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이후 사회개혁 구상] 연금 넘어 재정
조세의 소득분배 개선 효과 OECD 3분의1
특혜성 감면제도, 산업보조금 등 정비해야
전국민대상 '자율선택 기본소득' 등 검토
농촌기본소득은 비교적 적은 돈으로 효과
노동시장 개혁과 격차 완화에 재정 투입해
다층적 노후 보장 체계의 발판을 마련해야
국민연금법 일부 개정안이 20일 국회 본회의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됨으로써 18년 만에 작은 범위에서나마 개혁이 이뤄졌다. 주 내용은 △보험료율 9→13%, 소득대체율 40→43% 인상 △연금 국가지급 보장 명문화 △출산 크레딧과 군 복무 크레딧 확대 △저소득 지역 가입자 보험료 12개월 동안 50% 지원 등이다. 정치권은 이번 개혁이 ‘더 내고 더 받는’ 것이라고 애써 강조했지만, ‘더 내고 지금과 거의 같이 받는’ 방안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어쨌든 더 중요한 것은 국민연금을 포함한 전체 공적연금의 구조개혁이다. 이를 추진할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는 지난 회기 국회가 진행했던 국민연금 공론화위원회와 같은 시민 숙의기구를 한 번 더 가동해서 광범위하고도 지속적으로 효과적인 개혁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국회의원, 고위공무원, 전문가 등 기득권층만으로 공적연금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도록 기대할 수는 없다.
마음놓고 아이 낳게 하려면 연금구조 개혁에 앞서 재정 역할 확대해야
이와 함께 공적연금 체계를 넘어서는 더 큰 그림을 살펴보는 게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사회복지의 큰 틀을 형성하는 국가재정의 미래 방향을 먼저 설정해야 한다. 재정과 공적연금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땅의 보통 청년이 아이를 낳을 꿈과 용기를 가지려면 연금제도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세부 항목들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해소, 경쟁교육 체제의 혁파와 사교육비 감축 등까지 뻗어가겠지만, 한마디로 경쟁만이 아니라 협력과 공정성에 바탕을 둔 경제 및 사회제도의 구축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를 위해 재정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난다. 공적연금은 사회복지의 오른쪽을 떠받치는 날개다. 왼쪽은 정부 재정이 맡아야 한다. 국민연금 등 공적 연금은 대체로 가입자가 보험료를 낸 만큼 연금 급여를 받는다. 재분배 기능이 약하거나 없다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공적·사적 연금 모두 선진국 수준으로 비대해졌거나 그럴 예정이지만, 정부 예산의 사회복지 지출은 아직 중진국 내지 후진국 수준이다. 즉 오른쪽 날개에 비해 왼쪽 날개가 너무 허약하다.
첫째 과제는 세정(稅政)의 개혁이다. 우리나라는 세금의 소득분배 개선효과(조세효과)가 매우 낮은 편이다. 이를 측정할 때 흔히 세전과 세후의 지니계수를 비교한다. 지니계수는 0부터 1까지의 수치로 표현되는데, 값이 '0'(완전 평등)에 가까울수록 평등하고 '1'(완전 불평등)에 근접할수록 불평등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세금과 사회보장기여금 및 준조세를 내고 난 가처분소득을 기준으로 산출한 한국의 지니계수는 2019년 기준 0.33으로 그것을 내기 전인 본원소득 기준 지니계수 0.37에 비해 12.1% 낮아지는 데 그쳤다. OECD 회원국의 평균은 각각 0.31과 0.41로 지니계수 하락률은 32.26%였다.(OECD, ‘한눈에 보는 정부’, 2023년 판) 우리나라는 OECD의 거의 3분의 1에 그쳤다. 빈곤 구제를 위한 정부 역할이 크게 미흡하다는 말이다.
원인을 보면 우선 세입에서 구멍이 많다. 정부가 특정 부문이나 계층에 세금을 내지 않게 해 주거나 줄여주는 것을 조세지출이라고 한다. 과거 특정 산업 지원 등의 목적을 위해 동원했던 이런 예외들은 조세의 형평성과 분배 정의에 역행하지만, 상당 부분 온존해 있다. 소득세의 경우에도 누진제가 멀쩡하게 적용되지만, 소득공제와 세액공제 및 감면 혜택이 고소득층에 집중돼 있어서 역진적이다. 세출에서도 불요불급한 토건예산, 불합리한 보조금 등이 모두 조세의 분배개선 효과를 낮추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런 조세지출과 일부 계층에 대한 특혜를 대폭 정비해야 한다.
납세정보 공개로 탈세 차단하고 소득세 공제제도 크게 손 봐야
다음으로 세정 측면에서 만연한 탈세 및 지하경제와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도 납세자의 사생활 보호를 엄정한 징세보다 때로는 더 중시하는 비밀주의 원칙을 국민적 합의를 거쳐 수정해야 한다. 납세 정보 공개를 지금처럼 징벌 수단으로 동원하지 말고, 공개를 원칙으로 하면 탈세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재정 개혁의 다음 단계는 세금을 어떻게 쓰느냐, 즉 사회복지체계를 사회·경제의 변화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개편하고, 이에 필요한 재원을 늘리는 것이다. 필자의 [탄핵 이후 사회개혁 구상] 시리즈 첫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지금 재정에서 무분별한 조세지출과 불합리한 보조금, 무분별한 토건 예산을 줄임으로써 50조 원 정도의 돈을 마련한다고 가정해 보자. 기본소득의 도입을 검토할 수 있다.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는 저서 '배를 돌려라'(한티재, 2019)에서 만 18~64세 사이의 시민들이 기본소득의 형태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율선택 기본소득'을 제안했다. 하 대표의 기본구상은 이렇다. 만 18세가 되지 않은 국민에 대해서는 아동수당과 청소년수당 지급을 확대해 나가고, 만 65세가 넘은 사람에게 지급되는 기초연금을 전 국민 대상으로 확대한다. 만 18~64세에게 지급되는 자율선택 기본소득으로는 이 긴 생애주기 동안 똑같이 5400만 원이 주어진다. 이 돈을 가령 월 150만 원씩 3년 동안 받을 수 있다. 학업을 재개하거나, 직업을 바꾸는 등 생애 전환기에 유용하다. 월 50만 원씩 9년 동안 받는 것도 가능하다. 월 10만 원씩 45년을 받아도 물론 된다.
하 대표는 이 제도를 시행하는 데 연간 43조 2496억 원의 재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예산 낭비를 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탈세를 없애고, (그래도 안 되면) 약간의 증세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국민부담률 수준에 비추어 세금을 어느 정도 더 "올릴 수 있는 여력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강남훈 사단법인 기본사회 이사장은 저서 '기본소득의 경제학'(박종철출판사, 2019)에서 하나의 기본소득 재정 모델로서 전 국민에게 1인당 월 30만 원을 주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런 기본소득은 아동수당을 완전히 대체하고, 기초연금은 15만 원 이내에서 대체하며, 기초생활 보장대상자 중 생계급여는 15만 원 이내에서 대체토록 하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절감되는 돈을 감안하면 전 국민에게 30만 원의 기본소득을 주는 데 170조 원이 든다. (6년 전 나온 책이라 제도상 금액에 지금과 차이가 있다.)
강 교수는 비례적으로 부담하는 목적세로서 시민소득세, 환경세, 토지세 등을 신설해서 이 금액을 충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득세 공제제도를 폐지함으로써 60조 원을 절감하면 100조 원 남짓만 확보하면 된다. 거둔 만큼만 그대로 지출하는 재정중립 원칙 아래 국민들이 이 목적세를 통해 낸 돈과 받는 돈을 암산할 수 있도록 하면 '세금폭탄'과 같은 정치적 공세를 돌파할 수 있다고 강 교수는 말했다.
기본소득을 일정 범위의 국민에게만 시행할 수도 있다. 우선 청년을 대상으로 할 수도 있지만, 지방소멸 우려가 커지고 있는 지금 농촌 기본소득은 파급 범위가 가장 넓고도 큰 정책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정책 대안이다. 우선 읍·면 단위 농촌 주민 등으로 시행 대상을 300만 명 안팎으로 제한하면 기본소득, 또는 주거보조금으로 인당 매월 50만 원을 준다고 할 때 연간 18조 원이 든다. 기존의 말썽 많은 농업보조금 대부분을 기본소득 재원으로 돌리고, 위에서 언급한 재정 개혁을 통해 확보되는 예산의 일부만 책정해도 당장 시행할 수 있다.
농촌주민은 그곳에서 살기만 해도 국토와 환경의 보전이라는 사회적 노동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대가로 20세 이상 농촌주민에게 기본소득을 주면, 도시 빈민과 청년 실업자들이 농촌으로 향할 것이다. 인구가 늘면 일자리는 저절로 생긴다.
기초연금 포함해도 연금 2개 이상 받는 노령층 36%에 그쳐
기본소득 도입이나 임금 개혁 없이 다층적 노후 보장 요원
기본소득을 시행하지 않더라도 재정이 공적연금의 역할 증대와 안정화를 위해 해야 할 역할이 많다. 가장 중요한 게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 노동시장의 2중 구조와 극심한 임금 격차를 완화하는 과제다. 정부는 별도 예산을 책정해 전체 기업별, 세부 직무별, 근속 년수별 임금 데이타베이스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직무급 위주로의 임금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 업계의 직무별 평균임금 정보가 공개되는 것만으로도 임금 격차는 완화될 수 있다. 특수형태고용 종사자, 플랫폼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취약계층의 교섭력을 높이기 위한 지역별 노동회의소 설립을 지원할 수도 있다.
이런 정책들이 공적연금 구조개혁과 무슨 관계냐고 할지 모르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내 전문가들은 국민연금 외에도 개인연금과 퇴직연금을 통해 다층적 노후소득 보장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은 커져만 가는 임금과 소득 격차 때문에 두 개 이상의 연금에 가입할 능력이 없다. 지난해 8월 22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2년 연금통계’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 중 기초연금과 개인연금을 포함해 연금을 2개 이상 받은 경우는 36.0%에 그쳤다. 이 인구 중 연금을 하나라도 받는 90%의 월 평균 연금 수급액은 65만 원이었다. 또한 18세 이상 59세 이하 국민 10명 중 2명은 아무 연금에도 가입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퇴직연금만 해도 소규모 기업의 가입률이 11.9%에 그치며, 전체 퇴직연금 가입자 중 55세 이상 실질 연금 수령자는 7.1%에 불과하다. 직장인들이 주택자금 마련 등을 위해 조기 해지하는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개인연금 가입률도 우리나라는 9.9%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재정의 이렇다 할 도움이 없이 다층적 노후소득 보장 체계를 만들라는 말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이대로는 노후 준비는 각자 알아서 하라는 각자도생의 나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연금구조 개혁을 순조롭게 추진하기 위해서도, 각 공적연금이 제 역할을 충분히 이행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도 재정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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