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인 직접 민주주의 실현할 기초단위
실질적 처우와 법적 지위는 허술한 게 현실
보상, 처우, 자부심, 공적 책임감 부여해야
올해 초 율티마을에서는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2년 여 부녀회장을 겸직하던 마을 이장이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그동안 마을의 대표이자 마을여성의 대표로서 막중한 중책을 감당하던 전임 이장은 간곡히 임기 연장, 장기 집권을 고사했다.
대다수 마을주민들은 이장의 연임을 간곡히 권고했다. 하지만 이장과 부녀회장 역할을 동시에 떠맡으며 고생한 모습을 아는 주민들은 막무가내로 퇴임을 막을 수 없었다.
전임 이장의 연임을 권유하던 주민들은 이장의 빈 자리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선뜻 마을이장이라는 중책을 감당할만한 적임자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인들 밖에 없는 마을에서 이장직을 수행할만한 의지와 여건이 되는 중장년 층 인구가 드물기 때문이다.
결국 어촌신활력증진사업, 탄소중립실천시범사업 등 율티마을 공동체사업에서 마을주민들 대표해 마을활동가로 봉사하던 이가 차기 이장을 맡기로 결심했다. 신임 김정주 이장은 마을활동가 일을 내려놓은 대신에, 율티마을 이장 직과 진전면 주민자치위원회 사무국장 일을 기꺼이 떠맡았다.
율티 어촌마을공동체사업의 원활한 추진과 성공적인 운영을 고민하는 앵커조직으로서, 마을활동가 출신의 신임 이장이니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어촌마을공동체사업의 대표인 어촌계장 못지않게 이미 이 사업에 대한 이해와 전망을 충분히 갖추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촌마을공동체사업의 운영주체로서 어촌계의 대표인 이상율 어촌계장과, 율티마을공동체의 대표 김정주 마을이장은 율티마을에서 나고 자란 동갑내기 친구 사이다. 심지어 마을공동체사업을 제대로, 더 잘 해내기 위해 경남대 미래라이프대학 로컬크리에이터학과에 동반 입학하기까지 했다.
이로써 앞으로 율티마을에서는 앵커조직, 어촌계, 마을회 사이의 3자간 협력과 협업의 기반과 동력이 더욱 민주적이면 활발하고, 평화롭게 공고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마을공화국의 입법, 마을주민들 손으로 직접
프랑스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시민은 선거 때만 주권자 노릇을 하고 선거가 끝나면 다시 노예가 된다”고 통찰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처럼 국가적 차원에서 물리적으로 불가피한 대의민주주의는 주권자인 국민과 권력자인 정치인이나 관료들 사이에 갈등, 반목과 괴리를 필연적으로 야기시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마을 차원이나 단위에서는 주권자인 주민과 권력자인 주민 대표 사이에 보다 원형에 가까운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다. 가령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는 신념과 철학을 내세운 간디의 마을공화국이 하나의 지표이자 지침이 될 수 있다.
간디의 마을공화국은 마을 주민이 선출한 다섯 명의 대표로 구성된 ‘판차야트’ 지휘 아래 완전한 권력을 누리는 작은 정치 단위이다. 모든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서로 협력하고, 그 위에서 완전고용과 의식주 자급자족을 이루는 인간 중심의 착취 없는 자립적인 경제단위를 실천한다.
제주대의 신용인교수는 저서 <마을공화국, 상상에서 실천으로 -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위하여> 에서 ”우리나라에서 민주공화국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통치 단위는 읍‧면‧동“이라면서 ”따라서 마을공화국은 읍‧면‧동 단위에서 구현하고, 읍‧면‧동 주민에게 자기입법권과 자기통제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마을공화국의 3대 조직으로 마을정부, 마을기금, 마을민회를 두고, 마을공동체위원회는 읍‧면‧동 주민자치회의 대표기관(마을민회)의 성격을 지니도록 구성하고, 마을공동체지원센터는 그 대표기관의 사무국이 되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이장(理長), 마을의 최고봉사자이자 최대책임자
이같은 ‘간디의 마을공화국’이 아닌, 현행 ‘대한민국 민주공화국’ 행정제도에서 마을의 대표자는 이장(理長)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직함은 이장이 대단한 권력자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마을 대소사의 최대 책임자이자 최고 봉사자로서 수고스러운 소임을 온전히 떠맡고 있다.
어쨌든 ‘이장’은 시·군의 읍·면에 있는 마을(행정리)을 총책임하에 감독하는 최고 책임자로 정의되고 규정된다. 도시 지역(행정동)으로 보면 통장(統長)과 지위와 역할이 같다. 전국이통장연합회라는 조직에는 모두 9만 9000여명의 이통장들이 소속되어있다고 한다.
지방자치법 시행령 제81조에 따르면 행정동의 통에는 통장을 두고, 읍·면의 행정리에는 이장을 둔다. 이때 이장과 통장은 주민의 신망이 두터운 사람 중에서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규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읍장·면장·동장이 임명한다.
마을이나 동네의 주민자치와 행정지원을 책임지고 있음에도, 현실적으로 이장과 통장의 처우는 신통치 않다. 따로 고정급여가 지급되지 않고, 수고에 따른 물적 보상이라기엔 미미한 수당이 지원될 뿐이다. 따라서 마을 이장 자리는 일말의 경제적 대우나 사회적 대접을 기대하고 욕심을 낼만한 자리는 아니다.
굳이 이장에게 더 필요한 게 있다면, 물적 보상 못지 않게 사회적 보상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주민들과 가장 밀접한 민원 현장에서 고생하는 이통장들에 대한 실질적 처우와 법적 지위가 무척 허술하기 때문이다. 공직자와 같은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도록 지방자치법에 명시할 필요가 있다.
특히 사무관급 행정 공무원인 읍·면·동장이 이통장을 임명하는 행정절차는 불필요하다. 심지어 이장 선거로 인해 갈등과 분란이 심한 일부 지역에서는 관에서 공모를 받아 시장이나 군수가 면접을 보고 임명하기도 한다.
이통장은 마을 주민들이 모여 민주적으로 선거를 통해 직접 선출하는데, 왜 공무원의 평가와 승인이 필요한가. 이같은 전근대적이고 비민주적인 관 중심적 사고와 행태가 아직도 지방분권과 자치행정의 현장인 마을에서는 청산되지 않고 있어 개탄스럽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서는 안 되는 이장
이처럼 이장은 마을주민들이 직선으로 선출하기 때문인지, 어떤 마을에서는 ‘정치판’처럼 치열한 선거전이 벌어지곤 한다. 도가 지나쳐 이장 선거를 둘러싸고 마을 주민들 사이 반목과 갈등이 빚어지는 경우도 다반사다.
특히 마을공동체사업과 관련한 경제적 이권이 걸려있는 경우는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하다. 드문 경우일테지만, 나아가 이장직 이후에 단위농협 조합장, 지방의원 등 지역의 토호권력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로 삼기도 한다.
언젠가 경기도 한 마을에서는 귀농인 등 신규 전입자들에 대한 마을회 가입조건을 엄격하게 적용했다. 면사무소에 전입신고를 한다고 그 마을의 주민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그 마을의 주민으로 공인받으려면, 즉 마을회에 가입하려면 발전기금 250만 원과 연회비 5만 원을 내야하는 조건을 마을회 정관에 명시했다. 그래야 마을 운영에 참가하는 새마을회의 정회원으로 인정받고 이장 선거의 투표권도 가질 수 있다.
문제는 그 마을에 서울 등 대도시에서 귀촌인 등 신규전입자들이 늘어나면서 생겼다. 70여 가구 수준이던 마을이 두 배 이상으로 규모가 커지면서 전입자들이 기존 마을정관에 거부감을 느끼고 불만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마을 주민이라면 누구나 마을의 ‘최고 권력자’인 이장을 선출할 권리와 출마할 권리가 부여되지 않는 마을정관이 문제의 본질이다. 물론 불합리한 마을정관은 총회에서 표결을 통해 바꾸면 된다. 그런데 총회 표결에 참여하려면 마을회 회원 자격을 가져야 한다.
마을회 회원이 아닌 신규전입자는 총회에 참여하는 게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으니 정관을 바꾸려해도 바꿀 수 없다. 결국 기존 선주민과 이주민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져 고소·고발로 이어졌다. 그런데 마을 정관은 자치 규약이라 행정에서도 개정을 강제할 수 없다.
이장을 지방선거로 직접 선출한다면
이처럼 마을의 최고권력자인 이장직을 두고 선주민과 이주민, 구세대와 신세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정보·소통 부재로 인한 갈등이 의외로 흔하다. 물론 마을회 정관이나 마을자치규약에서 권리와 책임에 대해 명시하고 규정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준수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리하자면, 이장은 한마디로 시장 및 군수, 읍장 및 면장 다음으로 행정리 단위의 마을을 총책임하에 관리감독하는 권한을 가진다. 마을 공무사항, 주민치안, 범죄예방, 농사지원, 재해 복구지원 역할을 하는 권한을 맡는다.
일반적인 마을회 조직편제를 보면, 이장을 보좌하는 개발위원장, 부녀회장, 노인회장, 청년회장, 영농회장, 새마을지도자 등이 있다. 어촌마을에서는 특별히 어촌계라는 일종의 직능단체가 마을회 산하에 놓인다.
일단 농촌마을에서는 사실상 마을사무를 이장이 혼자 만기친람하는 게 현실이다. 이장 혼자 책임져야할 일이 많고 다종다양하다보니 한 법정리 안에서도 나뉘는 행정리마다 이장을 따로 선출한다.
대만에서는 우리의 이장에 해당하는 촌장도 지방선거로 선출한다고 한다. 우리도 읍·면장은 물론 이장까지 국가에서 통할하는 지방선거로 선출하면 어떨까. 그 정도는 되어야 이장직에 대한 경제적 보상, 사회적 처우, 개인적 자부심, 공적 책임감이 한꺼번에 정상화되지 않을까. 그 정도는 되어야, 우리가 하는 지방자치를 ‘민주공화국의 지방자치’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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