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사용처 사례 과장해 정책 전반 핵심 흔들어
교통법규 위반 있다고 자동차 운행 금지하는 꼴
생산적 복지 vs 보편적 복지 논란의 변형된 버전
청년들의 경제적 자율성 부여해 삶의 질 높여야
도덕적 낙인보다 금액 높여야 정책 효율성 제고
경기도가 청년기본소득을 전면 개편하기로 결정했다. 정책의 일부 운영상 문제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두고 청년기본소득 자체가 실패한 정책이라는 주장은 과도한 해석이다. 특히 일부 언론은 ‘이재명표 ... 사실상 실패’ 운운하며 정책 실패를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하지만 청년기본소득은 확대되고, 이를 통해 더욱 효과적인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청년기본소득의 사용처에 대한 비판은 '낙인찍기'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지만, 그 전제를 인정한 위에서 일반론적인 문제점부터 먼저 살피기로 한다.
문제는 개선하고 금액은 늘려야
청년기본소득의 취지는 청년들에게 최소한의 경제적 자율성을 부여해 삶의 질을 높이고,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는 것이다. 사실 근본적으로 금액이 너무 한정됐다는 게 문제다. 기본소득 정책의 전면화는 너무 큰 반발에 직면해 찔끔찔끔 실시되고 있다. 당연히 제대로 성과를 거두기 어려운 형편이다.
정책효과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청년기본소득 지급액의 70%가 식당이나 편의점에서 사용됐다는 점을 문제삼는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청년들의 기본적인 생계와 생활 비용을 지원한다는 청년기본소득의 본래 취지와 부합한다. 식비, 생필품 구입은 청년들에게 필수적인 소비이며, 이를 지역 내에서 사용하게 함으로써 지역 경제에도 순환 효과를 준다.
일부 부당한(?) 사용 사례를 들어 정책 전반을 부정하는 것은 과장된 논리다. 모텔, 안마시술소, 성인용품점 등에서까지 사용한 사례가 있었다고 하지만, 전체 예산 대비 극히 미미한 비율에 불과하다. 대다수 청년들은 정상적인 생활비로 사용했다. 일부 사례를 문제 삼아 정책을 전면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마치 몇몇 사람이 교통법규를 어긴다고 해서 자동차 운행을 금지해야 한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경기도가 이번 개편안에서 용도를 학원비, 창업 임차료 등으로 제한하는 것은 긍정적인 방향일 수 있다. 하지만 청년들의 다양한 삶의 형태를 고려할 때 지나친 사용 제한은 오히려 실효성을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 청년기본소득의 핵심 가치는 청년들이 스스로 필요에 따라 자원을 배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사용처를 확대하고, 지급액을 늘려 청년들이 더욱 안정적인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청년기본소득이 ‘실패한' 정책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경기도가 6년간 시행한 이 정책을 왜 단순히 예산 낭비로 평가했는지에 대한 더욱 엄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발견된 문제점을 보완하고, 더욱 정교한 설계를 통해 보완하는 것이 합리적인 접근이다. 청년기본소득은 단순한 ‘퍼주기’가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다. 이를 확대하는 것이 오히려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길이다. 더구나 금액 확대가 빠진 개편안은 몇 년 뒤 청년기본소득의 효과성을 전면 부정하는 결과로 귀결될 수 있어 합당한 대안이 아니다.
'생산적 복지 vs 보편적 복지' 논란의 변형된 버전
청년기본소득 논란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이 문제는 결국 생산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 논쟁이 변형된 형태로 다시 나타난 사례로 볼 수 있다. 생산적 복지는 복지를 단순히 돈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자립을 돕는 방향으로 설계돼야 한다고 본다. 복지 혜택은 일자리 창출, 교육, 창업 지원 등 생산적인(?) 활동과 연계돼야 한다는 말이다. 반면, 보편적 복지는 복지를 시민 모두가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으로 본다. 복지 혜택은 개인의 필요에 따라 결정될 수 있어야 한다. 최소한의 경제적 안전망을 제공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복지정책의 큰 틀은 생산적 복지에서 보편적 복지 쪽으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유럽식 복지국가는 보편적 복지를 더 중시하며, 개별 시민의 필요를 고려한 포괄적인 지원을 강조한다. 사실 보편적 복지라는 개념 자체가 복지 지출의 확대를 막으려는 기득권의 논리에 대항 논거로 등장했다.
청년기본소득 논란은 기존의 생산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 논쟁에 새로운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청년기본소득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생산적 복지와 연결된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청년기본소득이 단순한 생활비로 쓰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생산적 용도로 사용해야 하므로, 교육, 창업, 취업 준비 비용으로만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해야 한다."
"일자리를 늘리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꿔야 한다."
긍정적인 견해는 보편적 복지와 연결된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청년들에게 경제적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모든 청년이 같은 방식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설계할 권리가 있다."
"청년소득 보장이 결국 사회 전체의 경제적 안정과 소비 활성화로 이어진다."
기존의 생산적 복지 논쟁은 주로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자립 지원과 관련이 있다. 반면, 청년기본소득 논란은 이에 더해 청년층의 경제적 자율성과 관련된 논쟁으로 변형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기존 복지 정책에서 청년 정책의 주된 목표는 노동시장으로의 원활한 진입이었지만, 노동시장 구조 변화에 따라 개인의 다양한 삶의 방식이 반영되어야 한다. 모든 청년이 취업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기존 생산적 복지 모델은 좋은 일자리를 찾도록 돕는 것이 복지의 목표였다. 하지만 청년기본소득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청년 스스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결정할 권리가 더 중요하다는 철학을 담고 있다. 이는 기존의 복지 논쟁을 더 근본적인 삶의 가치 문제로 확장시키는 의미가 있다.
결국 청년기본소득 논란의 핵심은 국가가 개인의 삶을 어느 정도까지 통제할 것인가의 문제다. 과연 국가는 어디까지 개인을 신뢰하고 자율성을 보장해야 하는가. 생산적 복지의 관점으로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청년기본소득의 사용처를 제한해야 한다는 시각이 옳은가? 아니면 보편적 복지 관점에서 국가는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고 청년들이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시각이 옳은가?
이번 경기도 청년기본소득과 관련된 논란이 단순히 예산 낭비 차원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현대 복지국가가 청년, 나아가 시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를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깊이 있는 철학적 성찰 위에서 정책이 도출되는 품격 있는 대한민국으로 부상하기 위하여.
부당한 사용 vs 정상적인 사용 프레임의 문제점
청년기본소득 개편과 관련된 논란에서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지급된 소득의 사용처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청년기본소득을 특정 목적(취업, 창업 등)에만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세금이 ‘부당하게’ 사용되었으니 잘못이고 ‘정상적인’ 사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시각이 전제되어 있다. '부당한' 사용처와 '정상적인' 사용처를 구분하기 때문에 청년들에게 자율적 사용을 보장해야 한다는 견해는 받아들여지기 어렵게 된다.
청년기본소득의 일부 사용처에 대한 '부도덕' 낙인은 여러 철학적 문제를 내포한다. 이는 결국 국가가 개인의 소비 행위를 사전에 도덕적으로 심판하는 행위다. 청년들에게 성숙한 시민으로서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다. 학원비는 괜찮고 취업 준비 중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사용한 식음료비는 안 된다는 말인가? 문화 소비는 괜찮고 건강 증진을 위해 받은 마사지는 안 된다는 말인가? 사용처에 대한 도덕적 기준을 세우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다. 취업 준비 중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식음료비인지 건강 증진을 위한 마사지인지 구분할 길은 사실상 없다.
설혹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부도덕하다고 보는 사용처라 하더라도 이는 개인의 선택이며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다. 특정 소비 행위에 대한 ‘부도덕하다’는 규정은 국가가 개인의 선호를 미리 심판하고 강제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천문학적인 예산이 소요되는 다른 분야에서 과연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가 있는지도 함께 물어야 한다. 명백한 범죄와 도덕적 해이가 저질러져도 국가 경제에 이바지했다는 등의 핑계로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는 예산의 남용과 비교해 형평성의 원칙도 검토해야 한다.
과연 무엇을 ‘정상적인’ 소비로 보고, 무엇을 ‘부당한’ 소비로 볼 것인가? 이 과정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가치판단은 필연적으로 편향되어 있다. 고급(?) 오페라 관람은 문화라서 괜찮은데 편의점이나 길거리 음식은 식음료라서 문제가 되나? 기준은 결국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도덕적 위계는 흔히 기득권·엘리트 계층의 소비 관념을 기준으로 삼는다. 젊은이나 저소득층의 소비는 ‘낭비’ 또는 ‘문제적’이라고 규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어떤 소비는 문화적·교육적 투자로, 어떤 소비는 타락으로 간주하는 이중잣대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특정 소비 행위를 ‘부도덕’한 ‘낭비’로 규정하면, 특정 계층이나 집단에 대한 낙인이 강화된다. 돈과 권력에서 힘이 있는 계층은 자신들의 소비 행태를 고급 문화로 규정하기 때문에, 대중적이거나 하위 계층의 소비 행태는 ‘저급’한 것이 되고 만다. 청년기본소득에 대한 ‘부당한’ 사용이라는 프레임은, 청년들이 감당해야 하는 구조적 경제적 어려움을 외면하고, 책임을 개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돌린다는 점도 살펴야 한다.
청년기본소득의 지출 내역을 두고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풍토는 천박한 우리 사회의 수준을 잘 보여준다.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계층적·문화적 편향성을 강화하며, 특정 소비 행위를 부당하게 낙인찍는다. 정책은 도덕적 판단을 앞세우기보다, 실질적으로 청년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설계되고 개선돼야 한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청년기본소득은 오히려 확대돼야 제대로 그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개편안을 다시 마련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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