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어렵고, 과학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아”
상식을 깬 일본은행의 역행적 저금리정책
미국 금리 인하에도 일본은 금리 현상유지
두 차례 금리 올렸으나 실질금리는 마이너스
주가 하락을 싫어하는 정치인들도 장애요소
불투명한 미국 경제 전망도 일본 금리 인상 방해
일본은행이 지난 20일 열린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0.25%인 지금의 정책금리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그 36시간 전인 18일 밤에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미국의 정책금리를 4년만에 0.5%포인트 인하하겠다고 공표했다. 원래 일본은행은 미국 FRB가 금리를 인하하기를 고대해 왔고, 그럴 경우 일본은행의 정책금리를 인상해 양국 간의 금리 격차를 축소시켜 장기간의 엔 약세 달러 강세 흐름을 바꾸겠다고 공언해 왔다. 시장도 그렇게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FRB가 금리를 내리자 일본은행은 그렇게 하지 않고 현상유지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그날 외환시장에서 1달러=141.70엔대였던 엔 시세는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의 기자회견이 끝난 뒤 1달러=144엔대로 떨어지는 엔 약세 장세를 나타냈다.
미국 금리 인하, 일본 금리 현상유지
지난 7월 말 금융정책결정회에서 일본은행이 금리를 시장의 예상보다 큰 폭인 0.25%로 올리기로 했다고 발표한 뒤 우에다 총재가 앞으로 금리를 더 큰 폭으로 올릴 수도 있다고 공언한 것과는 다른 행보다.
우에다 총재는 20일 기자회견에서 “금리 인상을 2회 실시했으나 아직은 중립금리보다 낮은 상황이어서 실질금리는 마이너스다. 금융은 완화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립금리’란 경제를 뜨겁게 달구지도 차갑게 식히지도 않는 수준의 금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지난 3월 일본은행이 마이너스 금리로 대표되는 무제한 초저금리 정책에서 벗어나겠다는 ‘탈아베노믹스’를 선언한 뒤 7월 말에 0.25%로 금리를 올렸음에도 실질금리는 여전히 마이너스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당연히 금리를 인상해야 옳다. 그것이 상식적이다.
상식을 깬 일본은행의 역행적 저금리정책
그런데 일본은행은 그런 상식을 깨버렸다. <아사히신문>의 베테랑 경제전문 기자 하라 마코토 편집위원은 21일 일본은행의 이런 행태가 “이해하기 어렵고, 과학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며, 일본은행의 설명만으로는 앞으로 금융정책이 어떻게 바뀔지 “예측 불능”이라고 했다. 그래서 일본은행이 정책변경 발표를 할 때마다 금융시장과 언론들은 “서프라이즈”라며 놀라고 충격을 받는다고 비판했다. 그는 일본은행의 설명을 알아듣기 어려운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지금까지 고물가(인플레)가 계속되고 있는데도 여전히 초저금리의 ‘금융완화’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나라든 물가가 올라가면 금리를 올리는 금융긴축 정책을 쓰고, 내려가면 금리를 내리는 금융완화 정책을 쓰는 게 “상식”인데, 일본은행만은 물가가 올라가는데도 거꾸로 초저금리니 이차원(異次元) 완화니 하는 형용사까지 붙인 금융완화 정책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총무성이 이날 발표한 8월의 소비자물가지수(신선식품 제외)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8%나 상승했다. 이는 일본은행의 물가인상 목표치인 2%를 29개월 연속으로 넘어선 것이다. 이쯤되면 일본은행 주장에 따르더라도 금융완화는 그만둬야 한다.
한때 물가가 치솟았던 유럽과 미국도 지금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일본과 비슷한 2% 후반이다. 하지만 중앙은행 정책금리 수준은 일본보다 훨씬 높다. 미국 FRB는 4.75~5.0%가 됐고 유럽중앙은행(ECB)은 3.5%다.
총재 교체 뒤 금리 올렸으나 실질금리는 아직 마이너스
우에다 총재의 일본은행도 지난 3월과 7월 두 차례 금리 인상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11년간 꿈쩍도 하지 않았던 구로다 하루히코 전 총재 시절과는 분명히 달라진 모습이다. 하지만 실상은 우에다 총재 자신도 인정했듯이 여전히 일본은행 정책금리는 실질적으로는 ‘중립금리’보다 낮은 마이너스의 초저금리 상태다.
그럼에도 지금 일본은행은 금리를 더는 올리지 못하고 있다. 하라 마코토 기자는 그 근본원인을 11년에 걸친 구로다 총재 시절의 초저금리 금융완화정책, 곧 아베노믹스에 일본이란 국가와 기업경영이 너무 적응해버린 나머지 금리에 대한 내성, ‘금리 있는’ 세상에 대한 내성을 완전히 잃어 버린 탓이라고 본다. 개인이나 가계도 다르지 않다.
금리에 대한 내성이 어느 정도인지 읽어내지 못해
우에다 총재도 얘기했듯이 일본은행은 ‘조건만 갖춰지면’ 금리를 올려야 하고 또 올리겠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이번처럼 미국 FRB가 큰 폭의 금리 인하로 일본은행에 금리 인상 기회를 열어줬음에도 전전긍긍하며 올리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는 일본사회의 금리에 대한 내성이 어느 정도인지 일본은행 자신도 읽어낼 수 없는 현실이 한몫하고 있다. 자칫 금리를 견딜 수 있는 내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못 읽고 금리를 올렸다가는 또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지난 7월 0.25%포인트의 금리 인상을 단행한 뒤, 우에다 총재는 0.5%포인트 인상도 장벽은 아니라며 금리를 더 올릴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가 엔 시세가 급등하면서 닛케이 주가가 폭락하는 등 금융시장이 크게 흔들리면서 곤욕을 치렀다.
8월 7일 홋카이도 하코다테에서 강연하던 우치다 신이치 일본은행 부총재가 부랴부랴 “금융자본시장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금리 인상은 하지 않겠다”며 진압에 나선 뒤에야 소동은 가라앉았다.
우에다 총재는 20일 기자회견에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금융완화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2%를 넘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더 끌어올리겠다는 것이 아니다. 기조적인 물가 상승률이 아직 2%를 밑돌고 있어서, 좀더 올라가는 것이 물가 목표(2%)와의 관계에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시 장황하고 다소 모호한 표현이지만, 물가 상승률(인플레율)이 통계상 2%를 넘은 것으로 나오지만 실질적으로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고, 인플레가 실질 2%를 넘어설 때까지 기다렸다가 금리를 올리는 게 바람직하다는 얘기다.
일본은행은 물가 2%이상과 기업의 일정수준 이상의 안정적인 임금 상승을 금리 인상의 전제조건으로 줄곧 얘기해 왔다. 그렇게 돼야 일본경제가 ‘잃어버린 30년’에서 벗어나 금리 인상을 견뎌낼 정도의 선순환 성장 가도에 올라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올해 춘투(봄 임금인상 투쟁) 이후 일부 대기업들의 큰폭 임금 인상, 최저임금 인상 등이 이뤄졌고 물가까지 2%대를 유지함으로써 외관상 그런 조건은 충족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실은 그렇지 못하거나 안심할 단계가 아니라고 일본은행과 우에다 총재는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주가 하락을 싫어하는 정치인들도 장애요소
여기에다 일본 정계가 여야 불문하고 주가 하락을 매우 싫어한다는 점도 중요한 고려 요소다. 이른바 ‘정치환경’이다. 7월 말의 금리 인상 직후 엔 시세가 급등하며 닛케이 주가가 급락했을 때 가장 언짢아했던 집단이 일본 정계다. 일본경제의 펀더멘털(기초 체력)을 망가뜨린 장기간의 일본 엔 초약세를 무릅쓰고 초저금리의 대규모 양적완화를 통해 닛케이 주가지수를 높이 떠받쳐 온 것도 일정 부분 정계의 이해 내지 요구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닛케이 지수를 일본경제 상태를 재는 바로미터처럼 여기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정치인들 특히 집권 자민당 정치인들은 통치의 정당성과도 연관돼 있는 그 지수의 상징성에 신경을 쓸 것이다.
금리를 올렸다가 엔 시세가 또다시 급등하고 닛케이 지수가 급락하는 소동, 즉 ‘시장환경’이 나빠지는 상황이 또 발생한다면 자신들의 처지가 편치 않을 것임을 일본은행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일본은행은 주가 폭락의 ‘범인’이 돼 졸지에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되는 꼴을 당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라 마코토는 미국 FRB의 역할은 “잔치(파티)가 한창 무르익을 때 (거기에 반입되는 술인) 펀치볼을 치워버리는 것”이라며, 그런 FRB와는 전혀 다른 일본은행의 역할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대비시켰다. “구로다 일본은행 총재 시절에는 만취한 손님이 있어도 술을 있는 대로 계속 (파티장에) 들여 보냈다. 우에다 총재 시절이 되자 마침내 잔치를 끝낼 준비가 시작됐다. 하지만 손님들이 불평하자 ‘아니 아니, 술은 계속 드릴게요’라며 둘러대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높은 닛케이 주가에 취한 일본경제가 만취 상태에서 깨어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얘긴가.
불투명한 미국경제 전망도 일본 금리 인상에 발목
게다가 미국경제 전망도 불확실하다. “미국이 소프트 랜딩(연착륙)적인 시나리오에 가까운 상태로 갈 것인지, 좀 더 엄격한 조정 국면으로 갈 것인지, 이것을 주의깊게 살펴 보겠다.” 우에다 총재가 20일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그는 미국 경기의 리스크(위험성)를 거듭 강조하면서 금리 추가 인상 시기를 정하는데 그것이 초점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일본 금리 인상의 운명이 미국 경기가 연착륙할 것인지, 또는 FRB의 금융정책이 잘 풀려나갈 것인지에 달려 있다는 얘기다.
18일의 금리 인상조치 발표 때 제롬 파월 FRB 의장은 “늑장 대처는 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면서 미국 경기의 연착륙을 강조했지만, 우에다 일본은행 총재는 미국경제에 파월만큼 낙관적이지 않은 게 분명하다.
우에다 총재는 “해외경제, 특히 미국경제의 선행 전망에 약간 불투명성이 높아지고 있다”며 그것이 맞장구치는 듯한 모양새가 돼 발목을 잡는 바람에 일본은행의 연속적인 금리 인상 판단을 방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좋게 보면, 미국 경기를 봐가며 금리 인상 여부를 결정해도 될만큼 여유가 있다는 것이지만, 모든 결정을 미국경제 상황에 맡기겠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미국이 저러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가야 책임을 덜 수 있기 때문일까.
결국 정계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정치환경’과 ‘시장환경’이, 주가 폭락의 ‘범인’이 되고 싶지 않은 일본은행의 “이해하기 어렵고, 과학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은 설명” 뒤에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12월쯤에는 일본은행이 금리를 0.5% 수준까지 올릴 가능성이 있다는 전문가들 관측도 나오고 있다. 두고 봐야겠지만, 0.5%로 올린다고 해도 여전히 미국 등과의 금리 격차는 크고, ‘금리 없는’ 시절에는 잘 몰랐던 정부나 기업, 가계 모두의 원리금 상환 부담을 견뎌내야 한다. 그 견디는 힘, 내성이 어느 정도일지를 일본은행은 읽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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