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현장에서 죽어간 소년의 혼을 불러내
휘발한 국가폭력 덧내고 피투성이로 현재화
미얀마, 우크라이나, 가자지구 역시 기시감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아시아 작가로서는 타고르(인도), 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이상 일본), 모옌(중국)에 이은 네 번째 수상이다. 아시아 최초의 여성작가라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노벨문학상이 시행된 이래 가장 많은 수상작가를 배출한 곳은 구미지역이다. 이 상이 구미를 중심으로 한 세계문학공화국의 제도관리시스템이라는 일각의 비판도 존재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러던 것이 1945년의 이른바 2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작가가 노벨문학상에 진입하게 된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1945년 칠레의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칠레)의 최초 수상 이후 2010년의 바르가스 요사(페루)에 이르기까지 총 6명의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해, 라틴 아메리카 문학 붐을 일으켰다.
그간 문학의 주변부로 여겨지던 아프리카 작가들 역시 1986년 월레 소잉카(나이지리아)의 수상 이후, 나딘 고디머(남아프리카공화국), 존 맥스웰 쿳시(남아프리카 공화국), 압둘라자나 구르나(탄자니아)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45년 이후의 세계문학의 특징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식민주의와 후기 식민주의에 대한 서사적 비판이 그것이다. 남미지역이야 19세기의 독립운동을 통해 일찍 식민주의로부터 해방된 것처럼 보였지만, 더 광범위한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은 2차대전 이후 반식민·식민상태로부터 해방되었다. 해방은 되었으나 식민지적 질곡은 연장되어 지속되는 식민주의에 대한 문학적 탐색을 낳았다.
둘째, 전지구적인 차원에서의 디아스포라(이산)의 문제와 함께, 이주와 이동의 문제, 정체성을 둘러싼 갈등과 난민 의제를 포함한 다양한 쟁점이 문학적으로 탐색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경제적·문화적·인종적·젠더적 폭력에 대항하면서 주체화를 실현해가는 장엄한 인간조건을 탐색하는 작가들이 조명을 받게 된다.
셋째, 글쓰기의 장에서 소외되거나 입장권을 받지 못했던 여성작가들이 대거 등장하여, 자기 역사쓰기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넓은 범주의 ‘여성적 글쓰기’의 특이성과 보편성을 세계문학의 장에서 보편적 범주로 구축해 나가는 작가들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강의 소설은 세 번째 범주에서 글쓰기를 시작해, 일종의 원심적 힘으로 첫 번째 범주까지 동심원을 그리며 접근하고 확장하면서, 소설적인 심화를 이룬 작가라고 볼 수 있다.
한강을 세계적인 반열의 작가로 각인시킨 『채식주의자』는 세 번째 범주에서 출발해 두 번째 범주에서의 문화적·젠더적 폭력에 대한 강한 내면적 저항을 보여준 작품이다. 남성화된 문화적 육식성에 대항해, 채식을 넘어 극한적인 거식증까지를 체현하고 있는 인물에 대한 한강의 묘사는 “미와 공포의 기묘한(uncanny) 혼재”라는 평가를 불러냈다. 소설 내부의 가부장적 폭력에 대항하는 한 방법으로 극한적인 단식과 거식을 추구하면서 점점 식물화되는 한 여성에 대한 묘사는 그것을 알레고리적으로 확대시키면, 세계의 구조적 폭력성에 대한 비타협적 거부를 의미한다.
한강의 소설에서 『소년이 온다』는 그 폭력의 구조를 한국의 비극적 현대사였던 광주 5.18과 연결시키면서, 역사적 비극을 진실의 목소리로 승화시킨 수작이다. 사실 이 작품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한국에서의 이른바 5.18 문학은 역사적 죄의식과 부채의식에 기반한 여러 형태의 작가적 고투에도 불구하고, 사태의 총체적 재현 이후의 미학적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한강은 이 소설에서 5.18의 현장에서 죽어간 소년들의 혼을 불러내 ‘망자의 목소리’를 통해 국가폭력의 가공할 만한 잔혹성을 현재화한다. 동시에 5.18의 현장에서 죽어간 어린 소년들의 목소리와 인간다운 정념을 회복시키고 부활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을 단순한 ‘희생자’로 간주하는 시선과 인식이야말로 ‘강요된 망각과 청산’에 불과하다는 시각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희생자’라는 말의 정의야말로 5.18의 전개 과정에서 소년들조차 목숨을 걸고 싸워왔던 고유한 기억과 정념을 휘발시키고 박제화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5.18로 상징되는 국가폭력은 끝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설이 쓰여지는 바로 그 순간에조차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는 풍경을 현실의 도처에서 발견한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기억을 떠올린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아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소년이 온다』)
위의 인용문에서 “저건 광주잖아”라는 분노와 탄식이 의미하는 것은 물론 2009년 이명박 정권 당시의 ‘용산참사’를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폭력의 일회적 특수성으로 한정될 수 없다. 우리가 한강의 소설에서 발견하는 폭력과 광기의 메커니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의 구조화된 보편성을 표현한다.
미얀마에서 발생한 군부 쿠데타와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지속되고 있는 전쟁의 참상, 이스라엘 군에 의한 가자지구에서의 1년여간 지속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한 제노사이드의 참상은 그 자체가 “저건 광주잖아”라는 충격과 전율의 인식과 감정을 무한적으로 재현하는 사태들이다.
이번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결정한 주최 측의 평가 역시 이 부분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한강의 작품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며, “작품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는 인간을 묘사한다는 선정이유가 그것이다.
그런데 소설가 한강은 보수정권이 등장할 때마다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작가적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국가의 문화통제에 의해 해외문화교류 지원이 제한되기도 하고, 세종도서 지원사업에서 『소년이 온다』가 지원배제 되기도 했다. 지난 해에는 소설 『채식주의자』가 바람직한 성교육에 유해하다는 기묘한 이유로 경기도의 학교도서관에서 폐기되기도 했다. 보수정권 하에서의 문체부뿐만 아니라 교육청에서조차 작가와 작품을 편협한 이념이나 도덕으로 재단하고 선동적 책략에 편승해서 헌법상의 권리인 표현의 자유와 예술가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침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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