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이후 사회개혁 구상] 이제 보편적 복지로

저부담-저복지 국가? 실제로는 중부담-저복지

복지 수준 목표에 관한 국민적 합의 없는 가운데

윤 정부는 무분별 감세로 조세부담률 대폭 낮춰

다음 정부는 조세제도와 사회복지 판 새로 짜야

축소 지향의 선별적 복지, 시대에 뒤처진 지 오래

기본소득·기본주거 대들보 위에 보편 복지 구축

수십조 대 비과세 및 세금 감면 정비해 재원 마련

대한민국은 복지국가인가. 정부가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데 복지국가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의 사회복지 수준을 목표로 삼는가. 이 문제는 우리나라 사회에서 전체적으로 공론화된 적이 아직 거의 없는 것 같다. 지금까지 정부의 암묵적 전제는 경제성장 우선주의였다. 복지 수준을 크게 높이려면 세금을 더 거둬야 하는데 큰 정부는 자유로운 기업활동과 국리민복에 해롭다는 논리다. 또한 대기업과 고소득층의 부가 늘어나면 그 혜택이 소득 하위계층에까지 돌아가는 이른바 낙수(落水)효과 이론도 있다. 대체로 성급한 일반론이지만 국민 대부분은 알게 모르게 그런 보수적 경제학의 영향권 안에 있다.

 

OECD 회원국 국민부담률. 그래픽 김성진 기자
OECD 회원국 국민부담률. 그래픽 김성진 기자
OECD 회원국 사회복지지출. 그래픽 김성진 기자
OECD 회원국 사회복지지출. 그래픽 김성진 기자

합의되지 않은 저(低)부담-저(低)복지 국가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대체로 '저부담-저복지' 국가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질문은 과연 우리나라가 국내총생산의 몇 %까지 복지에 할당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의지가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에게 증세의 여력이 있다고 보지만, 꼭 선진국이나 OECD 평균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 중에서도 미국과 스위스는 2022년 국민부담률(세금+사회보장 기여금)이 GDP의 27.66%와 27.23%를 각각 차지해 우리나라(31.98%)보다 낮았다. 또한 복지예산을 늘리기 위해 세금이나 사회보장 기여금을 반드시 당장 올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효능을 다한 세금 감면제도를 없애거나 불요불급한 예산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복지예산을 더 확보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우리의 복지와 국민부담 체계에서 저(低), 중(中), 고(高)수준 가운데 어떤 모델을 선택할지에 대해 공개적으로 범사회적 합의를 추구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적정부담과 적정지출’ 같은 현상 유지 원칙이나 ‘작은 정부’와 같은 구호가 주류였다. 국민적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윤석열 정부는 무분별한 감세정책을 남발해서 조세부담률을 낮추면서도 국가부채를 늘리고 있다.

행정자치부 등 3개 부처 장관급 직책과 국세청장 등을 맡았던 이용섭 전 장관은 지난 12월 6일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윤 정부가 지향하는 저부담 저지출의 작은 정부는 정치적 구호로는 매력적일 수 있다”면서 “그러나 재정이 저출산, 고령화, 양극화, 기후위기, 성장잠재력 저하 등의 당면한 복합위기와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국가재정운용계획(2024~2028)에 따르면 2024년에는 조세부담률이 19.1%(2028년 19.1%), 국민부담률은 26.8%(2028년 27.2%)로 과도하고 급격한 인하를 계획하고 있다(는 게 더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OECD 회원국 정부 총수입. 그래픽 김성진 기자
OECD 회원국 정부 총수입. 그래픽 김성진 기자
OECD 회원국 정부 총지출. 그래픽 김성진 기자
OECD 회원국 정부 총지출. 그래픽 김성진 기자

한국은 이미 중(中)부담-저(低)복지 국가

그러나 정부 총수입과 총지출, 사회복지지출 등을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는 저부담이 아니라 중부담 국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OECD 홈페이지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한국의 정부 총지출은 GDP의 37.75%로 32개 OECD 회원국 가운데 끝에서 5번째였다. 반면 정부 총수입은 GDP의 37.4%로 밑에서 10위였다. 2020년에도 한국의 정부 총지출은 GDP대비 38.13%로 밑에서 3위, 총수입은 35.4%로 밑에서 9위였다. 우리나라 국민의 조세부담률은 2022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23.8%로 OECD 평균 25.2%에 거의 육박할 정도로 높아졌다. (OECD 홈페이지/data/indicators/ 2024년 12월 23일 업데이트)

정부 총수입 가운데 사회복지지출의 비율을 보면 우리나라 국민은 저복지에 비해 특히 상대적으로 중(中)부담을 지고 있다는 점이 확연하다. 2022년 기준 한국 정부의 총수입은 GDP의 39%로 스위스(34.2%), 미국(35%)보다 높고, 일본(39.1%), 영국(42.1%)에 비해 조금 낮았다. 노르웨이(63.9%), 프랑스(54%), 독일(47%)보다는 비율이 크게 낮았다. 같은 해 한국 정부의 사회복지지출은 GDP 대비 14.8%로, 프랑스(31.6%), 독일(26.7%), 일본(24.9%, 2020년), 미국 22.7%(2021년)에 비해 상당히 낮았다. 이 비율, 즉 GDP 대비 사회복지지출 비율을 GDP 대비 정부 총수입 비율로 나눠 보면 한국은 37.9%, 프랑스 58.5%, 독일 56.8%, 일본 67.3%, 미국 68.2%가 나온다. (2024년 12월 23일 업데이트). 이런 수치는 한국이 저부담-저복지 국가가 아니라 중부담-저복지 국가임을 보여준다.

 

지난 8월 23일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ECC에서 열린 제22차 기본소득 지구 네트워크 대회 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2023.8.23. 연합뉴스
지난 8월 23일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ECC에서 열린 제22차 기본소득 지구 네트워크 대회 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2023.8.23. 연합뉴스

부당한 감세 조치 철회와 기본소득제도의 도입

중부담이라고 해서 국민부담률(세금과 사회보장기여금)을 지금보다 더 줄여서는 곤란하다. 복지지출을 더 늘려서 중부담-중복지 체제로 가야 한다. 그렇지만 당장 증세는 정치인 가운데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선 윤석열 정부가 단행한 법인세 등의 감세 조치 가운데 일부를 철회하고 기존의 비과세 및 세금 감면제도를 정비해서 23% 대의 조세부담률은 유지하거나 더 높이도록 해야 한다. 특히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가상자산 과세 유예 철회는 소득 있는 곳에는 반드시 세금을 부과한다는 과세 원칙에도 맞지 않고, 혜택도 주로 상위계층에 집중된다.

이참에 사회복지지출을 늘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조세제도와 사회복지의 판을 새로 짜야 한다. 어차피 올해 대선에서는 적어도 민주당과 기본소득당 등에서 기본소득을 포함한 기본사회 공약을 들고나올 것이다. 민주당은 최근 당 강령에 ‘기본사회’를 명시했다. 이재명 대표의 ‘기본사회 스승’으로 불린 강남훈 사단법인 기본사회 이사장은 지난 17일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기본사회는 더 미룰 수 없는 논의이자 양극화와 저출생의 악순환 고리를 끊을 해법”이라며 “(다가올 대선에서는 기본사회가) 이재명 대표 개인의 관심이나 정책이 아닌, 더 미룰 수 없는 당·국회 차원의 비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대선은 축소 지향의 기존 선별적 복지제도를 버리고 기본소득, 기본주거 등의 대들보 위에 새로운 보편적 복지체계를 구축할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기본소득은 '자격심사 없이 모든 사람(특정 국가, 지역 등의 구성원)에게, 개인단위로, 노동 요구 없이 무조건 전달되는 정기적 현금 지급'이다. 사회 구성원이 소득 공백기나 부채의 나락에 떨어졌을 때, 전직을 위한 재충천이나 교육(훈련)을 모색할 때 든든한 받침대가 될 수 있는 게 기본소득이다.

 

청년기본소득. 연합뉴스 일러스트
청년기본소득. 연합뉴스 일러스트

보편적 복지가 선별적 복지를 대체해야

지금까지 정부가 금과옥조처럼 여겨 온 선별적 복지는 이제 시대에 뒤처진 나머지 곳곳에서 마찰음을 내고 있다. 현행 사회 복지제도의 근간인 기초생활보장 제도에 대해서는 까다로운 선별 조건, 노동 유인의 박탈, 적지 않은 행정비용, 차상위층과의 형평성 등 숱한 문제점이 지적돼 왔다. 송파 세 모녀, 방배동 모자, 창신동 80대 노모와 50대 아들 등의 비극은 모두 이런 모순에서 파생됐다. 65세 이상 노인의 하위 70%에게만 지급하는 기초연금이 갖고 있는 치명적 단점도 선별 복지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낸다.

수혜 대상을 늘리지 않으려는 축소 지향의 복지제도는 전략산업 지원을 위한 각종 세금 감면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복지지출에서 아낀 재원(세수)은 전략산업과 농업지원을 위한 각종 보조금과 세금 감면에 집중됐다. 따라서 기본소득 등 기본사회를 위한 재원 마련은 우선 수십조 원에 이르는 이런 비과세 및 세금 감면 제도, 즉 조세지출을 정비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본소득과 같은 현금복지의 신설과 확산은 어차피 시간문제일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으로 저성장 추세가 고착화되고, 인공지능을 비롯한 제4차 산업혁명이 기존 일자리를 대폭 줄일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노동시장과 사회의 이중구조와 격차가 날로 심화되면서 적어도 구빈(求貧)을 위해서는 보편복지로 가야 한다는 공감대가 넓어지고 있다.

물론 갈 길은 아직 멀다. 기본소득제도 도입의 걸림돌은 기득권층과 정부만이 아니다. 기존의 선별적 복지 관념에 익숙한 국민들도 기본소득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했는데’, ‘이건희 손자에게도 웬 기본소득?’, ‘막대한 재원 마련이 가능할까?’, ‘나라 곳간이 텅텅 빈다’, ‘세금폭탄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이는 타당하지 않거나 입증되지 않은 생각들이지만, 미디어의 힘을 등에 업고, 이 시대의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활개 치고 있다. 대부분 정치인도 이런 상식에 기대 유권자의 표를 쫓는다. 개혁의 핵심 수단은 이런 때 묻은 상식, 또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내는 일이다. 모든 유권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그들과 대화하는 작업에 정치인과 언론인이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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