 법조항을 두고도 해석을 달리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듯, 마을의 규약도 아무렇지 않게 어기거나 마을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어촌체험·휴양마을사업자 지정을 준비하는율티마을의 갯벌체험장
어촌체험·휴양마을사업자 지정을 준비하는율티마을의 갯벌체험장

마을발전기금을 ‘자치규약’으로 징수한다고?

가령, 최근 귀농인들의 동향을 살피다보면 ‘마을발전기금’ 문제로 시끄러운 마을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마을로 귀농해 들어오려는 이주민들에게 마을에서 적지 않은 금액의 돈을 요구하는 경우다. 만일 마을발전기금을 내지 않고 버티면 마을주민들로 인정이 되지 않으니 마을총회 참석은 고사하고 투명인간이나 왕따 취급을 받기도 한다. 행정에 민원을 제기하면 마을 자체적으로 제정한 마을자치규약이니 행정은 관여할 수 없다는 무책임한 답변만 돌아온다.

그럼에도 굳이, 마을에서 마을발전기금을 요구하는 합리적 논거를 든다면 마을자치규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마을자치규약은 조선시대 향약과 같이 서로 다른 문화 속에 살다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 간에 올바른 질서를 만들기 위해 제정하는 자치규범을 의미한다. 그러나 마을자치규약은 강제성이나 구속력을 가진 법이 아니라 마을주민들 상호간의 약속일뿐이다.

따라서 마을발전기금 납부를 요구할 법적인 권리는 애초부터 그 마을의 이장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없다. 마을 구성원에게 공동체 생활 유지를 위해 공동으로 조성하는 자발적 분담금의 성격 정도로 규정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법적인 강제성도 없는 자치규약이 외주민인 귀농인들에게는 원주민들의 텃세로 비쳐진다. 책정한 금액은 적정한지, 기금은 어떻게 사용되는지 규정부터 명확치 않으니 믿음이 가지 않는다. 반면 원주민들로서는 이주민들이 마을의 공동자산을 이용하는 등 혜택만 받는 무임승차자라고 비판할 수 있다. 자치규약의 해석과 적용 기준은 원주민들과 이주민들의 갈등과 반목, 분쟁이 시작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그래서 ‘마을자치규약’은 더욱 필요하다. 그것도 처지에 따라 해석과 적용이 애매할 소지가 없는 ‘표준화된 마을자치규약’을 마을마다 갖추어야 한다. 가령, 마을발전기금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정의부터, 해당하는 이주민의 적용 기준, 기금의 사용처와 공개 의무, 회계 처리 방법 등이 명확히 체계화, 성문화된 수준이라야 한다.

최근들어 강원도 평창군, 경남 고성군, 충북 옥천군, 충남 당진시 등 각 지자체들이 속속 표준안을 제정하고 마을에 배포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복잡하고 다변화된 환경 속에서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힌 원주민과 귀농·귀촌인 사이의 갈등, 마을 대표 선정 절차의 공정성 결여, 마을 재산관리 및 회계운영의 불투명성 등에 따른 내부 갈등 및 법적인 분쟁를 방지하려는 목적이다.

마을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행정 등 외부 힘에 의존하지 않고 주민 스스로의 자정 노력으로 조화롭게 풀어가기 위해서는 내부 합의를 통한 규칙 마련이 상책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설사 기존에 제정된 규약이 있더라도 시대의 변화에 부합하지 않게 불합리하거나 부조리해서 사실상 사문화되고 있는 문제도 놓치지 않았다.

마을자치규약 표준안에는 마을회원 권리와 의무, 임원 구성 및 선출, 총회 및 마을회 등 각종 회의 절차, 회계 및 마을 공동재산 관리 규정 등 마을 단위 자치조직 운영에 필요한 투명성과 건전성을 확보할 수 있는 항목들이 담겨져 있다.

 

전북 장수 장계농협이 2018년 농민과 지역주민의 건강을 ‘자조적으로’ 지키겠다며 장계의료복지 사회적협동조합과 함께 개원한 ‘우리치과’.
전북 장수 장계농협이 2018년 농민과 지역주민의 건강을 ‘자조적으로’ 지키겠다며 장계의료복지 사회적협동조합과 함께 개원한 ‘우리치과’.

마을에선 ‘법’보다 먼저, ‘마을자치규약’

관련 조사연구자료에 따르면 귀농인 등이 마을이주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여유자금 부족, 생활 불편 등과 같은 경제적·환경적 요인이 단연 크다. 한편 그에 못지 않게 ‘지역 주민과의 갈등’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도시민 유치를 구호로만 부르짖는 해당 지자체는 마을발전기금 등 원주민과 이주민의 갈등 민원에서 ‘관리 권한이 없다’는 핑계로 뒷짐을 지고 있거나 빠져나가서는 안될 상황이다.

우리 마을자치규약의 역사는 길고 깊다. 오늘날 지역개발사업을 하면서 용역업체들이 급조한 컨설팅의 단순한 성과물이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사유농지와 공유지인 산림천택은 모두 마을공동체 등 고유의 지역 생태계에 통합돼 있었다. 향약의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을 다시 떠올리면 된다. 바로 마을자치규약이 지향하는대로, 마을공동체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인간관계와 집단의 안정적 지속을 위한 기본 원칙이자 방향에 다름 아니었다.

특히 상부상조는 농촌사회를 유지하는 필수적인 기본 실천덕목이었다. 동물에서 인간까지, 과거에서 현재까지, 농촌이든 도시든 일상적으로 유용했다. 나아가 윤리적으로 인간성이 고양되는 실천 덕목이라는 보편성까지 발휘하고 있다.

 

홍성 홍동면 마을주민들이 함께 설립한 '햇살배움터마을교육사회적협동조합'이 방과후청소년을 위해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ㅋㅋ만화방’
홍성 홍동면 마을주민들이 함께 설립한 '햇살배움터마을교육사회적협동조합'이 방과후청소년을 위해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ㅋㅋ만화방’

향약과 더불어 동계(洞契)는 마을의 공동재산 관리, 동제(洞祭), 농업협동(두레), 공동작업, 상호부조 등을 행하는 자치조직이었다. 농민의 기초적 생활단위인 마을(자연촌)을 범위로 소규모화하면서 동계는 마을 주민의 일상생활이 더욱 긴밀하게 결합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처럼 우리 전통마을공동체는 향약과 동계 등 자발적 규약의 실천을 통해 마을 주변의 산과 숲, 강과 바다의 이용에 관한 공동체의 관습과 규율을 제정하고 축적하고 적용했다.

무엇보다, 마을공동체 내지 결사체에서 협력과 상호부조는 반드시 규율과 강제와 함께 작동되었다. 벌, 불이익 등 규율이나 강제가 없는 공동체는 무의미하거나 존재할 수 없는 비현실이다. 만일 아직도 그런 마을공동체가 있다고 한다면, 한낱 윤리적 과대망상이나 낭만적인 이데올로기에 빠져있는 건 아닌지 세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을을 법치국가로 가두지 말았으면 한다. 마을은 자치사회가 어울린다. 그리하여, 마을에서는 ‘법’ 위에 ‘자치규약’이 더 무겁기를, ‘법’ 보다 먼저‘ 자치규약’을 따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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