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책 공약, 큰 그림 속에서 제시돼야 설득력
국가 의제를 경제에서 사회로 근본적 전환해야
정부 역할도 복지, 교육, 환경, 기후 대응에 중점
시대착오적 산업지원책과 조세감면, 보조금 온존
경제부처 통폐합해 대폭 축소, 선제적 단행해야
47년 손 안 댄 세제 개편…복지예산 획기적 증액
정부 사회복지지출과 공적이전소득 OECD 하위
경제정의와 지속가능성에 바탕을 둔 복지국가로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다시 역사의 전환점 앞에 서 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진부한 격언을 정확히 입증하듯이 대한민국은 8년 만에 다시 탄핵정국을 맞이했다. 해방 후 거의 모든 최고 정치권력자의 갑작스러운 몰락을 지켜봐야 했던 국민들은 내년에도 예정에 없던 조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될 전망이다. 주기적으로 불거지는 정치 불안과 심화되는 사회와 경제의 2중 구조를 보면서 이번에는 우리나라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에 더 많은 국민이 공감할 것 같다. 무엇을 우선적으로 해야 할까.
촛불혁명과 진보정권 5년의 실패
답을 찾기 전에 우선 8년 전으로 되돌아가 보자. 촛불혁명 이후 야당은 정권을 가져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진보적 어젠다의 정책을 실천하지는 못했다. 야당과 보수언론의 공격을 받은 문재인 정부는 의제를 둘러싼 싸움에서 임기 내내 고전을 면치 못했다. 소득주도성장과 최저임금 1만 원 공약은 언론의 십자포화 속에 무색해졌다. 탈핵 또는 원전 비중의 단계적 축소라는 의제도 역시 숙의 민주주의의 어설픈 실험만 남긴 채 꼬리를 감췄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움직임은 심한 역풍을 맞고 좌초했다. 차별금지법은 더불어민주당마저 "나중에 보자"며 사실상 철회했다.
문재인 정부는 개혁을 위한 큰 그림을 제시하지 않았다. 지금의 현실에 대한 더 큰 그림과 중장기적 미래의 한국 사회 모습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는 말이다. 큰 그림이 없으니 개별 정책들을 추진할 때 이해당사자와 국민에게 그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거나 반대자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큰 그림은 지금의 제도와 정책이 태어난 배경과 역사, 당사자들의 이해관계와 문제점 등의 맥락을 밝혀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할 방향도 드러난다. 따라서 기득권층은 큰 그림이 드러나는 것을 꺼린다.
12.3 내란이 발발하기 전 더불어민주당이 불통 대통령을 제쳐두고 거리의 정치에 나섰을 때에는 시민들이 그다지 호응하지 않았다. 2016년 광화문에서 텐트까지 치고 싸웠던 진보진영 가운데 노동계를 제외한 대부분 사회운동 단체들이 거리에 합류하길 꺼렸던 것은 바로 문재인 정부 5년의 실정의 여파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문재인 정부가 최저임금 1만 원을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논란이 사라지지 않은 이론만 들어 추진할 게 아니었다. 취약계층을 위한 전반적인 사회안전망 강화와 사회 안전판의 새 틀을 제시하고, 그 안에서 최저임금을 예컨대 앞으로 5년간 매년 평균 5%씩 인상해 1만 원에 이르도록 하겠다는 식의 예측 가능한 기획이 필요했다. 사회 안전판이란 사회안전망이 받쳐주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있는 취약계층을 위한 보호책이라고 정의해 보자. 최저임금 제도가 있어도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노동자와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으로 타격을 받을 자영업자와 해고될 직원을 위한 대책은 사회 안전판의 일부를 구성한다. 최저임금법을 포함한 근로기준법의 준수와 체불임금 근절, 자영업자의 자구책 지원 등이 민생을 위해서는 최저임금 인상보다 더 중요하다는 인식과 실천이 동반됐어야 한다는 말이다.
개혁의 가장 유력한 걸림돌은 경제부처
개혁을 위한 큰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정부의 정책 기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절실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즉 박정희 군사정부 이래 우리나라 정부는 규모가 수백 배나 더 커졌지만, 경제를 중시한다는 정부 서비스의 큰 기조가 바뀐 적이 없다. 즉 효율적 경제성장을 위한 거점산업 육성, 그들을 위한 금융과 세제 지원, 대대적 사회간접자본 구축이 개발독재 국가 대한민국호의 최우선 과제였다. 지금은 국내외의 사정이 판이하다. 그런데도 과거 산업화 지각생의 숙제를 속성으로 해치우는 데 최적화된 경제부처들이 상당수 시효가 지난 법과 제도를 붙잡고 사업의 유지 확장과 조직 유지를 도모하고 있다. 경제부처들을 통폐합함으로써 대폭 줄여야 한다. 이 개혁 과제가 액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는 차고 넘친다.
시대착오적인 법과 제도들은 세제에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중화학공업과 농림축산어업 등 특정 산업에 대한 각종 세금 감면제도가 그것이다. 이들 특혜 산업에서 쓰는 전기요금과 환경을 오염시키는 유류에 대한 세금의 감면 혜택도 최근 줄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각각 수조 원 단위 규모에 이른다. 이들 제도 모두가 국제기구가 폐지를 권고하고 있는 반환경적, 기후변화 대응 역행적 보조금에 해당된다.
반세기 동안 한 번도 큰 틀을 바꾸지 않은 우리나라 세제는 소득불균형의 시정 기능이 매우 취약하고, 부당한 감면제도들로 얼룩져 있다. 정부가 특정 부문이나 계층에 세금을 내지 않게 해 주는 것을 조세지출이라고 한다. '세금도둑 잡아라'의 하승수 공동대표는 무분별한 조세지출과 불합리한 보조금, 토건예산을 줄이는 것만으로 대체로 50조 원은 쉽게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2019년에 펴낸 저서 '배를 돌려라'에서 말했다. 대부분 경제부처 소관의 예산이다. 각종 보조금과 세금감면 혜택을 받는 부문과 종사자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되도록 세제의 큰 틀을 건드리지 않기를 바란다. 1977년 부가가치세가 시행된 이후 47년간 세제가 근본적으로 바뀐 적이 없는 까닭이다.
1990년대 하반기 우리나라에서 대기오염이 본격적으로 사회문제가 됐을 때 당시 상공부 고위 관계자는 정부가 석탄화력발전소들을 앞으로 십 년 이내에는 모두 폐쇄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고 한다(환경부 전 고위 공무원의 회고). 그러나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기후악당'이라는 오명을 얻고 있는 지금까지도 이 땅의 동해안에서는 신규 석탄화력발전소가 가동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지체현상에서 드러나는 기득권의 공고함과 관료조직의 축소 경직성은 대대적 개혁의 필요성을 말해준다.
불필요한 보조금 규제(인센티브)를 한 가지만 더 들어 보자. 한국 정부는 경기침체의 지속이 우려될 때 내수경기의 진작을 위해 자동차 구입시 내야 하는 개별소비세를 한시적으로 감면해 준다. 유류세도 일부 인하해 준다. 경제관료들에게는 그런 조치들이 기업에도, 소비자에게도 도움이 되면서 경기도 살리는 전가의 보도로 여겨진다. 그러나 다 공짜 점심에 해당된다. 혜택은 자동차, 정유 대기업과 그곳의 정규직 노동자, 일부 중산층 소비자에게만 돌아가고 부작용(세수 감소와 인플레)은 나머지 국민이 감내해야 한다.
더 큰 폐해는 그런 선심성 조치가 환경에 해로운 악성 보조금이라는 데 있다. 더 많은 자동차의 더 많은 주행을 초래해 온실가스와 미세먼지를 늘리기 때문이다. 또한 줄어든 세수 때문에 노인이나 장애인을 위한 복지예산이 줄어드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경기부양을 위해서라면 타당성을 깊이 따지지도 않고 건설업계에 일거리를 만들어 주는 버릇도 진보나 보수 정부를 가리지 않는다. 새만금 간척지는 아직도 용도를 다 정하지 못했고, 지방 도시들에는 텅 빈 공항과 도로, 미분양 아파트단지들이 널려 있다. 예산이 건설업을 위해 낭비되는 동안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독보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정부의 GDP(국내총생산)대비 사회복지지출은 2022년 기준 14.8%로, 프랑스(31.6%), 독일(26.7%), 일본(24.9%, 2020년), 미국 22.7%(2021년)에 비해 상당히 낮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은 21.1%였다. ☞ OECD>data>indicator. 2024년 12월 4일 업데이트 2010년 OECD 회원국들의 사회복지지출 평균은 경제 활성화 지출의 대략 두 배였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후자가 전자의 두 배였다. 당시 사회복지지출은 GDP의 10%에 못 미쳤던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지출 비중이 그동안 늘긴 했지만, 아직도 더 크게 늘려야 한다. 국민연금 등 공적이전소득도 다른 OECD 회원국에 비해 취약한 편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국민소득 수준으로 보나 납세율로 보나 획기적으로 더 큰 규모의 사회복지 혜택을 정부에 요구해야 한다.
정부와 정책에 시대정신을 반영하자
나라 안에서는 부문별 양극화와 사회적 갈등이 완화되기는커녕 심화되고 있다. 기업 규모별, 정규직 여부, 조직화 여부 등에 따른 소득격차와 계층간 자산 격차가 점점 더 커진다. 격차 확대는 내수시장의 침체로 나타나 경제 활성화에도 큰 걸림돌이 됐다.
세계적으로는 경제의 저성장 추세가 굳어지는 가운데 날로 심각해지는 기후 위기의 대처 과정에서 '녹색관세'와 같은 새로운 보호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국내의 주력 산업들은 최근에는 통상압력에 떠밀려 미국 등 해외로 생산 거점을 옮기는 오프쇼어링을 가속화하고 있다. 지금은 막대한 수출로 나라 경제에 효자 노릇을 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가 앞으로 30년 후에도 지금과 같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한때 한국 중공업과 제조업의 심장이었던 울산광역시가 급속히 일자리를 잃고 있다는 소식은 국내 제조업의 불안한 미래에 대한 전조(前兆)로 읽힌다.
무엇보다 우리나라가 기후 위기를 등한시하고, 범국가적 대응을 미루고 있는 상황을 하루속히 타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도 건설업과 중공업 일부에 대한 구조조정과 전기요금의 인상 및 발전산업의 개편 과제가 시급하다.
새로운 국가 의제는 경제성장 목표를 적어도 당분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내년 우리나라의 성장률 전망치는 1% 안팎으로 정체를 피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한 구조적 문제의 대부분이 경제성장 지상주의와 경기부양책 남발에서 비롯됐거나 악화됐다는 점을 상기하자.
요컨대 이제는 국가 의제의 중심을 경제에서 사회로, 정부의 기능은 경제 활성화 지원에서 교육, 사회복지 및 기후위기 대응으로, 산업구조는 건설업과 제조업에서 정보산업과 서비스업으로 각각 무게 중심을 옮겨가는 쪽으로 대전환을 서둘러 준비해야 한다. 이 과정에 앞서 경제부처 통폐합은 선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만 세정(稅政)과 세제의 개혁, 불요불급한 도로·공항 등 사회간접자본 등에 들어가는 예산의 절감 등의 길이 열린다. 이를 통해 경제정의와 지속가능성에 바탕을 둔 복지국가로 원활하게 발돋움할 수 있다.
관련기사
- 탄핵 이후 과제는 권력 집중, 중앙 집중 해체부터
- 달러 강세·관세 전쟁·반도체 부진…내년 경제도 암울
- 윤석열 탄핵 이후 우리 앞에 놓인 3가지 과제
- 윤석열 탄핵 지연으로 무너지는 한국 경제
- 지표는 엉망인데…기재부 "완만한 경기 회복" 말장난
- 청년·건설업 '고용 절벽' 안보이나…정부 "고용지표 양호"
- 책임지지 않는 권력을 책임지게 만드는 선거
-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일 수는 없다
- 윤석열을 말끔히 지워야 하는 또다른 이유
- 국헌문란 ‘비상입법기구’와 최상목의 축소·은폐 시도
- '기본소득' 제대로 도입할 때가 왔다…올해 대선이 기회
- 기본소득에 관한 '잘못된 상식' 세 가지를 타파한다
- 벼랑 끝 노인 빈곤…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는 돼야
- '더 내서 억울'…국민연금에 대한 인식부터 바꿔야
- 국민연금 '모수개혁' 착수, 지금이 적기다
- 기초연금·국민연금 통합해 '최저보장연금'으로 가자
- '정부 재정'이란 왼쪽 날개 대폭 보강해야 복지가 산다
- 우리나라 자생 벚꽃, 이제는 알고 즐기자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