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피해 예술인들과의 연대의 장 필요
보안법 앞세워 공안정국 조성한 노태우 정권
신학철의 <모내기>(1987)는 노태우 정부 시기에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받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모내기>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의 이유를 살피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치 상황을 살필 필요가 있다. 1987년에 일어난 6월 민주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이 이뤄졌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의 결실인 첫 대통령 직선제가 선거에서 전두환 정권의 2인자인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야권 분열을 등에 업고 간신히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은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내세우며 5공화국과 차별화를 주장했다. 그래서인지 노태우 정부 시기는 한국 사회에 민주화의 분위기가 잠시 스치기도 했다. 물론, 이런 분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 뒤에 숨었던 5공화국의 그림자가 다시 고개를 내밀면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노태우 정부는 출범 직후인 1988년에 7.7선언을 발표하여 중국, 소련, 북한과 같은 공산권 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천명했다. 그래서 노태우 정부는 1988년 12월에 평양 청년학생축전 측이 한국적십자를 통해 전대협에 초대장을 보낸 것을 문제 삼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는 5공 청산 압박, 통일 운동의 격화가 연이어지자 1989년부터 국가보안법을 앞세워 새로운 공안정국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공안정국의 기점은 1989년 3월에 문익환, 황석영의 방북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 직후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두 사건이 발생한 시기에 노태우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체제 전복 세력의 선동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선언하며 공안합동수사본부를 조직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한반도 공동체’ 그림에까지 국가보안법 적용
<모내기>가 국가보안법 적용 대상이 된 것은 이런 공안정국과 관련이 깊다. 사실 <모내기>는 이미 1987년에 민족미술인협의회가 운영한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통일전’에서 별다른 문제 없이 전시된 바 있다. 그럼에도 1989년에 접어들어 공안정국이 시작되자 검찰의 주도로 <모내기>에 북한을 찬양한 이적표현물이라는 혐의가 적용된 것이다.
<모내기>는 당시 미술평론가 성완경이 제시했듯 종합주의적 상징주의 방식으로 외세의 간섭 없이 한반도 통일을 이루어 평화로운 공동체를 꾸릴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뜻이 담겼다. 그리고 이러한 바람은 헌법에 명시된 평화적 통일의 영역을 결코 벗어난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당국이 <모내기>를 강력히 문제 삼은 이유는 화면 하단에 미국과 일본 그리고 전두환, 노태우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런 표현은 헌법에 보장된 예술의 자유와 예술가의 권리 보장에 해당도히는 것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한국 정부나 미국에 대한 비판이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논리가 무분별하게 동원되곤 했기에 <모내기>도 이런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작가의 고향 풍경을 김일성 생가로 해석한 공안 전문가
<모내기>가 재판 과정에서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는 검찰의 의뢰로 서울대공전술 연구소의 홍종수가 작성한 감정서를 통해서 자세히 살필 수 있다. 그는 이 감정서를 통하여 <모내기>의 상단이 이상향으로 묘사된 북한, 하단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계급투쟁이 벌어지는 남한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단편적 구도를 바탕으로 <모내기>의 세부 소재들이 북한을 찬양하는 맥락으로 수렴된다고 해석했다. 대표적으로 <모내기> 상단 왼편에 그려진 초가집이 만경대에 위치한 김일성의 생가라고 비약한 경우를 꼽아볼 수 있다.
그러나 검찰 측이 김일성 생가라고 주장한 초가집 풍경은 신학철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고향인 경북 금룬군 강문면의 풍경이다. 이런 지점은 당시 검찰이 기본적인 사실관계와 작가의 의도를 무시하고 공안정국을 조성하기 위한 맹목적, 자의적 해석만을 내세웠음을 잘 반영한다. 성완경이 <모내기>와 관련하여 지적했듯이 미술의 언어는 매우 주관적이면서 복잡하고 추상적이기에 전문가도 미술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과 법원은 결코 일상의 언어로 정확히 포획될 수 없는 작품의 맥락을 왜곡하여 기어코 이적표현물이라는 낙인을 찍은 것이다.
그래서 신학철은 1심, 2심에서 <모내기>를 이적표현물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받았지만, 1998년 3월에 열린 3심에서는 원심 파기환송 판결이 나왔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 열린 파기 환송심에서는 국가보안법의 반국가단체 찬양 및 고무죄를 적용받아 징역 10개월, 선고유예 2년 판결이 나오기에 이른다. 노태우 정부의 공안정국으로부터 비롯된 재판이 이처럼 비상식적 결과로 귀결되었지만, 다행히도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신학철 작가를 사면·복권했다. 그러나 재판과정에서 몰수되었던 <모내기>는 국고로 귀속되어 복권되지 못했다. 덕분에 신학철은 지금도 <모내기>를 반환받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 시기에 <모내기>를 작가에게 반환하는 것을 검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학철이 사면 및 복권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법원이 재심 재판을 열어 기존 판결을 무효화하지 않으면 몰수된 작품을 원작자에게 돌려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문제로 인하여 반환이 좌절되었다. 이후 문재인 정부 시기에도 서울중앙지검이 법무부의 지시로 <모내기> 반환을 검토했으나, 법리 상 재심 없이 작품 반환이 불가능하다는 문제는 여전히 돌파할 수 없었다. 다만 몰수가 된지 18년 만에 <모내기>를 국립현대미술관이 위탁관리 할 수 있도록 하여 소기의 성과를 얻기는 했다.
지금도 계속되는 작가의 수모
<모내기>가 온전히 복권되지 못했기에 근래에도 신학철 작가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작년 12월에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바람, 불다: 표현의 자유와 국가보안법》에서 그가 <모내기>를 재해석한 작품이 사회윤리 침해를 이유로 든 국회 사무처의 사전검열로 인하여 전시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회사무처의 검열은 헌법과 법률에 위배되는 국가폭력인 동시에 아직 <모내기>의 복권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근본적인 문제까지 재호출했다. 왜냐하면 만약 <모내기>가 온전히 복권되었다면 애초에 국회 사무처가 사회윤리 침해라는 억지스러운 근거를 동원하면서까지 사전검열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근래에 전승일 작가는 1989년에 <민족해방운동사> 제작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불법 연행, 고문에 이은 국가보안법 위반 판결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다. 군사독재 정부 시기에 억울하게 국가보안법을 적용받아 국가폭력에 노출된 예술인이 한둘이 아니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했을 때 필자는 문화·예술 현장이 힘을 모아 신학철 작가의 국가보안법 위반 판결 재심 청구를 추진하는 동시에 전승일 작가와 같이 부당하게 국가보안법을 적용받아 피해를 입은 예술인들과 연대할 수 있는 장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만약 이 같은 장이 만들어지고 결실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면 그만큼 민주주의의 근간인 예술 표현의 자유는 한국 사회에 더 깊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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